새 코너가 생겼어요 🐣
'미리 보기'는 궁금증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요약을 제시하기도 하고, 자유롭게 내용을 상상하게 하기도 하죠. 세 번째에 초점을 맞추어 제목을 지어봤어요.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의 한 부분을 여러분께만 살짝 보여드릴 테니 기대해주셔도 좋아요! 오늘 메일에는 신간 『가난이 사는 집』 디자인 후기도 담았어요. 새 코너 첫 타자는 섹스토이숍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런데 여긴 조금 달라요.
어떻게? 아래로 오세요! ↓↓↓
 Free-view, Preview 👀

📖 편독자

오랜만에 <오!레터>의 따끈한 새 코너, 「Free-view, Preview」로 돌아왔어요.

새 코너의 첫 주인공은 린 코멜라의 《바이브레이터의 나라》(조은혜 옮김)입니다.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은 쾌락산업을 어떻게 바꿨는가’라는 흥미로운 부제를 달고 있죠.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섹스를 해서도, 섹스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된다는 억압적이고 성차별적인 정언명령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1960~1970년대, 섹스토이숍을 어떤 종류의 문화 공간으로 재발명할 수 있는지를 대담하게 구상한 페미니스트 업자들의 이야기예요. 섹스와 성인용품점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여성친화적 섹스토이숍을 창업하고 직접 제품 개발에까지 뛰어든 용감한 페미니스트 자영업자들의 좌충우돌 사업운영기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놀랍게도 저자는 섹스토이숍 내부로 직접 뛰어들었고, 판매 직원으로 일하며 이 책을 썼습니다.

오늘 보내드리는 에피소드는 저자가 섹스토이숍 현장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밝히는 프롤로그의 한 부분입니다. ‘왜 하필 섹스토이숍이냐’라는 질문에 시종일관 ‘토이는 단지 토이가 아니다’라는 배짱 두둑한 태도를 견지하는 대목이죠. 섹스토이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 한번 들어보실래요?

나는 대학원생이던 1998년에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이라는 주제로 첫 인터뷰를 했다. 그 당시 참여했던 현장연구 방법론 세미나의 필수 과제가 소규모 민족지학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섹슈얼리티와 대중문화의 관계에 흥미가 있었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사적 공간의 프라이버시로 격하되지 않고 공적 존재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공간과 장소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다. 운 좋게도 그 무렵 여성지향 섹스토이숍 인티머시스Intimacies가 내가 살던 작은 대학가 마을에 막 개업한 참이었다. 인티머시스에서 경험한 일들이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의 역사를 이해하고 소매 문화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나는 인티머시스 운영자 에일린 저니Aileen Journey와 나눈 초기 인터뷰로 몇 번이고 되돌아갔다. 이 인터뷰는 나에게 연구자로서 처음으로 돈오頓悟의 순간을 맞도록 해준 경험이기도 했다.

저니는 자신의 사업이 “여성이 자신의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페미니스트적 방법”이라고 여기며 섹스토이숍 굿바이브레이션스Good Vibrations를 모델 삼아 가게를 꾸렸다고 내게 말했다. 굿바이브레이션스는 겨우 50달러의 명목상 비용을 받고 저니에게 섹스토이 공급업체 명단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는 굿바이브레이션스 창업자인 조아니 블랭크Joani Blank가 전국의 많은 도시에 비슷한 가게가 생기길 원했기 때문으로, 인티머시스 이외에도 많은 섹스토이숍이 굿바이브레이션스의 도움을 받았다고 저니는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굿바이브레이션스의 사업 모델에는 “포르노가 여기저기 나돌아다니지 않는”, 편안하면서도 고객이 환대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강조를 두는 방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은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어떻든 모든 여성과 남성이 성적 대상이 아닌 주체로 설 수 있는 곳이었고, 제품을 공개적으로 진열해 사람들이 [편하게] 물건을 고르고 “이게 괜찮은 물건이라고 추천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저니는 인티머시스가 사람들이 섹스에 관한 질문을 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료센터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남성 고객에 주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형적인 성인용품 가게와 이 사업체가 차별화되는 요인을 더 잘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판매 점원과 고객들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며 인티 머시스에서 몇 시간씩 보냈다. “가게에 들어와서 이런 물건 이야기를 하면 정말 해방감이 느껴져요!” 한 여성 고객이 강조했다. 다른 고객은 “난 여기 올 때마다 더 용감해져요. 처음 왔을 때는 아는 사람이 나를 볼까 무서워 어깨 너머로 넘겨다 봤어요. 두 번째 왔을 때는 직원분이 물건 작동법을 설명하자 얼굴을 붉혔고요. 이번엔 그냥 아무 데나 주차를 해버리고 바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니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연구자로서 이 공간에 매혹되었다. 나는 곧 이것이 한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섹스토이를 팔고 섹스를 이야기하는, 성 거래와 페미니스트 정치학이 결합된 특정 방식을 도입한 전국적인 기업 네트워크 전체의 이야기라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즉각 이 소규모 조사를 발전시켜 굿바이브레이션스 모델의 역사와 자취를 더 세심히 진술하고 밝힐 수 있는 더 큰 규모의 연구 과제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성적 은어, 사업 방법, 이념, 난점, 역설이 이 사업체들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더 알고 싶었다.

나는 페미니스트 성전쟁sex war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 즉 포르노그래피, BDSM, 부치-펨 관계,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성적 표현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많은 페미니스트를 양극으로 갈라놓았던 시기에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래서 이 연구 기획은 나와 특별히 공명하는 데가 있었다. 학부 시절에 나는 여러 가치와 정치적 헌신이 경합하여 페미니스트 그룹이 분열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섹슈얼리티 의제를 놓고 입장이 반대라는 이유로 서로 말도 섞지 않는 여성학 교수님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그 공적 표현을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전쟁은 빈번하게 여성의 성적 쾌락 추구와 남성 욕망 및 폭력이라는 익히 알려진 위험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이기도 하다. 나의 페미니즘 이해와 나 자신의 섹슈얼리티 역시 이 전쟁과 깊이 얽혀 있다.

같은 시기에 나는 도슨이 여성 자위에 대해 쓴 기념비적 논문을 접했다. 이 논문은 자위가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디딤돌이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90년대 초반, 나는 생애 첫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굿바이브레이션스를 방문했다. 《온 아워 백스On Our Backs》에 실린 수지 브라이트Susie Bright의 칼럼 〈우리를 위한 토이Toys for Us〉에서 알게 된 그 가게였다. 내가 섹스토이숍에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록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그날의 방문은 마치 통과의례 같았다. 완전히 새로운 성적 상상과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자격을 부여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보건대 나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 다양한 ‘성적 공중sex public’(여성이 운영하는 섹스토이숍, 섹스 가이드, 에로티카 소설, 그리고 페미니스트 포르노그래피)과 접하지 않았다면 나의 성적 여정이 어떤 길로 접어들었을지 그려보기 힘들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뉴욕에 있는 페미니스트 소매점 베이브랜드에서 학위논문을 위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나는 내가 성 문화 개혁 운동의 선두에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판매 현장에서 성교육 담당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가게의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내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수백 명의 고객과 그들의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내게 할당된 분량의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판매하고, 직원 회의와 마케팅 회의에 참석하고, 한 번에 몇 시간씩 연이어 서서 일했으며, 마감할 때는 손깍지를 끼며 시재 정산 금액이 맞기를 기도했다. 민족지학자의 꿈이자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페미니스트 섹 스토이숍의 내부 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관찰자이자 참여자, 민족지학자이자 바이브레이터 판매원인 나의 위치는 내가 베이브랜드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섹스토이 소매점들이 고객에게 자랑스럽게 제공하는 성 말하기 현상 안으 로 곧장 진입했음을 뜻했다. 나는 쇼핑객들과 지스팟G-spot, 끈 달린 딜도, 그리고 바이브레이터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고객들에게 성 관련 정보를 주고, 흔히 퍼진 근거 없는 우려에 반박했으며(“바이브레이터에 중독될 수도 있지 않나요?”에 대한 대 답은 “아니오”다), 좀 더 성적 쾌락을 즐기며 살고 싶은 욕구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한 고객들의 불안을 달래주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일종의 성 상담가라고 할까,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실전 요령도 갖춘 유사 전문가로 본다는 것을 안다. 사교 모임이나 저녁 식사 파티에서 내 연구는 자주 화제에 올랐다. 파티 주최자는 “이분들한테 네 연구 이야기 좀 들려줘”라고 말하곤 한다. “여러분은 얘가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지 절대로 못 맞히실걸요!”라는 말도 들린다.

  갈팡질팡 북디자인 『가난이 사는 집』 
🎨 가내수공업자
단행본 표지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➊사진을 사용한 표지 ➋그림을 사용한 표지 ➌글자를 사용한 표지
사용되는 내용의 비율에 따른 분류이다. 예외적인 것들도 당연히 있겠지만, 여백과 상징도 세 번째 영역에 포함한다면 거의 모든 단행본 표지가 세 가지 분류 안에 포함될 것이다. 그렇기에 표지 디자인 의뢰를 받으면 가장 먼저 세 가지 중 편집자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표지가 어떤 것인지 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지 따져보고 상상해본다.
이 책의 표지를 '사진'으로 하기로 하고 나서 나는 그제야 판자촌의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의 기억에는 없는 풍경들이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책에 등장하는 일본의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나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들, 저자가 언급한 김기찬의 연작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도 찾아보게 되었다. 사진이 너무 흔하디흔한 지금인데도 그 힘이란 참 대단하다. 판자촌의 사진들은 너무 생생했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있으며 그들의 고통까지도 느껴졌다.
그때의 가난과 지금의 가난은 위아래의 위치가 바뀌었구나 싶기도 했다.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 전집』 중에서
그러다가 다시 살펴보게 된 것은 꼭대기까지 빽빽한 판잣집들의 사진이다. 지금은 부자들이 산다는 아파트 가득한 동네도 다 이렇게 가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
▲ 깃대봉 일대 판자촌(1967)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철거를 앞둔 서대문구 천연동 전경(1968.06)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책 표지에 쓰인 사진은 1982년 봉천동 일대 주택지의 모습이다. 판잣집들 지붕 하나하나마다 어마어마한 사연들이 있을 것 같다. 사진이 이렇게 생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랴. 사진을 트리밍하지도, 보더를 주지도 않고 뒷면까지 크게 열어 배치했다. 푸른 하늘에 가까이 살면서도 가난에 갇힌 사람들처럼 제목을 네모 틀 안에 가두고, 그 시절 담벼락에 쓰여 있던 것 같은 스텐실 폰트를 썼다. 이렇게 『가난이 사는 집』표지가 완성되었다. 👇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아갔을까? 이 책은 한때 서울 인구의 40% 가까이가 살기도 했던 판자촌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의 역사를 추적한다. 판자촌의 형성과 밀집, 그리고 소멸 과정은 곧 한국경제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폭력성도 숨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을 잔인하게 철거하고, 그들을 내쫓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큰 이익을 봤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실제 판자촌의 역사는 철거의 역사나 다름없었고, 그에 저항해 싸운 역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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