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지금 깨어 있나요?

안녕하세요. 레터지기 수월입니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평안하신가요? :) 
어느 구독자분이 관찰자 시점에 관해서 다뤄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셨어요. 관찰자 시점이라는 개념이 저에겐 참 어려웠고, 지금도 잘 맞는 옷처럼 착 달라붙진 않습니다. 명료하게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을 만날 때까지, 의심하고 사유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여정을 계속해나가는 수밖엔 없겠지요.
이번 소울레터를 준비하면서 《여사제 타프티》를 다시 펼쳤습니다. (이 책은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의 저자로 유명한 바딤 젤란드가 쓴 트랜서핑 픽션 버전입니다.) 처음에 읽었을 땐 머리에 물음표 수천 개가 떠다녔던 문장이 이번엔 좀더 가까이 다가왔어요. 타프티는 우리가 “생각에 깊이 빠져 있을 때면 주의는 내부 스크린에 완전하게 연결된다. 그렇게 되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반대로 주변 상황(외부 스크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너희 자신은 잊혀지고 그저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하며 이 상태를 “잠들어 있는 상태”라고 알려줘요. 이때 우리는 아무 힘이 없고 나 자신과 주변의 그 어떤 것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요? 타프티는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주의는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지금 내가 어디에 얽매여 있는지 관찰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방법이라고 설명해줍니다.
타프티의 말에 예전보다 물음표가 수천 개에서 수백 개 정도로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봤는데요. 육신을 입은 내가 나가 아니고,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바라보는 의식이 존재하고, 그 존재가 나라는 믿음이 예전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라이프 코치로 활동하시는 카밀로 님이 관찰자 시점을 체화해온 여정을 나눠주셨어요. 삶에서 벌어지는 힘든 일들과 쉴 새 없이 울렁이는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하신다면, 오늘 카밀로 님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일상을 관찰자 시점으로 살아간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모두 보고 아는 ‘앎’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느 날, 어떤 책에서 본 문구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 1달러짜리 화폐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그림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피라미드 꼭대기 부분에 그려져 있는 눈 하나. 나도 모르게 그 그림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비롯해 방 안 전체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시선을 처음으로 뚜렷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몸이 아니라 이 눈이 아닐까?’ 이 생각이 일어난 그때 나라는 정체성이 몸으로부터 쭈욱 늘어나 배면(등 뒤)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감각이었다. 
이후 공부를 하면서 그 그림이 모든 것을 보는 눈을 뜻하는 “전시안(All Seeing Eye)”임을 알게 되었다. 프리메이슨의 상징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전시안은 영성적 기원을 지닌다. 바로 “주시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뒤에서 묵묵히 주시하고 있는 이 앎의 느낌은 나의 모든 순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앎은 인격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주시자 명상수행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비인격적인 느낌으로 변해갔다. 마치 어딘가에 고정된 TV 중계 카메라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알아차림도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더는 진전이 없었다. 이후 수도원에 입회할 때에도 이 감각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나 자신을 몸이 아니라 보고 있는 의식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이는 나라는 정체성이 예전에는 몸뚱이에 동일시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그 동일시의 대상이 의식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여전히 명료하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학생 수사 교육을 받던 중 급성 뇌수막염에 걸렸다. 아팠을 때 바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4일이 지나서야 병원에 실려 갔기에 내 몸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순간에 비로소 배면의 앎은 벽을 깨고 각성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는 마치 깊은 잠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고, 편안한 휴식에서 깨어났을 때 몸은 이미 치유되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있을 때나 꿈을 꿀 때, 심지어는 깊은 잠을 잘 때도 항상 있었던 이가 ‘나라는 정체성’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일상을 주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주시자 의식이 깊어지지 않았던 초기에는 나는 주시자이지 대상이 아니라고 여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비이원성이 깨어난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생각, 감정, 느낌, 반응, 의도, 행위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 감정 등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 감정 등을 명확하게 대상화할 수 있는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생각, 감정 등에 떡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을 본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 가능하다. 생각을 비롯한 정신심리 작용이 일어날 때, 몸을 움직일 때, 사람들과 관계 맺는 모든 순간에 한 발짝 물러나 있다 보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게 된다.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이제 알아차리는 자를 알게 된다. 그것이 주시자의 시작이다. 꽃을 볼 때는 꽃뿐만 아니라 꽃을 보고 있는 나를 아는 앎이 있다.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타인과 언성을 높이며 감정싸움을 할 때도, 기쁘거나 슬플 때도 이 앎이 있다.

이 앎이 각성되기 이전에는 밥을 먹을 때 밥을 입에 열심히 퍼나르고 있는 이를 나라고 믿는다. 길을 걷는다면 걷고 있는 이 몸이 나고, 날이 더우면 ‘아 너무 덥다. 땀이 난다’라고 투정하는 이를 나라고 여긴다. 하지만 주시자가 각성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밥 먹는 이, 걷고 있는 이, 덥다고 투정하는 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아는 이다. 길을 걷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자’, 밥을 먹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자’, 땀 흘려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광경이,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항상 배면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앎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이전까지 철석같이 나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몸과 마음마저도 말이다. 모두가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심리 현상에 쉽게 끌려가 떡이 돼버리지 않는다. 이제껏 나를 괴롭히던 특정한 감정들에 고통받지 않게 된다. 감정 에너지가 강해 끌려가 버리더라도 쉽게 빠져나오거나 묘하게도 감정에 고통받는 개인이라는 상황을 아는 앎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사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혹시 누군가와 다툴 때 타인과 다투고 있는 내 모습과 내 감정을 마치 구경하듯 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구경하는 시선이 주시자다.
주시자가 자각되면 격렬하게 타오르던 감정의 불길이 많이 사그라듦을 경험할 수 있다. 주시자 의식의 초기에서 중반 단계까지는 이처럼 모든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 정도 되니까 삶이 살만했다. 예전처럼 격렬한 감정의 불길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으며 불안감이나 초조함을 느끼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오히려 가슴이 닫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감성 영역이 무뎌지며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초점을 얻었다면 내 현실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들과의 공감 능력을 잃게 되었다. 이런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은 좋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기간을, 감정적으로 볼 때 평온한 상태라고 오해했던 감성 좀비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 마냥 축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인간 의식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체험할 때다. 영성 수련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 수련으로 한 개인의 인간성의 특정한 부분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좀비 주시자는 사라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께 여쭙는다. “지금 누가 이 글을 읽고 있습니까?”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이가 필자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읽는 게 아닙니다. 글을 보면 그것이 나입니다.” 대상과 주체는 하나로서 같은 놈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작되는 생시 상태의 의식이 그대로 나다. 그 생시의 의식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다. 장을 볼 때 내 손에 들려있는 찌개용 두부가 나다.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사랑스러운 반려견이 나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기쁨이 나고, 누군가의 찌푸린 얼굴이 나고, 그의 근심 걱정이 나다. 이해할 수 있든 이해할 수 없든 그 사람 마음속의 한가득 차오른 아픔이 나다. 제대로 된 수박을 고를 줄 모르는 내게 사기를 쳐서 설익은 수박을 사게 한 과일가게 아저씨가 나며, 반대로 언젠가 거만하고 싸가지 없던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친구 녀석이 나다. 이 현실은 말 그대로 온통 ‘나의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현실의 에피소드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게 이런저런 반응하는 역할은 할지라도, 그 어떤 수를 써도 세상을 미워할 수는 없다. 누군가 나를 공격할 때 그에 따른 반응은 취하겠지만 진짜로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이 상황 자체가 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비이원이 드러나는 순간 알게 된다. 그 누가 되더라도, 그 무엇이 되더라도, 그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게 나 자신이기 때문에.

어렸을 적 필자가 다니던 성당에서 “내 탓이오”라고 적힌 스티커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도대체 왜 내 탓인지 알 길이 없이 그저 그렇게 가슴을 두드리고 “내 탓이오” 하며 기도하면 좋다길래 따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문장을 온전히 이해한다. 어째서 ‘내 탓’인지를 말이다.
 
진정한 주시자는 항상 대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를 아는 일상의 삶은, 세상이라는 낯선 무대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삶이 된다. 이를 통해 항상 하나를 확인한다.
 
“나는 내가 있음을 알고 있다.
I am that I am.” 
카밀로
10대 때부터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동서양의 다양한 영성전통을 공부하며 수행했다. 2005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답을 얻기 위하여 스페인 갈리시아의 엄률 시토회 소속 산타 마리아 데 소브라도 봉쇄수도원에 입회하였다. 2011년에는 종신서원을 발하고 900년이 넘는 수도회 역사상 두 번째 한국인 남자 종신서원자가 되었다. 가톨릭 수도자 출신이지만 동양의 핵심영성인 비이원론의 수행자이며 현재 네이버 카페 ‘라이프 루시딩’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크릿을 깨닫다》와 《당신의 현실에는 이유가 있다》가 있다.

님은 이 세상이 모두 ‘나’임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혼자 알기엔 너무 아까운 귀중한 경험을 들려주세요.
💌

카밀로 님의 추천 도서📚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아디야산티, 정성채 역, 정신세계사)

의식 수행을 하다 보면 거쳐 가게 되는 몇 가지 공통적인 포인트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개체적 자아의식으로 살다가 우주적 자아의식이 되고, 마침내 이마저 넘어서 절대에 이르게 되는 여정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평범하고 불안하게 살다가 비범하고 특별해지고, 마침내 특별함마저 넘어 다시 비범하게 평범해지는 과정이지요.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가는 길목이 있습니다. 바로 내맡김과 내려놓음입니다. 책을 읽는 개개인의 마음에 전해지는 메시지의 형태와 정도는 각각 다르겠지만, 이 책은 친절하게 내맡김과 내려놓음에 대해 안내하고 있습니다. 사실 읽는 이에게 강요되는 정해진 결론은 없습니다. 다만 영성적인 삶 안에서 비할 수 없는 가치인 내맡김과 내려놓음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른 시각으로 음미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합니다.

📒파도가 바다다

(빌리기스 예거, 양태자 역, 이랑)

이 책은 지금은 절판된 정신세계사의 《어느 관상수도자의 무아체험》과 함께 가톨릭 수도자이면서 동양 영성의 수행자였던 제게 큰 즐거움을 주었던 책입니다. 저자인 빌리기스 예거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사제이자 동시에 동양 영성의 수행자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이지만 동양적인 비이원 영성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비이원성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하느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다기보다는 파도(피조물)와 바다(창조주)를 구분하는 이분법 자체를 깨버리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과 자신을 이분하지 말고, 인간이며 동시에 신성을 실현하는 신적인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많은 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 표지를 클릭하면 자세한 책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간 소개
《나는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 : 편집자가 픽한 문장 🤏

📚나는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

(융 푸에블로, 김우종 역)


8월 신간이 나왔습니다! 부제도 멋진 ‘진실한 나로부터 솟아나온 이야기’ 《나는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입니다. 저자 융 푸에블로가 명상수행을 하며 정직하게 내면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난 경험과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200여 편의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 몇 줄로 이루어진 글이지만 거기서 뿜어내는 깊이와 지혜는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이 저자의 글이 지닌 힘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편집부에서는 계속 곱씹게 되고,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글이라는 얘기도 나누곤 했어요.
그중에서도 편집자 두 사람의 마음에 들어온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 숨 편집자의 픽

에고의 두려움을
지켜내는 것보다
자유로운 존재 상태가
더 중요해진 이후로
나는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저는 조금이라도 스스로의 결점을 보일 수 있는 말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얕볼 거야,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거야’라는 에고의 두려움을 지켜내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이런 상태에 진절머리가 나 차라리 얕보여지기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로 결심하고 나의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에고의 두려움 바깥에 더 큰 자유와 해방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런 경험이 있기에, 융 푸에블로의 ‘자유’라는 말이 ‘나의 그 어떤 모습이든 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는 상태’로 다가옵니다. 여러분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인가요? 

📜 수월 편집자의 픽

나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지혜롭지도 않지만
나는 종착점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좀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은 모습에 내가 털끝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곤 해요. 이 책을 편집할 당시에도 막막함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난 이 글은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이든지 나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었어요. 그 안도감 사이로 ‘지금 내 모습 그대로 괜찮다는 그 말을, 정말 믿어보고 싶다’는 새로운 길도 열어주었습니다. 삶에 지칠 때마다 펼쳐보고 힘을 내보려고 해요.

자유를 향한 내면여행을 하고 계실 님께 이 책이 든든한 길동무가 되길 바랍니다.

※ 표지를 클릭하면 자세한 책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울레터에 도착한 답장들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그 자체로 경이롭습니다. 지리한 짝사랑을 6년간 이어가던 중 혼자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이성에 대한 집착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소용돌이처럼 나를 집어삼키던 감정이 한순간에 정리된 놀라운 경험이었죠. 또 저는 뒷산을 자주 등산하곤 했었는데요. 새벽에 일찍 나가 이슬을 맞은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복잡한 머릿속이 맑아지죠. 취업을 준비할 때 서류를 모조리 탈락당하고 면접도 보는 족족 떨어진 그때, 등산을 하며 머릿속을 비우고 육체를 고되게 하는 그 힘든 과정들이 나를 지켜준 것 같습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나 자신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고, 성숙해지는 과정들이 모두 소중합니다. 나이가 들고나니 어느새 모든 것이 정해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빛나는 미래를 꿈꿔보는 게 허황되지 않은 소망이길 바랍니다. 앞으로의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내 인생이 너무 힘들지 않길… 걱정하는 일보다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별똥별에 비는 소원처럼 빌어봅니다.

⭐바닷속에서 느끼게 되는 두려움으로 인한 거친 호흡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두려움이란 알아차림과 뱉어냄으로써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비단 바다에서의 두려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한다. 타인도 나이고, 자연도 나인 것이다. 이러한 타인, 자연이 멀게 느껴지고 이들과 친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거리감과 친함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타인, 자연과 가까워지려 한다면 이는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중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들을 할 수 있게 해준 소울레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몇 년 전, 만나는 사람과 잘 되지 않아서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즈음 제주도에 갔다가 제주 절물자연휴양림에서 혼자 숲길을 걸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숲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뭣 모르고 걷기 시작해서 호기심이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하다가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반가움에 발걸음이 빨라지기도 하면서 긴 숲길을 걸었습니다. 걷는 동안 다른 잡생각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길을 따라 입구를 찾아 나가는 게 목표였습니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길을 잃지 않고 온 나 자신이 기특했고, 걷는 동안 앞사람들의 경쾌한 목소리에 두려움을 떨쳐낸 거에 감사했어요.
그때의 숲길을 걸었던 경험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저에게 위안이 됐다는 걸 알게 돼서 지금도 생각이 많아질 땐 집 근처 둘레길을 혼자 걷고 옵니다. 경치 좋은 곳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흘려보내다 내려오면 기분도 한결 가벼워지고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어 좋아요.

⭐숲, 노래하다

                              한삶 안윤홍균

숲은 어둠에 잠겨 고요한데 
산길을 비추는 가로등만이 
호젓이 서 있다 

오로지 나만 움직인다 
나는 홀로 춤을 춘다 

나는 살아있다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은 
고즈넉이 나를 지켜본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동이 튼다 

가로등이 갑자기 꺼졌다 
산이 깨어난다 

온갖 새와 풀벌레들이 
하나둘 노래하기 시작했다 
합창이고 떼창이다 
장엄한 합주이고 교향악이다 

나는 그들과 한데 어우러졌다 
나는 자연의 일부분이었다가 
이내 하나가 된다 

내가 바로 자연이었다 
내가 곧 우주였다 _ 블로그
지난 소울레터가 자연이 주제여서 그런지 답장들이 모두 초록초록하네요~ 😊
숲속에 있으면 어느새 개운해지고 그냥 다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을 역시 저만 받는 게 아니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어요. 답장마다 거대하고 울창한 생명력이 가득 느껴져서, 저 역시 힘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피드백 주시고, 답장을 보내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합니다. 이렇게 소통을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마음인지, 늘 기억하고 있어요.

소울레터의 추천곡

<우주의 먼지>

얼마 전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 내용을 나누는 모임에 나갔는데요. 어떤 분이  싱잉앤츠의 <우주의 먼지>라는 노래를 추천해주셨어요.
“아닌 척 해도 가려도 넌 별보다 빛나 / 작아도 이 우주에선 유일한 별 / 커다란 세상에서 / 작고 빛나게 살고 싶어 걱정 없이.”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싶어도 내가 만든 욕망과 감정의 무게에 짓눌릴 때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는데요. 그 친구는 이런 말을 해주곤 했어요. “그럴 때 난 ‘나는 미생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줘. 그럼 내가 뭔가 거대한 걸 이룰 수도 없고,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어.” 그 말이 비대해진 제 자의식에 구멍을 뚫어주는 것 같았어요. 이 노래를 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우주만큼 커지길 바라지 않고 나만의 빛이 어떤 모습인지 살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먼지가 되길 택해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 
잔잔하게 경쾌한 이 곡으로 하루를 시작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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