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설 연휴가 시작합니다. 즐거운 뉴스보다 안타까운 뉴스들, 특히 2년째 코로나에 관한 소식에 참 답답하지요. 평소 못 만나는 가족이나 온 식구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회인 명절이 올해도 그냥 지나가버릴 것 같아요.

  시댁 식구들과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식사할 기회를 취소했어요. 시부모님께만 인사드리러 찾아뵌 뒤 우리 식구끼리 집에서 간단하게 고기를 굽고 말까 해요. 코로나인 요즘엔 집에서 해 먹을 요리가 아주 단순해진 느낌이 드네요. '요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이러면 안 되는데…' 싶기도 합니다. 그동안 자극받을 일이 없어서인지 새로운 레시피를 생각해도 예전 같지 않네요. 명절이나 긴 연휴를 앞두고 음식을 차려낼 생각에 여러 가지 레시피를 떠올리며 흥분하곤 했는데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저의 일을 하나씩 해낼 수 있어 새해 시작이 즐겁습니다. (히데코레터를 구독해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새 학기에 활짝 웃음 띤 얼굴로 수강생들과 만날 수 있도록 이번 연휴엔 특히 마음을 쉬려고 합니다. 그럼 다시 한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휴를 기다리며, 히데코 올림


  지난 학기 수업들을 모두 마치고 새해를 맞이했어야 하지만 연말 코로나 방역이 강화되어 수업을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는 보강수업을 주로 진행했는데요, 그중에 스페인 요리 클래스에서 다크 초코가 들어가는 스튜를 만들어봤어요. 다진 양파, 마늘과 토마토를 충분한 올리브 오일로 튀기는 듯 볶아서 만드는 '소프 리트(sofrito)'를 베이스로 당근, 감자, 양송이버섯, 그리고 미리 노릇하게 구워 둔 소고기를 넣고 보글보글 1시간 정도 끓입니다. 그리고 아몬드와 다른 견과류, 초콜릿을 같이 으깨 만드는 피카다(한국요리의 다데기 같은 것)를 섞어서 간을 조절해요. 초콜릿 맛을 더 느끼고 싶으면 레시피보다 더 초콜릿을 더하면 되고요.

  2년 전에 출간한 [모두의 카레]에는 “엄마의 토요일 카레라이스”에 달콤한 밀크초콜릿으로 마무리하는 카레가 첫번째로 소개되어 있어요. 그냥 먹어도 맛있는 초콜릿은 요리에 마지막 팁으로 넣으면 마법의 조미료가 된다는 것! 이번 주 스페인 요리 클래스에서 배우던 수강생 여러분, 집에서 구정 연휴 때 해보시면 어떨까요?! 레시피는 올 이른 여름에 출간 예정인 [지중해 요리 개정판]에 실립니다.

(히데코 요리교실의 수강생분들이 찍어주신 사진들입니다)
<히데코 요리교실 대기자 등록 안내>
쿠킹클래스를 위해 대기자 등록을 하시면
4월에 재등록 시 잔여석을 파악하여 순서대로 문자 연락 드립니다.
*2~4월 봄학기 마감

  "몇십 년 동안이나 고이 모셔둔 것들이다. 너무 많아 엄청 후회하고 있어. 전부 줄 테니까 서울에 가져가거라. 돈이 궁해지면 노점상처럼 팔아도 되고. 하하하하하."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일본 본가에 갔을 때, 아버지는 선반에서 오래돼 보이는 오동나무 상자를 여러 개 가져오셨다. 상자 안에는 어느 시대의 작가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찻주전자와 찻잔, 돗쿠리 같은 것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요리사답게 그릇만큼은 식기 선반에 꺼내놓고 평소에도 즐겨 사용하셨지만, 몇 개의 찻주전자와 찻잔만 번갈아 썼을 뿐 대부분의 찻주전자나 찻잔을 내놓는 일 없이 보관만 하셨다.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렇다.


  나는 좋은 물건을 사용하는 대신 보관만 하셨던 아버지의 후회를 통해 배운 대로,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치 있는 것을 자연스레 접하고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사용하게 했다. 그릇과 와인잔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고상한 태도를 강제한 탓일까, 아끼던 조선백자의 찻주전자 뚜껑은 반으로 갈라졌고, 아버지가 준 에도시대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잘토(zalto) 와인잔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잘 안 보이는 곳에 몰래 감춰져 있기도 했다. 크게 혼내는 대신 계속 사용하게 뒀다. 경험보다 나은 학습이 없듯, 아이들이 그릇을 다루는 방식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더 많은 그릇을 사용하게 한 것은 물론이다.


  요리교실에서나 집 밥을 만들 때 사용하는 접시들은 여러 종류이다. 그릇을 만드는 재료는 자기(porcelain), 도기(pottery), 목기, 칠기, 유리, 은과 놋 등 다양하다. 요리교실이 열리는 아틀리에와 2층 부엌 한 편에 눈에 잘 띄도록 평소 사용하는 그릇들을 놓았다. 요리가 완성되어가면 ‘이게 좋겠어’라며 바로 담아낼 접시를 고른다.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진다. 잘 사용한 그릇에 대한 애정, 요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식에 그릇이 지닌 이야기가 더해지면 식사는 더욱 즐거워질 터. 나는 그릇을 사면 두근거린다. 푸드 스타일링을 위해 특정한 그릇이 필요하면 식기를 취급하는 가게에 물어보거나 직접 둘러보며 찾는다. 대부분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장만했다. 갤러리에서 전시 판매되는 그릇에도 눈이 가곤 한다. 연이 닿아 알고 지내는 작가들의, 만든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는 그릇들도 소중하다.


  때로는 그릇에서부터 모티브를 얻어 메뉴를 개발할 때도 있다. 그래서 심플하지 않은 난해한 그릇을 만나면 더욱더 어떤 요리를 조합할지 머리를 굴리게 된다. 이런 형태이니 이런 요리를 담아야지, 식재료는 어떤 색깔이 좋을까, 질감이 이러니까 이런 재료가 좋겠다는 등 나에게 그릇은 요리의 창조성을 높여주는 존재다.


  사용할 때 빛을 발한다. 값에 상관없이 내가 골랐다면 그것들이 좋아지고 소중해진다. 잘 사용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그릇 하나라도 나에게 어울리고 필요한 것을 살 것. 장만한 그릇들이 그 가치를 발하도록 알맞게 다룰 것. 그릇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에 통한다.

  결혼 승낙의 OK 답장을 받은 순간, 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히데코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회사에 휴가 연장을 신청한 후 도쿄에 가기 위한 티켓팅을 했다. 당시 회사에서 정해준 티켓은 대한항공이었기 때문에 대한항공으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쿄로 갈 수가 없어, LA를 경유, 도쿄-서울 노선으로 조정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일정을 다 마친 어머니를 먼저 서울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영어도 못하시고 비행기를 처음 타시는 어머니가 홀로 탑승 수속하시는 것이 너무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 임시 출입증을 하나 만들어주었고, 직접 어머니를 기내까지 모셔드리고 나올 수 있었다. 멋진 제복의 기장이 나와서 어머니를 맞이해주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어머니는 내게 비행기 타니까 좋더란 이야기를 많이 하시며,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할 때마다 비행기에서 내가 늘 그런 대접을 받는 줄 아셨다. (어머니...저도 그때 처음 일등석 가봤습니다...)


  어머니를 잘 보내드린 후 LA를 가기 위해 렌터카를 몰았다. 라스베이거스와 맞먹던 카지노의 도시 리노를 잠시 들렀다. 가끔씩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카지노에 가면 대개는 돈을 따오는 편이라, 이번에도 여행비 보충도 할 겸 리노를 들르기로 한 것이다. 오후와 저녁나절 계속 카지노에서 용돈을 벌고 신데렐라 마냥 자정에 리노를 빠져나왔다. 카지노에서 용돈을 번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샌프란에서 LA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6시간 동안 운전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짓이다. 그땐 젊었으니까 가로등조차 없는 i80 고속도로를 리노에서 레이크 타호와 새크라멘토를 거쳐 밤샘 운전을 한 것이다. 쏟아진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별들을 보면서 시에라네바다의 주유소 공중전화로 히데코에게 전화도 했다. 내일 일본으로 간다고, 공항에서 빨리 만나고 싶다고.

지금처럼 편리한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호텔에서 구할 수 있는 지도에 도로 번호와 지명을 표시해두고 찾아다녔다.
  무사히 LA로 가서 바로 도쿄행 비행기를 탔고,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승무원이 식사를 위해 깨웠다. 알래스카 상공을 지나고 있다며, 마침 오늘 일등석엔 손님이 두 분이니까 다른 승객과 서로 인사를 하시지 않겠냐며 권했다. 누군지 물어보니 NBA의 전설 매직 존슨이란다. 바로 건너편 한정식을 먹는 내 옆에서 콜라와 햄버거를 먹어치우는 덩치 큰 사람이 매직 존슨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인사하고 일행과 함께 사진도 같이 찍었다. 다행히 카메라에 필름이 남아 있었다. (그땐 휴대전화 카메라가 없던 시절...) 일행과 카드놀이도 했다. 카지노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따는지 자랑질도 좀 하면서. (매직! 아직 내게 2달러 갚을 게 있는데 알고 있나?)
기내에 있던 웰컴키트에 받았던 사인. 이 사진을 보여주면 매직존스가 기억하며 2달러를 갚아줄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엔 일본을 가려면 비자를 받던 시절이라 갑자기 일정을 변경한 나는 일본 비자가 없었다. 다만 한국인들에겐 도착 공항 근처에서 72시간 체류 가능한 상륙 허가 제도가 있어 대한항공 직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내리게 되었다. 나리타 공항엔 히데코가 마중 나와 있었다. 순간 지나온 우리의 수많은 사연들이 생각나 벅차오르는 대견한 마음에 히데코를 꼭 안아주었다.


  도쿄에 출장차 오게 되면 머무는 한조몬 역 근처 다이아몬드 호텔에 방을 잡았다. 늘 하던 대로 싱글룸으로 예약한 터라, 당직 지배인은 우리가 로비를 지나갈 때마다 도끼눈을 하고 쳐다봤다. 일본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호텔의 싱글, 더블 요금이 확실히 차이가 나는데, 그때 미국에서 급히 전화로 예약하느라 소통도 잘 안 되었고, 다시 말하기도 멋쩍어 그냥 슬쩍 넘어간 것이다. 일본 호텔답게 매우 작은 방, 그마저도 싱글룸에서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은 후 만난 우리는 신혼여행이나 다름없는 3일을 보냈다.


  “그때의 다이아몬드 호텔 지배인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다이아몬드 호텔은 제겐 행복한 추억의 호텔이고 이 추억을 떠올리며 계속 좋아할 겁니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 동료의 손글씨 편지. 히데코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일본에 오면 꼭 만나자며 연락처를 남겨준 동료가 아직 고맙다. 몇해 후 일본에서 반가운 재회를 했던 것은 좋은 추억이 아닐 수 없다.

  2011년, 첫 책을 출간하고 레시피 북, 에세이 등 여러 권의 책을 다양한 출판사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최근 새로운 책이 발간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그 책의 출간일이 생일처럼 느껴집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듯 책 한 권도 그런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니 함께 작업하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생일 축하하듯, 저도 저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것을 기념하고 싶어 졌어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기도 하고요!


  1월에 생일을 맞이한 책은 두 권입니다. [히데코의 사적인 안주 교실]은 즐거운 한 잔을 자주 누리자는 의도로 간단하게 바로 즐길 수 있는 안주 레시피에 초점을 맞췄어요.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을 때, 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술 한 잔이 필요하곤 하죠. 그때마다 가까이 두고 이 책을 펼친다면 여러분의 식탁이 한껏 더 즐거울 겁니다.


  두 번째 책은 [나를 조금 바꾼다]입니다. '공간과 시간 속의 나'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가꿔온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로, 책 제목이 저의 삶의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책을 썼던 무렵과 지금 무엇이 동일하고 또 달라졌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것도 큰 유익입니다. 


  다시 한번 이 책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과 기꺼이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려요! 저의 글이 여러분의 삶에도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중앙북스 / 2022년 1월 3일
마음산책 / 2019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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