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엔 무서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분명 무슨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한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한 기억이 없는데, 정황상 내가 했다는 너무나 명확한 증거가 있을 때. 저는 약간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 일은 수면 내시경을 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수면내시경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의 ‘깨끗하다’라는 진단을 들은 뒤, 약간 어지러운 상태에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제야 며칠 동안 내시경 준비를 하느라 마음고생했던 것들이 풀리기 시작했고, 기쁜 마음에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잘 마쳤다”는 심경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달콤한 낮잠이었죠. 자고 일어나니 알람이 몇 개 쌓여 있었습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대한 반응들이었습니다. 누가 누가 좋아요를 눌러주셨을까~ 확인하러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바로 그때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저의 스토리에 제가 올린 기억이 없는 스토리가 하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영화 <어파이어>의 별점과 한 줄 평이 기록된 씨네21의 게시글을 올린 스토리였습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는 분명 수면 내시경을 마친 직후에 올렸던 것이었죠. 그러니까 저는 수면 마취에서 풀린 후, 옷을 갈아입은 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대기 시간에 인스타그램을 켜서 이걸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 수면 마취가 아직 덜 풀린 탓인지,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았던 거죠. 그 정신에 이걸 올린 저는 정말 못 말리는 인스타그램 중독 상태가 아닌가, 하며 저 자신을 되돌아본 계기였는데요. 그나마 이런 걸 올려서 다행이지, 실수로 저의 추잡한 본성을 드러내기라도 했다면 정말 어플을 영원히 삭제했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시 조만간 수면 내시경 계획이 있으신 분이라면, 부디 깨어난 직후 SNS를 키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단련시키시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아무튼(?) <어파이어>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제 기억에 없는 제가 올린 스토리에서 저는 이 영화에 별 9개를 준 뒤, ‘타오르는 인지부조화의 초상’이라는 평을 적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유명한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었는데요. <어파이어>를 보고 <타여초>가 떠오른 이유는 둘 다 ‘타오르는 초상’들이 존재하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은 ‘인지부조화’의 ‘화’도 불 화(火)의 화입니다.


‘불타서’, ‘(감정이)격하여’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AFIRE>는 '불'의 영화입니다. 일단 이 영화엔 산불이 있습니다. 인물들이 며칠 동안 산장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인 설정인데요. 이 산장으로부터 적당히 먼 곳에 현재 산불이 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인근에 산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은 인물들의 대사와 불을 끄러 가는 헬기 소리로만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화에 ‘불’이 등장하진 않지만, 분명 타오르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짜'로 받아들여진다는 거죠. 그렇게 ‘뭔가 타오르고 있다’라는 필터가 이 영화 전체를 뒤덮게 됩니다.


그래서 <어파이어>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원래라면 이렇게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매우 뜨겁게 느껴집니다. 특히 이 영화는 주인공 레온의 시점으로 진행되기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 레온의 뜨거운 감정을 그대로 흡수하게 됩니다. 레온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지부조화’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글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도통 글 작업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화 내내 이와 같은 ‘인지부조화’의 사례들이 마치 장작처럼 끊임없이 추가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영화는 더욱 뜨거워지는 것이구요, 마침내 그 열에너지는 레온의 주변 인물들을, 나아가 레온을 둘러싼 세계까지를 불에 휩싸이게 만들어버립니다.



<어파이어>는 다분히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물론 연출적으로도 특장점이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들, 그리고 그 인물들의 마지막 도착지 하나하나가 각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의미를 헤아려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구요, 영화 속에 흐르는 열에너지의 이동을 추적해 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감상법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나에게 일어났던, 나를 새하얗게 불태웠던 불같은 분노의 근원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가끔 까닭 없는 분노에 휩싸일 때 다들 있으시잖아요. 그렇게 나도 모르게 분노를 표출한 다음, 대체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이게 내가 저지른 짓이 맞는지 자괴감이 드는 순간들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의 주인공 레온에게로 슬그머니 마음이 움직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상 불 같은 수면 내시경 후기를 마칩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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