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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행운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식물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는 
식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이소영 식물세밀화가의 편지에서

님, 지난 편지 어떠셨나요?
오늘은 이반지하/김소윤 작가가 보내는 편지를 전합니다.

오늘은 형님이 보내는 행운이 함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즐겁게 읽어주세요.
💫

이반지하/김소윤
2004년부터 페미니즘과 퀴어에 대한 진지한 농담을 소재로 한 자작곡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퀴어 퍼포먼스 아티스트 ‘이반지하’이자, 경계를 넘나드는 삶의 순간들을 회화, 사운드아트,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표현해 온 현대미술가 ‘김소윤’. 에세이스트, 시트콤 작가, 재담꾼(유머리스트), 유투버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
나도 한때는 언니들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믿어주십쇼. 나도 한때는 언니들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언니로 부르는 것도 좋아했고, 그것에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 속 언니는 모두 게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힘들 때 안아주는 언니, 좋은 수액을 추천해주는 언니, 술 먹고 개가 되는 언니, 하나같이 게이 언니들입니다. 생각해보니 게이가 아닌 누군가에게 언니라고 부른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 전 내가 운동하는 체육관에서 어떤 분이 갑자기 나이를 묻고는 언니라 불러도 되느냐 물었는데, 나이 어쩌구도 언니라는 말도 너무 낯간지러워서 제발 그냥 누구씨로 불러달라 부탁했습니다. 나에게 ‘언니’는 이제 본래의 뜻과는 너무 다른 의미들로 버무려져서 더이상 온전히 건져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 만약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꼭 내가 아닌 남들이 해주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 나의 언니였던, 존경하거나 흠모했던 과거의 당신들을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나는 그것이 [형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위대한 당신들을 언니라고 부르는 순간, 당신들이 여자가 되어버리는 게 나는 너무 싫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부르는 나 역시도 너무 높은 확률로 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적잖이 부대낍니다. 적어도 [형님] 정도는 붙여줘야 당신들의 격에도 맞고 내게도 적당히 균형이 맞춰지는 느낌이 드는 건, 내 성관념이 대단히 비뚤어져서가 아니라 세상이 너무 언니를 여자로 만들었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살면서 내가 언어를 이길 수 있을까 많이 생각해봤고 도발도 해봤지만, 경험적으로 별로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언니는 게이들한테 주고, 나는 성님들이나 떠받들고 살려 하게 된 것입니다. 

주디스 버틀러 형님, 당신도 한국에서 났다면 글쎄요, ‘주버들’ 언니 정도로 불리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는 당신의 단호한 입매와 숏컷, 전통 발라드 가수의 그것과 같이 대각선으로 이마를 가르는 앞머리를 보면, 내 입에서는 ‘아이고 형님’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이것은 당신이 말 그대로 너무 형님이어서이기도 하고, 옛 여자들이 자기들의 위계 안에서 윗사람을 친근하게 ‘형님, 형님’ 하며 부를 때의 그것과도 대충 연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감히 『젠더 트러블』 같은 걸로 성공했다는 부분이 좋습니다. 당신의 이론을 몸소 수행하고 있는 듯한 당신의 외모도 좋아합니다. 그래요, 당신이 아닌 누가 젠더 트러블을 할 수 있었겠어요?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언어를 참지 못해서 이미지가, 음악이, 예술이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쓴 글들을 완독하거나 모든 연구를 분석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나는 누군가가 정성껏 잘게 씹어 뱉어주는 부드러운 유동식 버전의 당신 이론들로도 충분히 나의 지적허영을 채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여 알게 된 당신 이야기의 골자는, 내가 내 몸에 갇힐 수밖에 없을지라도 갇히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당신이 무슨 얘기를 시작했고 그 얘기가 누구의 목소리를 들리게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나도 이 사회와 시대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고 보편적인 억지 속에서 여자로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딱 남들만큼 나도 내가 여자인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여자를 향한 욕만큼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남자용 욕이 없어서 영원히 그들과의 개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완전히 좌절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왜 어느 시기부터 남자애들이 무리지어 아이스께끼를 하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 내 팬티 색을 알면 왜 좋은 건지 여러번 되묻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생리를 시작했을 때는 세상이 이제 나를 완전히 무릎 꿇리려 한다는 생각에 깊이깊이 절망했습니다. 

내가 디디려고 하는 걸음걸음마다 내 몸이 나를 잡고 놔주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무엇이 되고 팠다기보다 그냥 ‘여자’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자도 괜찮다, 여자도 할 수 있다 정도의 위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에 기운을 얻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말하는 ‘여자’와 화해하고 타협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로 큰 숨막힘을 느꼈습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졌고 여자로 취급받았고 그래서 그 경험이 아닌 나를 구성할 수 없다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살아지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여자’를 외치면서도, 내가 ‘여자’인 걸 싫어하고, ‘여자’를 잃지 못하면서, 동시에 ‘여자’가 되는 길을 다 망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인 ‘나'라는 인간입니다. 

이 모든 반문과 통합, 현재적 결론에 있어 나와 나 같은 사람들은 주디 형님에게 어느 정도 신세를 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이 빚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편지를 쓰려고 하면 평생 써도 모자랄 만큼 긴 형님 리스트가 있겠습니다만, 우선 만리타국에 있는 당신한테 먼저 써야 첫 단추가 끼워진 느낌이 들 것 같았달까요. 

주디 형님, 물론 당신을 이 지면에 끌어온 것은 좀 멀찍이 있는 사람을 끌어와서 안전하게 글을 쓰려 했던 나의 안일함과도 맞닿아있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형님’이란 호칭이 만났을 때의 불협과 선정성이 유혹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그런 부조화가 만드는 문제적 상황을 활자로, 그림으로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사실 이미 사망했거나 SNS 등의 각종 매체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채, 대중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오롯이 찬양하거나 존경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트러블 형님도 이 긴 수명 속에 구설수가 없진 않으실 겁니다. 인터넷 덕분에 이억만리에서 털린 형님의 먼지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조금 슬퍼지기도 합니다. 멀리 있으면 완전히 우러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배웁니다. 예전에는 양나라 퀴어면 덮어놓고 괜찮아보이던 시절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요, 말끔하게 좋은 시절은 애저녁에 끝나버렸습니다. 

이제 와 얘긴데 사실 나는 형님을 그렇게 막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아하거나 싫어할 만큼 친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젠더 트러블 형님인 것 하나로, 일단은 많이 먹어주고 들어가신 상황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언어를 쥐어준 사람을, 그것이 비록 식민지인으로서 번역과 해석을 거쳐야 하는 난해한 제국의 언어라 할지라도, 어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에 있어 미워할 여유 같은 게 나한테 애초에 가당키나 할까요. 질문 아니니까 대답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서 형님, 저는 이 편지를 끝으로 주 형에 대해서는 정리하려고 합니다. 형님에 대한 존경은 충분히 표했으니, 이제 내 주변의 평범한 어중이떠중이들이나 부둥부둥하며 살려고 합니다. 형님은 형님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이 편지를 쓰면서 생각해보니까, 누구를 부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내가 언니고 형님이고 다 해먹어도 되겠다 싶어졌습니다. 내 허물은 남의 것보다 작아 보이는 법이니까, 나는 내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영에 사로잡히려고 합니다. 결국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닐까 싶네요. 앞으로도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트러블대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이만 줄일게! 
안녕!

귀염둥이 이반지하/김소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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