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아버린 그 골목에 대하여
2023.11.24. 여덟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골목입니다. 골목은 큰길에서 쑥 들어가 동네나 마을 사이로 이리저리 나 있는 좁은 길을 의미합니다. 집들과 좁은 벽이 양 옆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걷다보면, 차들이 쌩쌩 다니는 큰 길가와는 다른 세상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기도 하죠. 여러분의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골목이 있나요? 살다보면 마주치는 수많은 골목을 떠올려보며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오늘 땡비와 함께 여러분에게 골목은 어떤 의미인지 편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깡깡이 마을에서 @못골

 

골목 문앞 마다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할아버지 뭐해? 사진 찍어? 자전거 찍어?“

"응! 그래!"

-“왜 자전거 찍어?”

"자전거가 예뻐서"

-“자전거만 찍어?”

"응! 그래!"

-“우리 동네 자전거 많은데......”


그러면서 혼자서 지루했는데 할아버지를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따라붙는다.

"이름이 뭐야?"

-“이낙원이야!”

"오! 이름이 예쁘구나! 알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을 보니 낙원이는 똑똑한 어린이인가 봐!"


그 말에 낙원이 얼굴에 엷은 웃음이 스친다.

계속 따라붙으면서 스스로 사진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얼마나 지겹고 재미가 없을까?

하루 종일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낙원이를 생각해본다.


-“할아버지는 집이 어디야? ”

"구포야!"

(삭막한 괴물 도시 해운대는 이 심성 고운 어린이에게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예스러운 지역을 말한다.)

-“구포는 멀어? 어떻게 왔어?”(이야기를 이어보려 건성으로 묻는다)

"전철타고 왔어"


용왕당을 돌아 골목 끝으로 나오자 낙원이 슬며시 뒤쳐진다.

멀어져 가는 나를 아쉬워하며

더 따라오지 못하고 운동기구에 달라붙어서 손을 흔들고 있다.

갑자기 낙원의 외로움이 내게로 옮겨온다.

되돌아가서

낙원이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까닭 모를 슬픔이 인다.

 

낙원이

한참을 다시 따라오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생각 깊은 눈빛만 보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순간에 만난 아이인데도 며칠 동안 생각이 난다.

과자 하나 사주고 올 걸 하는 후회와 함께

그냥 스쳐 버린 우연한 만남인데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자

돌아온 대답

"자네가 요즘 참 외로운가 봐!"

골목의 주인(@흔희)

1992년, 일곱살이 되었던 해였다. 그 전에도 이사를 다녔다고 했지만 너무 어릴 때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첫 이사는 92년도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주거지라기에는 다소 산만한 시장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이사한 곳은 가게와 집이 붙어있는 구조였다. 가게 문을 열면 홀이 있었고 홀이 끝나는 자리에는 여닫이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2개의 방과 부엌이 있는 생활 공간이 나타났다. 이사하는 당일, 홀에는 커다란 사진기와 조명, 가판대, 소파 등이 들어왔다. 동네사람들은 나를 '사진관집 딸내미'로 불렀다.

  엄마한테 전해 듣기를, 갓 이사 온 나는 새로운 유치원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사 오기 전의 유치원은 숲에 위치해 있던 곳으로 사슴이나 여러 가지 동물들을 키우는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다. 자유롭게 숲에서 동물들과 함께 뛰어 놀던 7살짜리 아이는 모래밭에 철봉과 그네 몇 개가 전부인 초라한 유치원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엄마한테 전에 살던 곳으로 가자고 유치원 그네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엄마와 아버지는 요즘도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꼭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 때, 네가 어찌나 안됐던지…'

  직장에서 해직이 되었던 아버지는 94년도에 복직을 하였다. 그 전까지도 나는 누군가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엄마의 대답은 늘 선생님이었으니까. 선생님인 아버지가 다시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니 그저 좋은 일인가 보다 싶었다. 그 골목에서 살았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고 한참 뒤에 알았다. 아, 그 때 우리 집은 망해서(?) 반여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부산의 해운대구에 속해 있는 반여동은 1979년 부산의 서구, 중구, 동구 일대의 철거민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형성된 동네이다. 종합운동장과 수원지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으로 집터를 잃은 이재민들이 먼저 건너와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 정부의 고지대 주거지역 철거 정책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서부산 사람들이 동쪽으로 밀려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반여동이다. 집과 집 사이의 공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반여동의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옆집에서의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일곱 살부터 열세 살까지 살았다.

  엄마와 아버지에겐 그 시절의 생활이 힘에 부친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집이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고 컸다. 초등학교 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두다다 뛰어가면 엄마가 늘 계란물을 입히고 설탕을 발라준 식빵을 꺼내주곤 했었다. 간식을 든든하게 먹으면 동생과 함께 속옷 가게를 하고 있는 쌍방울집(당시의 유명한 속옷 브랜드 이름이 ‘쌍방울‘이었다.) 아들과 함께 온 동네를 쑤시고 다니며 동네 탐방을 하곤 했다. 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면 숙제를 하기 위해 책이 많았던 2층의 이웃집에 올라가서 위인전을 읽었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밑에서 큰 소리로 외치면 2층집 아줌마가 나를 배웅해 주었다.

  한 번은 동생의 반에서 머릿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우리집의 일과는 집 앞 골목에 앉아 동생의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어 내리는 작업으로 마무리 되었다. 엄마가 짧게 단발로 자른 동생의 머리를 빗으면 머릿니가 툭툭 떨어졌다. 그럼 나는 재빨리 손톱으로 머릿니를 눌렀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납작해지는 머릿니를 보며 나름의 희열감을 느꼈다. '이 잡이' 의식이 끝나면 엄마는 수박을 잘라 나왔다. 여름 저녁,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수박을 물고 골목길 위를 바라봤다. '이 잡이' 의식은 우리집만의 풍경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골목에 우리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집이 몇몇 더 있었다. 같은 학교였고 같이 어울려 놀았던 아이들이었다. 골목으로 연결된 이웃들과 함께 삶을 두렁치게 엮어가던 시절이었다.

  나에게 골목은 유년시절의 상징이자 삶의 공간이다. 골목을 통해 집과 집은 이어져 있고 이웃들은 골목을 공유하며 저마다의 서사를 일구어 살아간다. 올해 가을, 동생과 경주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본 후 황리단길에서 밥을 먹고 맥주를 간단히 마시기로 했다. 황리단길은 오래된 건물의 외부는 최대한 유지한 채, 내부만 현대적으로 수리하여 주택을 재단장한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소품을 파는 가게부터 카페, 음식점이 있고 거리에는 인생 사진을 남기고자 핸드폰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젊은 사람들로 붐빈다. 누군가의 삶의 현장이자 생활 공간이었던 골목은 잠깐 머물다 스쳐가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깔끔하게 정비되어 쾌적하지만 눈에 담아갈만한 곳은 없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삶이 진득하게 자리잡기 보다는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다. 과거 주택가였던 구시가지에 상권이 형성되면서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곳은 황리단길뿐만이 아니다. ‘O리단길’이라는 명칭이 유행하면서 부산에도 구 해운대 역 뒤편의 ‘해리단길’, 망미동의 ‘망리단길’이 유명하다. 비슷한 분위기로 영도의 흰여울마을이 있으며 감천의 감천문화마을이 있다. 

  과거 집터를 잃고 반여동에 떠밀려 왔던 서부산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들 명소에도 원래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원주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높아진 임대료나 관광객들의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골목을 떠나고 있다. 실제로 흰여울마을이나 감천문화마을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관광객들에게 주민들을 배려하여 소음을 삼가해달라는 경고성 팻말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스펙터클 사회’라는 말이있다. 스펙터클(spectacle)의 사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생성된 모습이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장면이나 이벤트가 되는 것‘이다. 단어의 뜻만 조합해 놓고 보면 ‘스펙터클 사회’는 이벤트 사회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기 드보르가 현대인들의 소비문화를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이다. 물신주의가 만연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무언가(이미지)는 복수에서 단수가 된다. 하나의 이미지를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린다. 사회는 이러한 기조를 반영하여 소비하기에 더 편리한 구조로, 하나의 이미지를 보다 안락하게 가질 수 있는 구조로 움직인다. 삶의 현장은 사라지고 명소로만 존재하는 골목처럼. 명소로서의 골목은 다분히 이벤트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상품 가치가 삶을 점령한 사회는 외양은 화려해지지만 그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은 은폐된다. 관광객들의 돈을 착취하기에 안락한 구조인 ’황리단길‘의 화려한 외양 속에서 쫓겨가고 있는 원주민들의 존재는 외면 받는다. 생활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골목을 청결하게 정비하고 퇴색되어가는 구시가지에 활기를 불어 넣는 도시재생사업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그 목표와 방향성에 대한 재질문이 필요하다. 단일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며 달려가는 사회에서는 그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의 유무에 따라 우와 열이 갈린다. 도시화라는 광풍에 매몰되어 골목에게 ’열‘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길 바란다. 정비된 길도, 정비되지 않은 길도 같이 있기에 장면은 풍부해지는 것이다. 골목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 스쳐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골목이 아니라 생활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골목이길 바란다. 소비를 위한 골목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골목으로 ‘재생’ 되기를 바란다.
골목(@아난)

좁디좁은 집에 살짝 열어둔 철문 사이로 쨍하게 들어오는 빛이 유일하다. 수오는 내리쬐는 빛에 기대어 연필을 잡고 공부를 한다. 기필코 이 골목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과 함께.
 
수오가 사는 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위로 더 위로 내몰려 공동묘지에 터를 잡았다. 수오 집의 벽이 옆집의 벽이기도 할 만큼 다닥다닥 모여 있는 가운데, 조금만 걷다보면 묘지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어지러운 동네였다.
 
문 하나로 집 밖과 안이 구분되는 단출하기 그지없는 수오의 집문 밖으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문으로 가까이 가자 엉망진창 머리에 길고양이 같은 여자아이가 어제 제사가 끝나고 집 앞에 내어둔 밥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길년이었다.
 
동네에서 길년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갓난 아기였을 때부터 길년의 엄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지하철역에 길년을 눕혀두고 구걸했다. 취객과 노숙자들의 꼬릿한 냄새가 가득한 지하철 계단에서 천진난만하게 꼬물거리는 길년이를 보면 사람들의 지갑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길년의 엄마는 길년이에게 젖이라도 물리기 위해 길 한복판에서 비닐봉지를 펼쳤다. 남들이 먹다 버린 음식이 뒤엉켜 엉망인 비닐봉지를 속이 훤히 보이게 열어두고 길에서 먹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볼 때면 보지 못한 척 외면하거나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아이의 나이도 이름도 알지 못해 ‘길년이’로 어른들은 불렀다. 동네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차며 길년의 엄마를 욕했다. 모든 손가락질과 욕은 본 적 없는 길년의 아빠보다 눈 앞에 있는 길년 엄마의 몫이었다.
 
갓난 아기였던 길년이가 자라 골목을 걷게 될 때쯤 길년이네는 허름한 폐가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으며 살았다. 길년이는 귀신과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낮에 텅 빈 동네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나 객귀밥(대문 밖에 차려둔 제사 음식)을 찾아 헤맸다.
 
길년이 허겁지겁 객귀밥을 먹다 고개를 드니 하얀 빛 속에서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철문 뒤 어두운 방에서 한 줄기 빛을 받는 수오는 신성해보이기까지 했다. 길년이는 기침을 연거푸하며 먹은 것을 사방에 토했다. 아직도 아기와 다름없어 보이는 길년이를 보자 수오는 ‘안쓰럽다는 게 이런 거구나.’는 마음의 목소리가 절로 울려 퍼졌다. 들어와도 된다며 손짓하여 길년이를 집으로 불러 물을 먹여주었다.
 
다음 날부터 수오는 자신이 먹으려던 것들을 반씩 나눠 집 앞에 두기 시작했다. 우유 반 컵, 빵 반 덩어리 같은 것들이 집 앞에 놓이면 길년이는 숨어있다 나타나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오는 문 밖을 나섰다. 길년이의 손에 먹을 것을 쥐어주고 같이 골목 이 곳 저 곳을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갯가 아이들이 조개를 세고, 산세 아이들이 벌레를 잡으며 놀듯, 이 골목의 아이들은 무덤을 놀이터 삼아 넘어 다녔다. 걷다보면 묘비 하나 없는 무덤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둘은 토끼를 닮은 무덤을 토끼 무덤이라 정하며 누구의 무덤도 아니던 것에 이름을 붙이며 놀았다.
 
오늘은 길년이가 다부진 눈으로 수오를 이끌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며 모두에게 열린 절로 향했다. ‘밥을 이렇게 공짜로 주다니!’ 비빔밥을 먹고 절 구석구석을 둘은 탐험했다. 보살님 한 분이 길년이를 말끔히 씻겨주고 옷 한 벌을 주었다. 씻고 보니 길년이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맑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아이였다.
 
새롭게 태어난 듯 깨끗이 씻은 길년이를 보고 감탄하며 이름을 부르려는데 수오의 마음속에서 미안함이 올라왔다. ‘길년이’라는 이름이 수오에겐 늘 불만이었다. 길에서 태어나 ‘길년이’인건지 ‘길년이’라 길에서 사는 건지.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든 문제가 꼭 저 이름 탓 같았다. 길년이를 길년이라 부를수록 자신이 마치 길년이를 이 골목에 살게 하는 것 같아 수오의 마음이 불편했다.
 
“너는 앞으로 ‘송이’야. 눈송이를 닮았어.”
“왜? 눈이 뭐야?”
“엄청 추우면 깨끗하고 맑은 하얀 얼음 조각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되게 예쁘대. 그게 눈이야. 앞으로 나는 너를 ’송이‘라고 부를 거야.”
 
이후로도 길년이 아니 송이와 수오는 무덤 탐험을 다녔다. 그러다 부활절에는 성당에서,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에서, 기념일마다 종교를 바꿔가며 특별한 그 날만큼은 눈처럼 깨끗하게 씻고 배불리 먹으며 행복하게 보냈다. 
 
계절이 바뀌고 골목 이웃들이 떠나가도 둘은 온종일 함께 붙어다녔다. 수오는 송이와 바깥에서 놀다가 동네 골목으로 돌아오면 암울해졌다. 이 골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길년이는 반대였다. 처음 생긴 자신의 집. 나갔다가 이 골목에 들어오기만 해도 눈에 익은 이 느낌. 집에 왔다는 느낌이 좋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수오는 송이가 걱정됐다. 새벽녘 들어오던 송이의 엄마가 집에 오는 날도 점점 줄었다. 수오는 아침마다 송이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챙겼다.
 
악은 비겁하게 약자가 가장 어려울 때 비수를 꽂는다. 무덤가에 자리 잡은 이 마을에도 촘촘한 서열로 지역이 나뉘었다. 길년이가 살던 골목은 역시나 가장 높은 험지. 수오가 갈 때마다 집이 망가져있었다. 섬뜩한 철거 경고장, 새빨간 페인트로 할퀴듯 ‘철거’가 쓰여 있었다. 어느 날에는 쇠망치로 벽이 무너져 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길년이 스스로도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엄마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기에 수오는 어찌 도와야할지 몰랐다. 그저 매일 아침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없기를 빌며 송이의 집으로 뛰어갔다.
 
역대급 추위라며 온 뉴스가 난리였던 날이다. 야밤에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다. 수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고 갑자기 박차고 나가 송이의 집으로 뛰어갔다. 골목이 좁아 소방차는 고사하고 키 큰 성인 남성도 장비를 들고 올라가기 힘든 골목이었다.
 
수오는 울면서 '제발!' 하는 마음으로 소방관들을 제치고 오르막길을 쉼 없이 뛰어갔다. 새빨간 철거 글자와 허물어진 벽과는 비교되지 않을 무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송이의 집이 커다란 불에 활활 삼켜졌다. 들어가려는 수오와 수오를 막으려는 어른들과 불을 끄려 애쓰는 소방관들, 혀를 끌끌 차며 지켜보는 사람들이 뒤엉켰다.
 
송이의 모습은 텁텁하게 쌓인 연탄재 같이 변해있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송이가 불을 켰고 따뜻함에 잠이 스르륵 들면서 불이 모든 걸 삼켜버린 것이었다.
 
송이의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수오는 송이가 좋아하던 유리 주스 병에 송이의 재를 모아 넣었다. 송이의 집 앞 골목에 작은 무덤을 만들고 그녀를 묻었다.
 
시간이 흘러 수오가 송이 엄마쯤의 나이가 되었다. 수오는 이를 악물고 마을을 탈출했다. 어른이 되면 기필코 송이의 무덤을 양지 바른 곳에 옮기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면 항상 마을을 찾아왔다. 집과 묘지가 여전히 뒤엉켜있는 이 골목으로 와 송이의 무덤 앞에 꽃을 둔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든 수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 때문에 올해도 옮기지 못했다. 올 때 마다 수오는 “너만 여기 두고 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고 하얀 입김과 눈물을 쏟아낸다.
 
수오는 속으로 송이에게 말을 건넨다. 부산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서 어찌 보면 다행이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마음이 아려 살아내기 힘들었을 거라고. 매일 눈이 팅팅 부어 못생겼을 거라며 웃기지 않은 농담을 송이에게 전하고 돌아선다.
 
골목길 속 누가 봐도 작은 무덤. 길년 아니 송이의 무덤이 집 앞에 버려진 연탄재와 수오의 꽃송이와 나뒹굴고 있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7. 화양연화)
BONG님 : 가만히 눈을 감고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었어요.
요즘처럼 스마트폰 속 짧고 강렬한 문구만 읽게 되는 세상에 사람 냄새와 온기가 공존하는 땡비의 글을 오롯이 읽어내려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도 다시 제 생각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어요.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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