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서 지금은 갈 수 없는 어느 공간에 대하여
2024.2.3. 열두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입니다.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다시 가고 싶은 장소가 있나요? 추억 속에서 빛나고 있는 장소들을 꺼내어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았습니다. 오늘 땡비와 함께 여러분에게 그리운 장소가 어딘지, 어떤 의미인지 편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걸어둔 빗장을 열어본다면(@흔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위치한 와우산 중턱에는 ‘달맞이길’이 있다. 중동과 송정동 사이를 잇는 고갯길인데 길을 따라서 벚꽃나무가 터널을 만들어 봄이 되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유명하다. 달맞이길 언덕의 중턱에는 원래 해운대 AID 주공아파트가 있었다. 십 층 정도 높이의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건물이 나이가 든 만큼 아파트 단지 내의 나무들도 함께 나이가 들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낡음으로 드러내는 건물과는 달리 나무들은 울창함으로 그 흔적을 여유 있게 드러내곤 했다. 특히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하여 아파트 주변에는 분홍빛 비가 내렸고, 동네 주민들은 외지인들로 북적거리는 달맞이길의 명소를 피해 주공아파트에서 벚꽃의 낭만을 즐기곤 했다. 2012년, 45동 2천 60가구가 모여 살았던 주공아파트가 완전히 철거되었고 그 터는 고가의 아파트가 다시 자리를 메웠다. 아파트와 함께 나무들도 잘려나갔다. 동네 주민들에게 개방되었던 장소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자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고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 되었다.


비슷한 일이 작년 여름에도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대대적으로 시작된 공사가 문제였다.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고 지하주차장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출입문이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통로 쪽의 모든 문을 자동화하여 걸어 잠갔다. 입주민들은 핸드폰에 연동 어플을 설치하거나 카드키로 자신이 문 안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했다. 다른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같이 놀 수가 없다고 투덜대는 아이의 모습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였다. 그중에서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동노아’가 없어져서 편하다는 의견이었다. 한 번에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던 나는 그에게  ‘동노아’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는 ‘동네에서 남아 노는 아이’라고 답을 주었다.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지금과 나의 유년시절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길’이 가지는 의미였다. 마주 보고 서 있는 주택들 사이에 나 있던 길은 나에게 마당이자 운동장이었다. 길 위에서 나는 친구들과 잡기놀이를 했고 전봇대에 고무줄을 묶고 고무줄 뛰기를 했다. 길을 따라 친구들과 다른 동네까지 넘어가서 놀다 오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3명에서 시작된 놀이는 어느덧 6~7명으로 몸짓을 불리기도 했다. 또 우리 집 앞에는 다른 집 차의 주차를 막기 위해 세워둔 직육면체 모양의 입간판이 있었다. 여름밤이 되면 엄마는 수박을 잘라 입간판에 놓아두었고 동생과 나는 그 위에 앉아 수박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엄마는 이웃들이 지나가면 수박을 권하기도 했고 길을 가던 옆집 아줌마는 걸음을 멈추고 수박 먹는 것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요즘의 길은 그때와 다르다. 서로 다른 아파트 사이에 길은 있지만 그 길에서 삶이 겹쳐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담장을 세우고 출입문을 걸어 잠그며 칸을 지른다. 토끼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크는 아이의 세계는 좁다. 아파트 내의 놀이터에서도, 상가 안의 피아노 학원에서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낸다. 아파트 사이로 난 길에는 차가 다닐 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행인1, 행인2로서 스쳐 지나간다. 어린 시절 나는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던 초등학교 등굣길을 혼자 걸어 다녔다.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길 주변의 상점 주인이나 길가를 지나가는 어른들이 대개 이웃이었기에 그들이 어린이들의 안전지대가 되어주었다. 요즘 나는 아이에게 혹시 길을 가다가 당황스러운 상황이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라고 일러둔다. 동네에, 길가에 믿을만한 아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가 지어지고 닫힌 공간에서 사람들의 세계는 단절되고 있다. 점점 이웃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간다. 내리는 벚꽃을 눈에 담다가 마주친 시선에 이웃과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던 곳이 사라졌다. 집 앞의 마당이자 운동장으로 용도가 다양했던 어린 시절의 길은 없어지고 길 위에서 마주치던 어른들도, 아이들도 이제는 그저 행인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자신과 남을 구별 짓는 데 익숙해져 간다. 남들에게 경계를 세우는 만큼 세상은 칸막이로 분절되고 좁아진다. 경계를 세우는 기준은 비단 아파트 이름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기준은 이념이 될 수도 있고 성별일 수도 있으며 취향이나 나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수한 빗장을 삶에서 걸어 잠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삶의 가짓수는 많지 않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 하나의 개인은 각자의 삶이라는 서사를 지니고 있으며 타인의 서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때문에 사람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열린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누군가와의 접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삶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세상을 넓혀간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아직 남은 날들이 많고 우리는 보고 겪어야 할 것들이 많다. 나도 모르게 걸어둔 어떤 곳의 빗장을 이제는 한 번 열어보는 게 어떨까? 그 빗장이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래서 열기 쉽진 않겠지만. 일단은 열어보려는 시도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진 않길 바란다. 당신도. 나도.

자기만의 공간(@아난)

내 사주에는 늘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역마살’이 등장한다. 과거에 역마살(驛馬煞)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객사하는 나쁜 기운으로 해석되었다. 역마는 조선시대에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각 지역의 역에 준비해 둔 말을 의미한다.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해야 하여 이 역, 저 역을 분주하게 돌아다닌 말이라는 의미의 ‘역마’와 사람을 해치는 독한 기운의 '살'이 더해진 말이다.


타고난 기운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 서울, 독일 등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20대 때 5개의 집을 거쳤다. 하루하루 바삐 살다가 집을 옮길 때가 되면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했다. 집이라 부르기에 애매한 하숙방부터 시작하여 옮길 때마다 조금씩 집의 형태를 갖추어 나아갔다.

 

낯선 서울에 처음 와서는 친구와 둘이 쓰는 하숙방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러다 혼자 쓰는 하숙방으로 공간이 진화했다. 독일로 훌쩍 떠나 들어간 교환학생 기숙사에서는 공동으로 쓰는 주방과 욕실이라 온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과 면을 텄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누군가의 집이 아닌 처음으로 주인이 ‘나’인 제대로 독립된 자취집에 정착했다. 가장 오래 지냈던 이 집에서 나는 2번의 인턴과 3 곳의 직장을 거치며 정신없이 살았다. 아쉽게도 집의 계약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집주인이 바뀌어 어쩔 수 없이 유목민이 되어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

 

지하철 2호선, 6호선, 9호선까지 온갖 동네를 다 돌아다니며 찾은 다음 집은 드디어 온전한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내가 처음으로 입주한 집이라 모든 것이 깨끗했다. 새하얀 가구들로 채워진 나만의 주방, 화장실도 모두 들어와 있어 좁지만 아늑했다. 그러나 집 이사 때문에 연차를 처음으로 쓰고 돌아간 날 스타트업에서 해고되면서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 때마침 지원해 두었던 부산의 한 회사에 취직이 되어 급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여러 집을 거치면서 나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경계를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 사이를 매일 오갔다. 혼자 있기 외로워서 잠자는 시간 빼고는 친구들과 보내고, 잠자는 시간까지도 같이 보낼 때가 있었다. 건너편 친구집에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자취방에 잠자러 돌아갈 때면 머리 위로 큰 지붕을 상상했다. '지금 걷는 이 횡단보도를 가로지를 만큼 큰 지붕 아래 이어진 집에서 우리는 그냥 같이 사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친구들과 붙어 지냈다.

 

나의 20대가 묻혀있는 여러 집들은 이제 사라졌지만 가끔씩 머리에서 그 공간들이 탁하고 떠오른다. 역마살 많은 친구들 사이에 껴있어서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 독립된 공간에서 살아나가는 경험이 흔치 않음을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과 살다가 결혼 등 자신이 선택한 가족과의 또 다른 동거로 이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자기 공간’이 사람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나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는 순간을 일생에 한 번은 경험해 보아야 한다. 좁아터진 방일지언정 적막감이 맴도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유로워졌다. 온전히 내 의지대로 있을 수 있고 누구의 말에도 휩쓸리지 않을 때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뒤엉켜있는 여러 감정들을 참지 않고 모두 토해냈고 누구의 무엇도 아닌 아무 역할 없이 그냥 나로서 존재했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가족이든 누구든 의식할 수밖에 없구나’를 완전한 혼자일 때 깨달았다. 밖에서 정신없이 사람들과 에너지를 주고받다가 집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와 집이다!’하는 그 안도감이 참 좋았다. 혼자 사는 집의 고요함이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진공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고요함이 왁자지껄한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되기도 했다. 기대나 역할이 없는 방에서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사람의 품을 그리워했다. 하루종일 혼자 있다 보면 더디게 가는 나만의 시간대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며 빠르게 가는 그 시간대로 넘어가려고 늘 약속을 잡아두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달래다가, 집에 왔을 때 있고 싶은 대로 있을 수 있는 자유 사이에서 시소를 타며 살아갔다.

 

나는 역마살 덕에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믿기때문에 내게는 좋고 반가운 기운이다. 경주마처럼 바삐 살던 시절의 여러 동네들을 가도 그 집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 다른 누군가의 공간이 되었기에 이제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가끔씩 삶이 버겁고 너무 애쓴다는 느낌이 들 때면 실제로 가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그때 그 집들로 돌아가본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사람들의 품과 나만의 공간 사이에서 어디쯤에 내가 있어야 할까를 지금도 고민한다. 사람 사이에 있으면서도, 혼자 있고 싶기도 한 이 여전한 변덕스러움을 어찌할까 하며.

망가져 사라지는 금강식물원(@못골)


젊은 날 늘 어울려 지내던 친구 셋이 있었다. 김재익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주변에 여자들과 잘 사귀어 우리들에게 자랑을 했다. 그의 옆에는 늘 여성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남자를 보아도 시각은 서로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반면에 경태는 일만 죽자고 할 뿐 여성은 사귀어 본 적 조차 없는 숙맥이었다. 그 둘과 나 그리고 경태집에 세 들어 자취하는 영순이 이렇게 비슷한 20대 중반 연령대의 4명이 자주 어울렸다. 경태는 건축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재익이는 덤퍼 트럭 운전을 했다. 대개 만나는 횟수가 경태, 영순이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어울리고 경태집 근처에 사는 재익이는 가끔 자리를 함께 했다. 통금에 걸리면 경태 방에서 함께 자고 새벽 일찍 수정동 집으로 왔다. 


이성과 교제해 본 적 없이 늘 혼자서 일에만 빠져 있는 친구 경태가 안쓰러웠다. 영순에게 좋은 아가씨가 있으면 경태에게 소개하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갔다.      

부곡동에 갔더니 영순이 예쁜 후배가 있어 소개를 하겠다고 한다. 그 말에 경태도 나도 들떴다. 소개팅을 하는 날이 다가오자 경태가 묻는다. “야! 옷은 어떤 것을 입고 갈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되노?”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형에게 빌려서라도 양복 입고 가라!”라고 하니 경태는 쑥스러워하며 “머!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그냥 입던 점퍼 입고 갈끼다.” 라는 말에 그의 겸연쩍고 수줍어하는 성격이 느껴진다. "깨끗한 옷을 멋있게 입고 가자"라고 했다.


 소개팅 날이 되어서 영순이, 나, 경태 그리고 상대 아가씨 이렇게 4명이 다방에서 만났다. 머리 장식에 살짝 망사를 늘어뜨리고 소매에도 망사가 있는, 한눈에 봐도 온 성의를 다해 외모를 가꾼 단정한 느낌을 받았다. 여성은 큰 키는 아니지만 이쁜 외모였다. 좋은 사람을 소개해준 영순이의 성의가 고마웠다. 영순이와 나는 잠시 분위기만 잡다가 둘을 남겨두고 나왔다. 

며칠 뒤에 만나 싱글벙글하는 경태에게 진정으로 두 사람의 사귐을 축하해 주었다. 영순이에게도 고맙다며 크게 인사를 했다. 이후로 서로 바쁜 사회생활 속에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경태는 처음 이성을 사귀니 얼마나 좋을까? 그의 표정에서 그런 기쁨이 뿜어 나왔다. 사랑하면 만나고 베풀고 싶어 진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다며 좋아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처음 만나 서로 미친 듯 좋아하니 우리도 보기가 좋았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재익, 경태, 나 그리고 영순이와 정옥이 5명이 온천장 금강식물원으로 놀러 갔다. 그때 식물원은 관리를 아주 잘하여 겨울에 유별스레 더 추운 날에 구경을 가면 완전 별천지이다. 따뜻한 온실에서 시간적 여유를 가지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우리 일행은 함께 촬영을 하고 경태의 커플 촬영도 해주었다. 자랑하듯 자신이 사귀는 여성을 위하는 경태를 보며 우리들은 즐거웠다.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여 나누어 주었다.

지극 정성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경태의 마음에 그녀인들 그냥 지나고 싶었을까? 무엇이든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베풀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 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은 옷을 볼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8개월 정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경태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인근에 그녀는 오빠와 둘이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큰방 옆방인 작은 방은 경태방이고 그 옆에 영순의 방이 있었다. 어느 날 경태 집에 놀려 와서 밤이 한참 되었는데도 정옥이 가지 않았다. 얼마나 긴장했을까? 친구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정옥이 이게 무슨 소리냐며 웃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정옥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경태보다 4살 정도 나이 많은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정옥이 오빠라고 했다. “이야기 좀 하자!”며 가까운 다방으로 가서 친구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객지에 와서 고생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고서 여동생을 보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처녀, 총각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경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안 보면 못 견딜 정도로 좋아하니 그냥 내가 책임지겠다고, 함께 살겠다고 대답하면 간단하게 끝날 순간을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숙맥인 친구를 보고 정옥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로 정옥을 볼 수가 없었다. 

정옥을 자신의 분신처럼 좋아했던 친구는 사랑했던 만큼 크게 충격을 받았다. 상심하여 2달을 폐인처럼 누워있었다. “헤어지고 나서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회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며 슬프게 물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스쳐가는 홍역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아픔 그런 고통을 모두 겪으며 우리는 늙어 가는 것이 아닐까?

지내 놓고 보면 고통도 환희도 모두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귀한 역사이다. 


금강식물원은 부산 mbc 촬영대회가 1970년대 처음 개최된 장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1979년 나도 처음 사귀었던 아가씨와 식물원에 갔다. 조영남의 제비 노래를 부르며 어린이처럼 율동하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그녀와 헤어진 뒤로 제비 노래가 들리면 아련한 그 옛날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본다. 

우리들의 젊은 날 사랑은 속절없이 떨어져 사라지는 눈꽃처럼, 어질한 봄 아지랑이 속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스쳐 지나가 버렸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것은 없나 보다! 잘 가꾼 많은 화초와 나무로 싱싱함을 보여주던 식물원도 이제는 쇠락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다. 방문객이 없으니 그냥 망가져 가고 있다.


사랑하던 아가씨를 보내고 그렇게 아파하던 경태도 영천처녀와 선을 보더니 1달 만에 결혼을 했다. 그는 1990년 중동 리비아 수로 건설공사(1984~1995)를 다녀온 이후 어느 날 군대 복무 중인 아들에게 엄마와 이혼했다는 소식을 편지로 보냈다.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그 친구에게 때때로 가서 편하게 한 잔 하고, 서로 안부를 확인하며 옛날이야기를 한다. 간혹 “야! 정옥이 어떻게 살까?”하고 물어보면 경태는 말없이 그냥 싱긋이 웃는다. 얼마나 아련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못 이룬 사랑이 오히려 더 애틋한 추억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1월, 신호등 앞에 서면 살을 에이는 듯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불고 있지만 이런 추위도 곧 사그라들 것이다. 날씨가 조금 포근해지면 황폐해진 식물원에 한번 가 보고 싶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11. 부산에서 기억하고 싶은 장소)
쇼잉님 : 이번 주제의 글들은 특히 마음에 울림이 남는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들쳐보지 않던, 마음 속에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저도 헤매보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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