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쉰다섯 번째 흄세레터

출근길에 손에 쥔 아이스커피가 너무 차갑게 느껴져서 조금 놀랐어요. 역대급이었다는 여름 더위가 이제 막 지나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느껴지는 이 아쉬움은 뭘까요…….

《4월의 유혹》의 주인공인 ‘로티’는 이탈리아의 중세식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기회를 준다는 신문광고에 이끌려 이탈리아로 휴가를 떠나고, 거기서 천국(?)을 경험해요. “여기 앉아서 얼마나 멋질까 상상만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속전속결로 일을 추진한 덕분이에요. 가끔은 회사나 학교, 가정, 남편, 가족, 친구 들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얼마 남지 않은 여름,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최선의 일들을 해나가시길 바랄게요🙏

9월의 첫 레터에서는 호원숙 작가의 《4월의 유혹》 리뷰 전문을 보내드려요(중간의 사진은 이 소설에 등장하면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이탈리아의 포르토피노예요).

4월과 아름다운 장소가 주는 마법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이라는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4월의 유혹》을 읽게 되었다. 청탁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지만 두 번 이상 읽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4월의 꽃들이 화려하고 찬란하게 만발한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 산 살바토레의 풍광은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은근히 나를 끌어당겨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 나는 책을 빨리 읽어내는 사람도 못 되고, 자꾸만 ‘100년 전의 우리 여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몰입을 방해하고 있었는데도.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붙은 이름, 그리고 영국 여성 작가의 1922년 소설. 이것은 당시 영국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세상 속에서 귀족이고, 남편 곁에서 자유가 없다고 하지만 가정에서는 얼마든지 하인을 부리고 호강을 누릴 수 있는 위치임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20세기 초반 어떻게 런던에서 이탈리아 북서부 바닷가에 있는 성까지 갔는지가 궁금했는데, 배와 기차, 특히 마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길의 묘사가 호기심을 충족할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처음 이 여정을 계획한 ‘로티’는 소설을 끌고 가는 인물이다. 따분한 변호사 남편을 둔 지루하고 자유롭지 못한 여자. 로티는 옷값을 아껴 모은 비상금을 털어 4월에 이탈리아의 중세식 성으로 떠나는 것을 꿈꾸게 되고, 그 꿈이 이루어진다.

 

같이 동행하게 된 ‘로즈’는 스무 살에 결혼해 서른세 살이 됐다. 그 남편 프레더릭은 왕의 정부(情婦)에 대한 회고록을 쓰는 것이 직업이다. 로즈는 “간음을 생활의 방편으로” 사는 남편의 일을 죄악시하고 자신은 종교와 자선 봉사 생활에 빠져 신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로즈는 장엄하고 화려한 자연의 장관 속에서 마음속 공허함에 압도되어 전보다 더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로즈는 로티를 관찰하며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 “이탈리아로 온 순간부터 로티는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확실히 아주 행복해 보였고, 더할 나위 없이 기뻐 보였다. 행복이 저 정도로 완벽하게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니! 저토록 독보적이고 현명하게 만들 수 있다니!”

 

재색을 겸비한 상류사회의 젊은 여성 ‘캐럴라인’은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다. 남자들의 구애와 아름답다는 찬사에 질려버린 캐럴라인의 내면은 활기를 잃어 매력이 없어 보인다. 줄곧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아니라면 그녀의 생은 더 지루했을 것이다. “캐럴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흥미가 생겨서 로티를 지켜봤다. 너무나 하찮은 일에 그처럼 행복해한다는 게 몹시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캐럴라인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보다 우위에 있는 ‘피셔 부인’은 부유한 동네에 있는 집과 롤스로이스가 주는 안락함보다는 활력이 필요한 인물이다. 나이에 걸맞은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비용이 나가는 것은 싫어하는 여자, 자신이 교류했던 유명인의 이름을 들먹이기를 좋아하는 여자. 소설에는 피셔 부인이 11년 전에 죽은 남편을 미끈거리는 마카로니에 비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런 장면에서 특히 웃음이 나온다. 영국식 유머인가?

 

이렇듯 《4월의 유혹》은 네 명의 여자가 아름다운 풍광과 향기 속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가는 소설이라고 할까.

자연, 특히 4월에 피어오르는 갖가지 꽃에 대한 묘사만 보아도 좋다. 그걸 그냥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하는 듯한, 그 성의 정원 사이를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탈리아 성의 풍경 속에 있는 네 사람 사이의 갈등,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자리다툼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인의 품격을 잃지 않는 선에서 이어진다. 음식을 준비하는 코스탄차나 정원사 도메니코의 시선도 신선하고 활기 있다. 영화 속에서도 조연이 더 빛날 때가 있지 않은가.

 

가장 웃기는 장면은 난로가 켜져 있는 동안은 절대로 욕실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로티의 남편 윌키스가 난로를 폭발시키고 벌거벗은 채로 욕조에서 뛰어나오는 대목이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상류사회의 인맥을 가까이하기 위해, 말하자면 변호사로서의 영업을 위해 온 윌킨스의 소동이 우습기도 하고 그걸 봉합해가는 과정도 지극히 영국적이다. 얄미울 정도로.

 

어쨌든 파국으로는 가지 않는 해피 엔딩이다. 설정과 표현의 깊이가 우아함과 품격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절도 있게 이끌어간다.

 

이 소설은 다 보고 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을 필요가 있다. “그 일은 2월 어느 오후 런던의 한 여성 클럽에서 시작됐다. 불편한 모임이었고 끔찍한 오후였다. 윌킨스 부인은 햄프스테드에서 쇼핑하러 왔다가 클럽에서 점심을 먹은 뒤 우연히 흡연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타임스》를 보았고, 아무 생각 없이 ‘고민 상담 코너’를 훑어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윌킨스 부인(로티)의 눈에 띈, 이탈리아의 작은 성으로 초대하는 《타임스》의 광고에서 시작하는 소설의 첫 페이지로.

 

100년 전 우리나라 여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굳이 당시의 영국 상류층 여자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여자들은 모두 이미 과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호원숙 | 작가. 펴낸 책으로는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운 곳이 생겼다》, 《나는 튤립이에요》, 《엄마 박완서의 부엌—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아치울의 리듬》 등이 있다.
4월의 유혹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 | 이리나 옮김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가 극찬했던 소설가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대표작. 이탈리아의 작은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기회를 준다는 광고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린, 그러니까 가정, 남편, 지나친 관심, 늙음이란 질척대는 현실을 떠나 천국에 당도해버린 네 여자의 마법 같은 이야기. 어른도 노인도 마음의 문을 열면 얼마든지 더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자명하지만 소중한 삶의 긍정성을 일깨운다. 마이크 뉴얼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했으며, 브로드웨이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극화되는 살아 있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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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자는 다음 호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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