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예순한 번째 흄세레터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흄세 시즌 6의 출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랑'입니다. 저는 요즘 독자분들의 따뜻한 리뷰를 읽으며 겨울의 복판을 보내고 있어요. 한 해 계획은 세우셨나요? 저는 오직 1월에만 작년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분주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회사 워크숍이 있어 흄세 2024년 출간 계획표를 점검하는 중인데요. 올해 출간할 목록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2024년을 미리 살아버린 것 같더라고요. 회사에서는 10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을 편집하고, 진행 중인 기획들은 2025년 여름 이후와 2026년은 되어야 책이 되니 시간이 너무 들쑥날쑥한 건 아닐까 하는 혼란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요. 독자분들의 시즌 6 리뷰와 당장 앞에 있는 시즌 7 원고를 보며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해요🙂


지난 레터들에서 종종 "다그치지 않는" 계절을 보내시길 바란다고 썼는데요. 올해도 같은 인사로 새해를 시작해보려고 해요. 어떤 계획을 세우셨든 너무 다그치지 않는 2024년을 보내시기를 바라면서, 흄세레터는 한은형, 정찬, 박생강, 김청귤, 황모과 소설가가 쓴 리뷰 및 짧은 소설을 매주 금요일에 총 5회에 걸쳐 발송합니다. 오늘은 한은형 소설가가 《크리스마스 잉어》를 읽고 쓴 리뷰를 보내드릴게요.

수천 개의 밀랍 초가 피워내는 크리스마스의 달콤함


크리스마스 잉어가 뭘까? 크리스마스 특선 요리일까 아니면 크리스마스트리에 다는 은빛 비늘이 달린 장식품일까. 《크리스마스 잉어》를 쓴 작가 비키 바움이 오스트리아 태생에 베를린에서 살았으니 요리일지도 모르겠다고, 그 부근에서 먹었던 민물 생선 요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한국과 달리 민물 생선을 고급 요리로 취급하는 게 그쪽 문화권의 정서인지라 나는 독일에 석 달 머무르는 동안 찬더니 강꼬치고기니 하는, 책에서나 보던 생소한 민물 생선을 꽤나 먹었다.


크리스마스 잉어가 뭘까?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듯이 나는 ‘크리스마스 잉어’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책을 넘기면 단박에 알게 될 것이지만 난 그런건 싫다. 이렇게 뜸 들이는 시간이 좋다. 뜸을 잘 들여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이든 아귀 수육이든 먹을 수 있다. 요리하고 나서 뜸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나는 라면도 살짝 뜸을 들인다!), 요리하기 전에도 뜸 들일 때가 있다. 갈망을 ‘들인’다고 해야 할까. 요리와 나 사이에 차오른 갈망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요리를 한다. 그러면 맛은 뭐…….


갈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책을 펼치자 말리 고모가 로켓을 타고 뛰쳐나왔다.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 “기차가 아니라 로켓을 타고 온 것” 같다는 말리 고모가 와야 비로소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는 말에 뭔가가 제대로 시작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내게도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다. 세상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될 때 말리 고모가 오는 것이지만 소설에서는 말리 고모가 와야 비로소 빈의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고 적는다. 그렇지. 이런 게 소설이지. 세상의 질서를 마음의 논리가 육박하고 압박해 뒤틀거나 뒤엎기도 하는 게 소설이지.


말리 고모는 누구인가. 마술사다. “검은색 마술 보따리를 풀어 엄청난 양의 향료와 양념”을 꺼내 주방과 집을 “번쩍이고 덜거덕거리며 냄새를” 풍기게 하는 마술사. 가족들이 나이를 먹는 동안 고모는 “단 하루도 더늙지 않고 그대로”다. 그리고 독재자다. “태풍 같은 엄청난 에너지”로 주방을 휘감아 원래 주방의 주인과 하녀는 맥을 못 추거나 마음이 상해 울게 만드는 독재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말리 고모의 독재는 장장 십팔 일간 지속된다. 오스트리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6일에 시작되어 24일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12월 6일은 니콜라우스 축일로, 우리가 아는 산타클로스의 복장과 달리 주교의 의상을 입은 니콜라우스가 오는 날이다.


내내 말리 고모는 “구름 같은 밀가루 속에서” 일한다. 거의 계란과 버터 범벅이라고 할 수 있는 구겔후프를 굽고, 크리스마스 쿠키를 굽고, 후자렌도넛을 굽고, 파삭파삭한 갈색의 파시앙스 쿠키를 굽고, 스페인 바람이라는 이름의 푸딩을 굽고, 마르치판, 마르멜루 젤리, 럼트뤼프를 만든다. 계란과 버터가 듬뿍 들어갔다는 이유로 구겔후프를 먹고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내 생각에 현기증을 느낄 이유는 더 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쿠키와 푸딩을 구워내니 밀가루와 버터와 설탕 냄새가 얼마나 집 안을 뒤덮었겠나! 밀가루 구름, 버터 구름, 설탕 구름이 십팔 일 내내 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끌어올리다가 마침내 잉어가 등장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크리스마스 잉어가 식탁에 오를 때 절정이었”다면서. 역시, 요리였다. 크리스마스 잉어 요리를 위한 첫 번째 관문은 12월 24일 아침 시장에서 ‘슈퍼 잉어’를 찾는 것이다. 독재자 말리 고모를 위시한 잉어 쇼핑단은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통통하고 힘 좋고 기름진 은빛 물고기”를 찾아냈었다. 어디 그뿐인가. 활기와 힘이 넘치는 놈들 가운데서도 아가미가 빨갛고 눈은 튀어나온 “제대로 된 놈”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한다……. 이제 소설은 이런 활달한 잉어를 찾을 수 없게 된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았던 시절이 지나가고, 더 이상 그 시절로 갈 수 없게 되어버린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예감이 들었다. 황홀하게 끓어넘치다 어느새 비감이 찾아드는 이 소설을 읽은 이상 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크리스마스 잉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수천 개의 밀랍 초가 피워내는 크리스마스의 달콤함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이 달콤한 갈망이 이내 쓸쓸함으로 바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한은형 |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장편소설 《거짓말》, 《레이디 맥도날드》, 《서핑하는 정신》, 산문집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그리너리 푸드—오늘도 초록》,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뜻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밤은 부드러워, 마셔》 등이 있다.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크리스마스 잉어
비키 바움 | 박광자 옮김

삶의 압박감과 절망감을 견디는 와중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단편 네 편을 실었다. 국내 초역. 크리스마스에 잉어 요리를 내놓길 바라는 ‘말리 고모’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잉어〉. 먹는 행위 자체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길〉과 〈굶주림〉. 쌓여 있는 음식 앞에서 지독한 치통을 앓는 〈백화점의 야페〉의 주인공까지. 이들을 따라가다보면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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