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버림받은 작은 마음 이야기




💬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의 편지는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에 관한 글입니다. 19세기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는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시골 청년이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쓰라려하는 작은 마음에 대하여 시를 썼습니다. 여기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겨울 나그네」가 세상에 나온 19세기는 우편망이 확립되어 누구나 글자에 마음을 실어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시대였는데요.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과학에서 막 첫발을 떼었다면, 예술가들은 그동안 고통과 절망을 직면하며 묵묵히 걸어왔지요.

다가닥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다가온다, 피아노의 왼손 반주로. 우편나팔 소리가 울린다, 피아노의 오른손 전주로. 피아노 양손의 연주는 우편마차 소리에 맞춰 덜커덕덜커덕 뛰는 나그네의 심장박동에 공명한다. 고동치는 마음을 안고, 나그네는 노래한다

거리 저편에서 우편나팔이 울려오네. 왜 그렇게 고동치는 거니, 어떻게 된 거니, 나의 마음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연가곡 중 열세 번째 곡 「우편마차」의 도입부다. 「겨울 나그네」의 원제는빈터라이제(Winterreise)’. 라이제(Reise)여행을 뜻하지만, 정처 없이 헤매는 내적 방황의 여정이라는 뜻에서나그네는 원제의 심상을 잘 옮긴 적절한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바리톤 가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연가곡 중 열세 번째 곡 「우편마차」


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 스물네 편 전체에 곡을 붙였다. 슈베르트와 뮐러는 비슷한 나이에 요절해서 생몰연도가 별 차이 나지 않는 동시대인들이다. 주인공인 나그네 청년이 사랑한 아가씨는 한때 혼담까지 나누었지만 이제 부잣집 약혼녀가 되었다. 시는 나그네가 아가씨와 함께한 마을을 떠나면서 시작한다

실연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방랑을 결심한 청년은 슬픔 속에 마을을 지나오며 아가씨와의 추억을 더듬는다. 마을을 한참 벗어나서 방랑길을 헤매던 중, 거리 저편에서 우편마차의 말발굽 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소리인가! 열세 번째 곡 「우편마차」는 이렇게 울려 나온다.

통신이 발명되기 전, 우편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을 소식으로 연결해 주었다. 종이에 편지로 쓰는 우편은 낡은 수단인 것 같지만, 왕이나 특수 계층의 전갈이 아닌 일반 우편제도는 ­17세기에야 독일 주요 도시들을 하나둘 이으며 정비되어 갔다. 중부 유럽의 모든 도시들이 정기적인 우편망으로 연결된 것은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유럽에서는 중세만 해도 길목에 강도들이 들끓어서 도시 밖을 벗어나는 일은 위험했다

안전이 보장되고 질서가 구축되는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닌 풍요다. 문명의 지식과 합의가 축적되어야 한다. 이렇게 변모해 온 양상들은 그 시대와 사회의 모든 분야들을 연결하며 영향을 주고받게 한다.

우편 덕에 이제 보통 사람들에게도 도시와 국가 넘어 글자로 연결되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어지고 싶은 열망을 담아서, 글자는 그리움을 기다림 속에 실어 날랐다. 우편나팔 소리에, 청년의 마음에는 헛된 희망이 고동친다. 편지라는 가능성 속에 아직도 아가씨와 이어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도사리며 마음을 휘젓는다

사랑을 갓 시작하거나 다투었거나 실연한 직후인 연인이라면 나그네의 이런 마음에 공감할 것이다.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부질없이 만지작거리는 마음, 희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소리에 반응해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은 얼마나 얄궂은가.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을 직면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시인과 음악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19세기 독일은 철학과 시와 음악이 모두 비탄에 잠긴 시대이기도 했다. 계몽주의 측면에서 ­18세기가 합리적 이성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천진한 낙관에 눈뜬 어린이 같았다면, ­19세기는 사춘기를 지나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인류의 고통을 직시했다. 음악과 시는 깊은 가을처럼 심오해져 갔다.

21­세기는 이런 정신적 기조에서 이제 장년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의 동요를 외면하려는 불감증을 성숙의 증후로 믿으며, 마음의 에너지가 타오르는 청년들을 꾸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19세기 예술가들 중에는 괴테가 다소 그랬다. 일찌감치 성숙했고 정서가 건강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위직 공무를 원만히 수행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동시대의 병리적인 예술의 증후들을 부당하게 배척했는지 모르겠다. 강건한 괴테가 뭐라 하든, 뮐러와 슈베르트는 절망을 직면하는 목적 없는 여정을 걸어갔다.


마음이 과학의 대상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에릭 캔델에 따르면, 뇌연구는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종합을 이룬 ­1970년대 이후 발전해 왔다고 한다. ‘마음의 과학’은 이제야 양적 근거의 데이터를 조심스럽게 확보하며 인간의 마음을 과학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과학이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곳에서, 생생히 살아서 꿈틀대는 우리의 마음은 방치되어야 할까?

답이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시인과 음악가들은 결연히 걸어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거나 처방을 내리지 않은 채,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따라갔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방어막조차 해제한 그 길로 들어갔다

우편마차의 소리는 경쾌한 장조로 시작하지만, 현실을 모르지 않는 나그네는 자꾸만 솟구치려는 마음을 단조의 음률로 차분히 달래려 애쓴다. 편지를 바라는 헛된 희망의 환영을 담은 장조가 현실적인 단조보다 어쩐지 고통스럽다. 마음은 이상하다. 정련된 예술가들의 정신이, 이런 마음의 존재를 꾸짖지 않고 인정하고 경청하며 드러내어 줄 수 있었다.

왜 그리 이상하게 구는 거니, 마음아, 나의 마음아?”

그래픽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퍼
유지원

오늘 전해 드린 글은 물리학자 김상욱과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글을 함께 엮어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를 보여 주는 책 『뉴턴의 아틀리에』의 네 번째 키워드, '편지'의 일부입니다. 과학과 예술, 서로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만났습니다. 김상욱 교수는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는 과학자이며, 유지원 디자이너는 물리학회까지 참석하며 과학에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두 저자는 무엇보다도 “관계 맺고 소통하기”를 지향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찰과 사색, 수학적 사고와 창작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스러움, 복잡함, 감각, 가치, 상전이, 유머 등 모두 26개의 키워드를 놓고 과학자와 예술가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쳐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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