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장마철 사이 반짝 뜨거운 주말이었습니다. 님의 주말은 어땠나요? 다음 주부터는 다시 태풍과 비 소식이 있네요. 이번 레터는 15개월 송이 아빠 현 님이 보냅니다. 현 님이 육아휴직에 들어간지도 이제 3개월이 지났는데요.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휴직 중이라며? 조만간 팝업 키친 여는데 1일 설거지 아르바이트할래?” 옥수동에서 식당 겸 작업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물었다.

육아휴직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당분간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지 않을 텐데 카드 명세서 숫자는 그대로였고 대출원리금도 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먼저 경험한 지인들의 조언처럼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마통을 써야 할 줄 몰랐다.

“좋지. 내가 설거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친구에게 호기롭게 대답하곤 5월의 어느 주말로 아르바이트 날짜를 정했다. 용돈이나 벌자는 생각뿐이었다.

알고 보니 설거지 아르바이트는 ‘설거지’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설거지를 잘하려면 손님이 식당에 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의 전 과정을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워낙 작은 규모의 업장이라 나 역시 일부 손님을 직접 응대하며 주문을 받았고 간단한 음료는 직접 만들어 서빙했다. 내가 씻어야 할 그릇을 누가 가져다주지 않으므로 홀을 둘러보며 알아서 그릇도 치워야 했다. 설거지는 눈치껏 틈틈이 하거나, 바쁜 시간대가 지난 뒤 한꺼번에 처리했다. 내 퍼포먼스는 주방 구석에 있는 두 개의 개수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디시워셔에게 일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더 이상 씻을 그릇이 없어 깨끗한 개수대를 뜻했다.

오후 12시부터 8시까지 강도 높게 일했다. 결과적으로 그날 일당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여덟 시간의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고 싶지 않았고 접시 깨뜨리는 걸 제외하고는 결제 실수, 주문 누락 등 업장에서 저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친구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었다. 대신 일당보다 훨씬 값진 걸 얻었다. 육아와 집안일을 대하는 내 태도를 다시 점검해볼 수 있었다.

4월부터 휴직했으니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신규 입사자가 수습 기간을 거친 뒤 긴밀히 일한 동료에게 피드백을 받는 3개월 리뷰 과정(3MR)이 있다*. 15개월 차 딸 송이에게 피드백을 받고 싶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가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대략 다섯 가지뿐이다. 엄마, 아빠, 맘마, 멍멍(길에서 마주친 강아지들에게 인사), 빠방(간이 자전거나 유아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

* 2021년 11월 30일부로 회사의 3MR 제도는 완전히 폐지됐다.

디시워셔의 관점에서, 스스로 회고해봤다.

• 첫째 달(4월): 머리로는 내가 지금 주방에서 접시를 닦아야 한다는 걸 알겠는데, 몸은 주방 바깥을 서성이느라 개수대에 접시가 쌓여갔다. 일하던 관성에서 벗어나는 데 어려웠고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이따금 찾아왔다. 미처 인수인계하지 못한 업무도 남아, 휴직 후 2주 정도 간간이 일하느라 아내 양실장의 시간까지 써야 했다. 회사 슬랙과 메일 등이 비활성화된 후에야 비로소 전업주부이자 주양육자 모드로 전환할 수 있었다. 송이의 돌잔치까지 마쳤다!
  
  
• 둘째 달(5월): ‘접시를 닦자! 근데 왜 나만 닦아야 하지?’를 고민했던 달. 이런저런 가족 행사가 많았고 나들이하기에도 좋은 계절이었다. 풀타임 육아가 손에 익으면서 이번엔 독박 육아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아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인 브랜드를 준비하면서 평일이나 주말에 일시적으로 육아를 교대해주기 어려운 상황이 생겼는데, 나 역시 피로가 쌓이면서 조금씩 마찰이 생겼다.
  
  
• 셋째 달(6월): 이제야 개수대에서 고개를 드니, 내 손님(송이와 아내)과 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솔루션을 찾기 시작하면서 최근에야 내 일상이 제법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다. 청소 등 집안일은 주 1회라도 비용을 들여 외부 서비스를 적절히 활용할 것. 아이와 하루 한 번이라도 집 밖으로 나가 함께 놀거나 산책하며 환기하는 시간을 가질 것.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육아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 3개월을 매일 반복적으로 하면 나름의 요령과 의미가 생긴다. 육아와 가사 노동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설거지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집안이 돌아가는 큰 그림을 덕분에 이해하게 되었달까. 요즘은 거의 매일 집 근처 공동육아방을 가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차로 30~40분 거리에 있는 조부모님 댁으로 간다. 그곳에서 내가 육아를 하더라도, 돌보는 어른이 여럿이라 훨씬 낫다. 육아 관련 주요 물품은 여전히 아내가 챙기지만 기저귀나 분유, 장보기 등은 내가 챙긴다.

돌이켜보면 휴직 초반에는 나를 더 신경 썼다. 이제는 송이의 보호자로서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송이 눈높이의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고 재밌는지, 동시에 위험할 수 있는지 보인다. 공동육아방, 학교 앞의 다른 부모가 보이고, 아이와 있을 때 계속 스마트폰만 보는 어른을 보면서 나도 반성하게 된다. 이따금 아이랑 놀이터에 오는 할머니들과 자연스럽게 인사한다.

내 시간을 어떻게든 확보해야 한다고, 주도권을 상황에 뺏기지 말아야 한다는 집착을 놓으면서 새로운 해방감과 몰입도 느끼고 있다. 《몰입(Flow)》의 저자로 알려진 헝가리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2004년 TED 강연을 통해 문화나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몰입 상태에 있을 때의 조건을 언급했다.

“몰입은 일단 강렬해지기 시작하면, 무아지경으로 인도한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매 순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받습니다. 해야 할 일이 비록 어렵더라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시간관념은 사라지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죠.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거든요. 이런 조건들이 형성되면, 하고 있는 일이 그 자체로 해야 할 가치(자기목적성)가 있게 됩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그는 몰입 상태에 도달하거나 유지하려면, 개인 능력(skill)과 풀어야 할 과제 수준(challenge)이 엇비슷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 능력보다 과제가 어려우면 불안을 느끼거나 상황에 압도될 수 있고, 거꾸로 내 능력보다 과제가 쉬우면 금세 지루해진다. 이렇게 보니 지난 6월부터 육아가 가끔 몰입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던 까닭은, 송이가 원하는 과제 수준과 내 능력이 대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송이의 피드백은 늘 신속하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카톡이 편지예요? 왜 이리 답이 느려요.” 물론 내가 어떻게 하면 가사 노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육아에 몰입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동안 비혼이자 싱글 동료들과 소통하는 데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 친하게 지내던 팀원 하나는 나에게 “육휴 첫날, 잘 즐기셨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그땐 나도 모든 게 혼돈이라 ‘즐기다뇨’라고 되물을 뻔했지만 이제는 허허허 웃으며 답할 수 있다. “지금이 참 좋아요. 이 시간이 언제 또 오나 싶기도 하고요.”

지난 3개월 동안 워밍업을 마쳤다. 앞으로 남은 9개월이 기대된다.

Fathers'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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