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쉰여덟 번째 흄세레터
저는 한 해를 시작하며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들을 안고, 온 세상이 들끓는 여름을 통과하곤 했어요.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요.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하나씩 놓고 내가 무엇을 쥐고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살펴보는 거죠.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표정으로요. 

"몸은 작지만 마음은 크지."(97쪽)

이 계절을 경쾌하게 걸을 것 같은 캐럴라인의 모습이, 어쩐지 이번 주 내내 제 가슴에 콕 박혀 있습니다. 긴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더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요🎵

보고 싶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연휴 보내시기를 바라며, 오늘은 흄세 편집자가 뽑은 《불쌍한 캐럴라인》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불쌍한 캐럴라인》 미리보기 1


“아니, 캐럴라인 고모 같은 사람은 바뀌지 않아요. 항상 자기가 남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잖아요. 늘 본인이 특별한 뭔가를 할 거라고.” 

“흠, 분명히 특별하긴 했죠.” 베티가 웃었다. “특별히 성가신 존재였잖아요, 여하튼.”

“생각해보니.” 도러시가 차와 온기, 샌드위치로 인해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말했다. “고모한테는 골칫거리가 되는 게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일흔 넘은 여자 인생에 뭐 그리 대단한 게 있겠어요? 혼자 하숙집에 사는데 집세는 밀리고, 우리가 준 헌 옷을 입고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일들을 하겠다고 종종거리며 다니고, 아무도 실어주지 않는 글을 쓰고, 저녁밥으로 마가린 바른 빵을 먹는 인생에요. 그 끔찍한 방을 보니 좀 딱하기도 했어요. 불가능한 계획으로 빽빽한 서류들이 잔뜩 있는 방. 내가 엘리너처럼 그걸 다 살펴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에요. 내 생각엔 어떤 인생이 다른 인생보다 훨씬 덜 중요하거나 남들에게 영향을 덜 주는 사람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15∼16쪽)

흄's pick

말도 안 되는 계획으로 회사를 꾸려나가는 캐럴라인이 누군가에게는 분명 성가시고 골칫거리인 존재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애썼던 마음만큼은 나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불쌍한 캐럴라인》  미리보기 2


그들이 진정한 경험과 성공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어? 시와 고통과 상실과 일에 대해서 알 수 있겠어? 밤을 꼬박 새워 회의록을 작성하고 보고서를 준비하고 눈이 따끔거리고 목과 어깨가 쑤시는데도 잠들지 않고 일을 더 하려고 커피를 끓이는 일은? 온갖 고통과 불편과 외로움과 실패도 지켜야 할 큰 뜻만 있다면 가치 있는 것이 된다. 

(......)

현실에서는 불완전한 날이 밝고 있었다. 좁은 창을 통해 여명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야간조 간호사들이 병동 한쪽 끝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금세 수습 간호사가 아침 차가 담긴 머그잔을 싣고 수레를 덜컹덜컹 굴릴 것이다. 분명히 시가 더 있었는데? 최고의 시였는데.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질문에 답해주는 시가 있었는데.

엘리너에게 사무실 임대 건을 알아보라고 부탁해야지. 그리고 새 전단 인쇄 건도. 엘리너가 일찍 오기를 바랐다.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많은 일을 관리하려면 사소한 것들에 충실해야 한다. 절대 포기하면 안 돼. 개척할 때는 기준을 늦추면 절대 안 된다. 충실하라.
맞아. 시가 있었어. 그 시가 생각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황금 벽에 도달했을 때

발이 아프고, 지쳤고, 슬픔과 죄로 더러웠는데
당신의 목소리가 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명령하셨네.
잘했구나, 너는 선하고 충실했구나 친구여! 안으로 들어오라!


친구, 친구라, 그 친구가 그녀였다. 나도 친구를 찾았지. 충직한 친구. 그 친구를 위해 시를 한 편 지어야 할 텐데. 황금도시로 외롭게 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 한 편 더.
“안 돼, 간호사. 아직 안 돼……. 아직 안 돼. 잠깐만. 안 보여, 내가 바쁜 거?”
간호사가 왜 이렇게 멍하게 나를 바라보는 거지? 왜 수조에 저렇게 물이 계속 부어지고 있는 거지? 모두 함께 익사하고 있고 모두 빠져버렸는데.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서 물이 빠져나가게 해야지 안 그러면 다 죽고 말아.
한쪽 팔을 쳐들었다.
“열어!” 캐럴라인이 소리쳤다. “열어! 황금…… 황금…….”
그러자 그 문이 열렸다.

(......)

그러니까 이것이 캐럴라인의 마지막이었다.

(......)

세우려고 했던 학교가 파산했다. 그녀가 지은 시들과 《용기의 길》은 읽은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

이 생생하고 믿을 수 없는 4월의 햇빛은 캐럴라인의 위태롭고 지긋지긋한 활동에 대한 마지막 평가였다.(366~378쪽)

랑's pick
캐럴라인의 크나큰 소망을 생각해봅니다. 완벽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완벽히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그 소망과 캐럴라인의 인생을요.
불쌍한 캐럴라인
위니프리드 홀트비 | 정주연 옮김

소외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운동가이자 인정받는 소설가였던 위니프리드 홀트비의 대표작 중 하나. 국내 초역. 개인적인 사랑보다는 사회적인 성공을 꿈꾸는 일흔두 살의 주인공 ‘캐럴라인’을 둘러싼 다양한 주변 인물의 목소리를 담아낸 소설로, 가난한 비혼의 노년 여성을 향한 혐오와 연민의 시선을 가볍게 튕겨내는 작품이다. 거의 매 장이 ‘불쌍한 캐럴라인’이라는 말로 끝나지만, 꿋꿋이 신념을 지키며 목표를 좇는 캐럴라인의 모습은 정말로 불쌍한 이들이 누구인지 되묻게 한다.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연극 〈기형도 플레이〉

무고한(?) 젊은이들을 문학청년의 세계로 이끌곤 하던 기형도…… 의 시 9편을 모티프로 하는 단편 희곡들을 모은 작품입니다.

“아무도 실어주지 않는 글을 쓰고, 저녁밥으로 마가린 바른 빵을 먹는” 캐럴라인과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형도 시의 화자가 어쩐지 닮아 보이기도 하네요.

포스터에 배우들의 시 낭송 영상을 링크해두었어요!

영화 〈위대한 개츠비〉 OST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안 된다고 말하고, 무시하고, 걱정하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캐럴라인. 하지만 소설 끝으로 갈수록 그런 캐럴라인이 '위대하게' 보이더라고요.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 자신이 생각한 미래로 돌진한다는 점에서요.
오랜만에 Lana Del Rey의 〈Young and Beautiful〉을 찾아 오래오래 들었어요. 《불쌍한 캐럴라인》을 읽으신 분도, 읽으려고 하시는 분도 캐럴라인이 지닌 '위대함'도 기억해주시기를 바라며, 포스터에 OST 링크 걸어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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