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여행이란 헛수고!

너무 늦게야 깨닫는다.

가능한 것은 머무를 것.

그리고 제한된 자아를 고요히 유지할 뿐이라는 것을….

- 고트프리트 벤의 여행중에서


오늘은 이 시를 보면 떠오르는 작가를 소개해요.  시리즈 3권은 이분의 글입니다. 모두 익히 아시는 분일 테지만, 반갑게 맞아주세요.

번역되어야 하는 : 번역가 노시내의 번째 글을 편집하며

🌱 죽순


마티로 이직한 2015년 이후, 노시내 선생님과 함께 한 작업은 여덟 개입니다. 지금까지 1년에 한 번 꼴이죠. 하지만 제가 선생님의 얼굴을 직접 뵌 건 두 번뿐이에요. 기억이 흐릿하지만 첫 번째 만남 당시 선생님은 스위스에서 날아오셨던 것 같아요. 아마 맞을 거예요. 베른에서 지내며 집필한 『스위스 방명록』을 출간한 뒤였고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셨거든요. 


『스위스 방명록』은 선생님이 미국에서 8년, 일본에서 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4년, 그리고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 가 2년째에 완성한 원고였습니다. 선생님은 영원한 여행자이자 성실한 시민으로, 소속된 내부자이면서 바깥에 선 관찰자로 스위스를 들여다보며 사람을 돌아봅니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스위스 철학자, 지식인, 사업가뿐 아니라 스위스를 망명지로 삼았던 뷔히너, 바그너, 레닌부터 차갑고 한적한 실스마리아를 찾았던 니체까지요. 노시내 선생님의 잔잔한 문장 속에서 이들이 뜨겁게 되살아납니다.  


이보다 앞서 쓰신 『빈을 소개합니다』는 제가 빈 여행을 떠날 때 들고 갔던 책입니다. 덕분에 ‘현지인이 찾는’ 슈니첼 식당을 찾아가고, 현재 활동하는 리사이클링 디자이너의 가게를 구경하고, 스타 셰프 김소희 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가볼 만한 곳’ 같은 정보가 아닙니다. 이 책에서 빈은 화석화된 과거의 막을 벗고 지금 우리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곳이 됩니다. 노시내 선생님은 내/외부인이라는 경계에서 침착하게 그곳의 역사와 사물과 사람을 응시합니다. 뭉뚱그리지 않고 하나하나에 개별적인 애정을 담아서요. 


선생님과의 두 번째 만남은 올해 3월에 있었습니다. 『마이너 필링스』가 한국에서 많은 독자와 만나 ‘믿고 읽는 번역가’ 노시내의 이름을 다시 새긴 즈음이었죠. 이번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오셨어요. 이국적인 향이 짙은 회향과 카다멈을 선물하시며 파키스탄식 밀크티 제조법을 상세히 알려주셨답니다.  


『마이너 필링스』는 노시내 선생님이 번역한 17번째 책입니다. 이제 막 탈고한 『작가 피정: 경계와 소란 속에 머물다』(가제)에서 선생님은 “번역은 나에게 행위라기보다 어떤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사느라고 새로운 환경과 급변하는 일상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번역은 내가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는 한결같은 공간”, “익숙해서 편안한 안식처이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피난처”라고요.


헌데 저는 ‘노시내 옮김’이 아닌 ‘노시내 지음’을 기다렸습니다. 선생님이 떠나고 머무르며 만난 언어, 사람, 풍경을 살갑게 전해주셨던 두 번의 만남을 잊을 수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의 떠남은 언제나 머물기 위함이었기에, 선생님은 자기 주위의 낯선(그러나 서서히 친숙해질) 모든 것에 시선을 주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해하다, 가슴으로도 머리로도 가능한 그것. 우리가 종종 실패하곤 하는 이것을 노시내 선생님은 워싱턴DC, 도쿄, 빈, 베른, 모스크바, 이슬라마바드에서 종종 해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가 이해한 어떤 삶들이 번역되어 읽힌다면 우리의 간장종지만 한 세계가 한 뼘 넓어지고 깊어질 거라고 믿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노시내 선생님께서는 분명 “아니에요. 모두 각자 고유한 크기가 있을 뿐 더 작고 큰 세계는 없죠”라며 살며시 웃으실 것 같네요.


✏️ 노시내의 글과 번역

『책임 정당』

『마이너 필링스』

『대표』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히틀러의 모델, 미국』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고스트 아미』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스위스 방명록』

『빈을 소개합니다』

『대중이 돌아온다』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다른 누군가의 세기』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페트로폴리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일본의 재구성』

노시내의 문장이 날아든다, 고요하고 소란스럽게 

🧼 퐁퐁


서울, 워싱턴DC, 도쿄, 빈, 베른, 모스크바, 이슬라마바드. 26년째 타국 생활을 하고 있는 노시내 선생님은 여행자도 이민자도 아닌, 완전한 현지인도 완전한 이방인도 아닌, 그 경계에서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작가/번역가이자 따뜻하고 반짝이는 시선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사람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입니다. 지난 봄,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해 가족과 시간을 보낸 선생님은 다시 현재의 거주지인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가기 전 40일간 취리히에 머무릅니다.

선생님은 이 40일을 ‘작가 피정’(writers’ retreat) 기간으로 삼아요. 피세정념(避世靜念),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슬라마바드 집에선 일하고 생활하며 수선스럽게 지내고, 서울 부모님 댁에선 여러 약속들로 분주하게 지내는데, 홀로 오롯이 작은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이 ‘사치’스러운 시간이 선생님은 아주 반갑습니다. (여기서 ‘집’은 ‘숙소’예요. 머무르고 떠나는 삶을 살다 보니 숙소를 집이라 부르는 게 버릇이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선생님의 ‘피정’은 조금 소란스럽게 흘러갑니다. 회복에 집중하는 시간들은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주고, 온 감각을 예민하게 깨워주었어요.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표현대로 “새가 시야 안으로 날아드는 것처럼 온갖 생각과 기억이 날아듭니다.” 마르셀이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고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다면, 노시내 선생님의 촉매제는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의 “스위스 독어 억양이 짙게 밴 독어”, 우두루어 억양을 닮은 ‘아차’ 하는 단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앗 뜨거!”와 “아우치!”, 파키스탄 메밀, 밀크티, 맥도날드 햄버거, 파키스탄의 베테랑 산악 가이드, 과자 가게에서 만난 다정한 러시아 사람들, 러시아어 선생님, 운전사... 언어와 음식과 사람입니다. 

* 취미는 언어 맞히기 
선생님의 취미는 산책하다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흘러들면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언어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에요. 저 말이 어느 나라 언어인지, 어느 지역의 억양이 섞였는지, 본토인인지 외국인인지 맞혀보는 거죠. 어쩌다 "호기심이 수줍음을 압도할 때면" 무슨 언어인지 과감하게 물어요. 답을 맞힌 날에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틀렸다 하더라도 즐겁습니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정보가 쌓인 것이니까요.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하고 언어에 민감한 번역가의 소소한 재미이기도 합니다. 

* 위틀리베르크 타고 고소한 메밀 향을 맡으면
부푼 마음으로 산책을 하는데 저 멀리 취리히 사람들이 하이킹을 즐기는 위틀리베르크가 보여요. 스위스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저 산봉우리를 타고 흘러가던 생각은 이내 파키스탄 북부의 카라코람산맥에 다다릅니다. 정확히는 그 지역에서 만난 음식과 사람이죠. 산악 가이드는 즉흥적으로 선생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발티스탄 지역 전통차인 소금버터차를 끓여주고, 선생님은 추운 겨울에 아침 식사로 먹는다는 “그 희한한 맛이 싫지 않아” 호로록 마시고는 그곳의 식재료로 눈길을 돌려요. 메밀과 산자나무 열매. 고소한 메밀 향을 맡는 순간 러시아 향수를 찐-하게 느낍니다.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메밀을 즐겼지만, 메밀이 흔한 러시아에 머무르는 동안 버섯메밀밥을 자주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 거죠. 작은 열매 하나에 여러 도시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네요. 

* 떠도는 사람의 고향은 아끼는 사람들의 곁
그러나 러시아를 떠올리며 마음 편히 추억에 젖어들지는 못해요. 취리히 시내 곳곳에서 펄럭이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보며 이 말도 안 되는 전쟁이 속히 끝나기를 바라고, 우크라이나를 걱정하고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러시아 사람 모두가 비난받는 것을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마주한 러시아인들은 소박하고 잔정이 많은 이들이었거든요.

이렇듯 노시내 선생님에게 ‘피정’이란 세상을 멀리하고 외따로 지내는 것이 아니에요. 온(on) 시리즈 3권이 될 『작가 피정』은 선생님이 취리히에 머무는 동안 보고 듣고 마주하고 떠오르고 느낀 것들을 성실하게 기록한 체류기이자, 떠나온 도시들을 단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며 독자들을 멀리 데려가는 여행기이자, 고요한 일상에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킨 언어, 음식, 사람에 대한 경험을 촘촘하게 엮은 산문입니다.

편애 없이, 섣부른 판단 없이, 마주하는 것들을 진중하게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은 오히려 읽는 사람을 피정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흔들림 없이 매일매일을 담백하게 기록한 글을 읽다 보면 어지럽고 부산스러운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고, 그러나 외면하지도 않는 마음가짐을 배우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됩니다.
다음 주부터 '채널예스'에서 출간 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마티 SNS에서 소식 전할게요.
머무른 자리에서 쓰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0년대 국어 교과서에 실린 산문 작가는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남자였어요. 유일한 여자는 전혜린 작가였습니다. 그의 먼 곳에의 그리움은 요즘도 수능 언어영역 모의 문제에서 언급되는 듯해요. 

1934년 생인 그는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고 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가 55년 독일 뮌헨대학 독문과로 유학을 떠납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교수와 집필 활동을 하다가 1965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가 뮌헨에서 생활하며 쓴 짧은 일기와 비평, 귀국 후 쓴 에세이, 육아 일기를 엮은 책입니다. 초판이 1966년에 출간된 이후 수많은 청년의 심금을 울렸다고 전해집니다. 

정신적인 것에 대한 희구, 인식욕, 지적 자유를 좇으며 물질적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독일 청년들의 의식을 생생하게 전하는 초반 에세이에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슈바빙 거리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요. 

신드롬 급으로 읽혔던 책과 전혜린에 대한 평가는 일순 바뀌어부잣집 딸내미의 교양 있는-공주-코스프레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복권하고자 시도한 김용언의 『문학소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함께 읽으셔도 좋겠습니다.

최승자,  『어떤 나무들은』

시인 최승자가 1994 마흔셋의 나이에 아이오와대학 작가 프로그램(IWP) 참가해 일기를 묶은 책입니다. 문어체로만 영어를 할 줄 아는 시인은 영어회화 책을 잔뜩 짊어지고 아이오와에 도착합니다. 낯선 외국인들과 데면데면 어울리며, 뭔가 불만 어린 발걸음으로 헌책방, 리딩 프로그램, 중고 가게 등을 돌아다니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거립니다.

다른 작가가 시인을승자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제가 깜짝 놀랐을까요. 그가 친숙하게 이름이 불리는 이였음을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같아요. 책장이 넘어가며 아이오와의 날씨가 쌀쌀해질수록아이고, 선생님, 내복 보내드릴까요하는 속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맛도 있습니다.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공연예술 이론가 목정원은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을 보고, 실재하던 몸짓이 사라진 자리에서 글을 씁니다. 사라진 것, 잊힌 것, 남겨진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존재들, 박탈당하고 지워진 여자들을 소환합니다.

프랑스와 한국에서 마주했던 무대-몸짓-사람에 관해 촘촘하게 써내려간 내밀하고 아름다운 비평을 보면 목정원은 슬픔을 잘 감각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 슬픔 안에서 웅크리지 않고 텅 빈 자리를 직시하며 문장을 길어 올리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에 매번 지면서, 오르페우스처럼 결국은 뒤돌아보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글이 담겨 있어요.

『스페이스 (논)픽션』 첫 번째 북토크가 순식간에 마감되어 아쉬웠던 분들에게 두 번째 북토크 소식을 전합니다. 진부책방에서 정지돈 소설가와 민병훈 소설가가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에요.

🗓 11월 17일(목) 19시 30분 진부책방스튜디오

 ↳ 서울특별시 마포구 잔다리로 112 2층

 ↳ 신청 바로가기


📍 11월 말에 열리는 세 번째 북토크 소식은 다시 공지할게요!

도서관여행자 님이 11월 한국에 오십니다. 서울 소재 도서관 세 곳에서 저자 북토크가 열립니다. 서쪽, 남쪽, 동쪽에서 각각 진행하니 가까운 도서관으로 오세요.🙃


🗓 15일(화) 19시 은평구 구산동도서관마을

🗓 23일(수) 19시 30분 관악구 용꿈꾸는작은도서관

🗓 30일(수) 16시 강동구 해공도서관 


📍구산동도서관마을 북토크는 참가자 모집 중이에요. 신청 바로가기 

📍나머지 두 곳은 11월 둘째 주에 신청 링크가 열립니다. 다시 공지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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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좋아하는 친구에게
도서출판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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