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은 ‘칼’이다.

이 생각을 했을 때는 여느 때처럼 슬럼프가 왔을 때였다.

 

그리고 늘 그리던 그림이 늘지 않을 때는 재능 탓을 하게 된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핑계로 노는 시간이 길어지고 딴짓을 하니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한다. 그렇게 재능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하기 좋은 상황이 되고 얼떨결에 결론을 내린다.


“결국 나는 재능이 없는 것일까?”

 

재능은 없는 사람에게는 신기루 같지만, 사실 감각의 일부라서 이 감각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존재가 된다. 


이를테면 ‘칼’이 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 때부터 그 ’칼‘을 쥐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칼’ 인지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칼이 아닌 칼이 되기 전의 뭉툭하고 못생긴 철 뭉텅이었을 것이다. 일부는 우연히 뭉텅이의 존재를 알게 되어 반짝이고 날카로운 칼이 되도록 다듬고 만들지만, 또 다른 일부는 뭉텅이의 모양을 탓하며 그대로 두고 살 것이다. 


어느 다큐에서 장인이 낫과 호미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뭉툭하고 거무칙칙한 철을 뜨겁게 달궈 끝없이 두드려 모양을 만들고 깎고 닦으며 제법 쓸만한 도구로 내놓는다. 철 뭉텅이의 모습을 떠오르지 않는 제대로 된 물건 하나가 된다. 내 경우도 비슷하다. 예민하게 단련된 감각 때문에 초기의 무딤을 잊은지 오래다. 인생은 훈련의 연속이다.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뒤집기부터 걷기까지 끝없는 반복을 한다. 밥을 먹기 위해 젓가락질을 배울 때는 또 어떤가. 무거운 쇠 젓가락을 쓰기 위해 가벼운 젓가락부터 보조 기구가 있는 젓가락까지 거쳐야 쇠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유치원부터 중학교 입학 전까지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부모의 손길이 덜 가는 독립된 개체가 된다. 


운이 좋아 걷기 훈련을 하는 시점에서 그리기 훈련도 같이 했다. 걷기를 어느 정도 하게 되니 엄마는 내게 연필을 쥐여주었다. 조금씩 선을 긋고 한글을 써보고 숫자도 써보니 그 연필로 다른 것을 할 수 있을지 탐구하는 시기가 왔다. 나의 엄마는 그 시기에 큰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크고 아름다운 공주의 드레스를 몇 번이고 그려주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선을 그을 수 있다고 느낀 것이. 엄마의 선을 따라잡기 위한 나의 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양한 도형을 그리고 동물을 그리고 사람을 그렸다. 연필을 썼다가 색연필을 썼다가, 크레파스와 물감을 썼다. 그렇게 그림과 12년 학교생활은 서로 떨어지지 않고 긴밀하게 붙어 조용히 ‘칼’이 될 훈련을 했다. 칼이 되지도 않은 철 뭉텅이를 가지고 뭐든 하고 싶었기에 내가 그림 그림은 가끔은 보기 좋았고 대체로 형편없었다. 상처받고 좌절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 철 뭉텅이가 크고 반짝이고 날카로운 칼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

 

철 뭉텅이는 말 그래도 뭉툭하고 거칠어서 몇 번 두드린다고 모양을 바로 잡지 않는다. 뜨거운 불길에 넣어 다듬기 좋게 만들어야 하고 언제까지 두드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두드려야 한다. 나의 창작 과정도 이와 같았다. 가끔 슬럼프가 오면 모든 걸 놓고 한눈을 판 적도 있지만 곧 다시 돌아와서 아무 생각 없이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두드린다고 하니 닫힌 문에 대고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시도 때도 없이 노크하는 상상이 되는데 맞는 것 같다. 노력에 대한 답을 받고 싶은 마음은 다 같다.


 

 10대를 지내는 동안 한 훈련은 20살, 대학생이 되었을 때쯤 단련의 기간으로 바뀌었다. 손에 익을 때까지 다양한 재료를 번갈아 써보며 타인의 인정과 나의 만족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야 했다. 이미 잘하는 것도 계속해보면서 확신이 들어야 만족했다. 잘하는 것을 지속하고 새롭게 잘할 수 있는 것도 찾았다. 이렇게 칼의 모양을 조금씩 잡아갔다.

30살이 넘은 시점부터는 훈련이 아닌 정련의 시기다. 칼이 모양을 잡았으니 자르고, 갈고닦아 빛이 나도록 하는 것. 칼의 모양을 내는 일에만 30년이 걸렸다. 아직 제대로 쓰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모양이나 빛을 어느 정도 갖춘 후부터는 조금씩 칼을 쓰고 있다. 나를 찾는 곳이 있으면 적당히 무딘 내 칼을 쓴다. 제법 좋은 결과가 나오면 어쩐지 아직 갈지도 않은 칼날이 좀 더 빛나는 것 같다.



칼의 모양을 갖추고 나면 갈고 닦아 빛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는 칼의 사용 뿐만 아니라 칼이 사용되는 방향도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