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dia's Note
‘나디아의 수요일’입니다. 여러분은 일상을 얼마나 계획적으로, 유용하게 보내시나요? 오늘은 육아와 일을 전략적으로 병행한다고 믿었던 호경의 절망과 치유의 경험을 보내드립니다. 발모라이의 편안한 사운드와 함께 편안한 오후 보내시기를!
발모라이 그리고 전략 없는 삶
일종의 시간 강박인 걸까. 과천에 있는 미술관에서 미팅이 있어 전날부터 내비게이션을 켜 소요 시간을 확인했다. 얼마나 걸리려나, 막히는 걸 고려하면, 그래도 출퇴근 시간은 아니니까… 집 앞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서 출발하려면, 그러니까 내가 씻어야 하는 시간은 늦어도… 매사에 계획적인 편이라 청(소)년기 내내 꽤 피곤한 삶을 영위해 왔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더 심해졌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원고 작업을 하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는 대여한 장난감을 반납하고, 같이 돌아오면서는 두부와 달걀을 사야지. 아, 예방 접종하는 날이 내일이던가, 모레던가. 저녁마다 기진맥진해서 아이랑 같이 잠드는 매일의 풍경. 
써야 할 원고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인풋’의 시간이 넉넉히 주어지지 않는 건 괴로운 일이다. 주제와 관련한 책도 차분히 읽고 싶고, 동료가 추천해준 영화도 집중해 보면서 재료들을 풍부히 해두고 싶은데 늘 흰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만으로 시작하는, 나의 근무 환경은 그야말로 바삭바삭 사막 같다. 
그래도 그런대로 참방참방 넘치지 않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별것도 아닌 일에 끓어 넘쳐 버린 건 아마도 98, 99도쯤의 상태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양육자로서의 나의 일을 돕고 있는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에게 상처를 휙 긋고 나니 깨달아졌다. 나의 전략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삶의 모든 순간이 눈에 보이는 성취로 이어질 수는 없다. 오늘 만난 사람이, 오늘 떠올린 생각이, 오늘 들은 음악이, 오늘 본 영화가 모두 의미가 있을 순 없다. 일의 만족감이 부족한 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의 능력이 모자라서임을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깨달았다.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를 틀고 과천으로 향했다. 정희진 편집장은 의미만 추구하면 망한다고 했다. 구어적 표현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삶 내내 의미만 추구하면 정말로 망할 것이다. 원고지 위에서 의미와 무의미의 전쟁이 벌어진다는, 김훈 작가의 말도 인용돼 흘러나왔다. 글 쓰는 일의 지난함을 표현한 말이지만 글을 삶으로 바꿔도 비슷하다. 삶에는 의미와 무의미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신선놀음도 될 것 같은 미술관 풍경에 감탄하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발모라이(Balmorhea)의 신보 ‘Pendant World’를 들었다. 알고리즘이 소개해준 ‘Held’라는 곡으로 2006년 데뷔해 벌써 여덟 번째 앨범을 발매하는 발모라이를 이제야 알게 됐다. 요즘의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 곡인지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게 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종종 듣게 되는데(내가 듣는 걸까, 음악이 나에게 오는 걸까) 그러다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어떤 한 곡을 발견하면 부랴부랴 음악가의 정보를 찾고 해당 곡이 속해 있는 앨범을 찾아 듣는 일이 많다. 한 곡에서 앨범 전체로, 앨범에서 음악가의 역사로 단계를 밟는 동안 대개는 감흥이 사라져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발모라이는 내 계정에서 고유한 방을 만들고 있다. 
조용하게 느리게 서정적으로, 어떠한 조그만 힘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Held’와 달리 첫 곡인 ‘Nonplused’는 타악기의 연속적인 부딪힘으로 거대함 속에서 작은 세계가 열리는 것 같은 인상이다. 두 번째 곡 ‘Oscuros’부터 피아노와 목소리, 여러 악기가 중첩되며 고유한 에너지를 키운다. 발모라이의 Pendant World는 알록달록한 세계는 아니다. 표지 이미지처럼 회색빛이지만 점차 그 그림이 뚜렷해지며 미세하게 생명력을 더하는 느낌이다. 고요한 편안함과 신비로움이 번갈아 밀려온다. 
첼로와 색소폰 소리가 소리의 두께를 키우며 그 세계의 깊숙한 곳까지 듣는 이를 끌고 들어가(‘Step Step Step’) 맑고 예쁜 무언가를 보여주는 식(‘The Bright Door’)이랄까. 발모라이가 들려주는 Pendant World는 버겁지 않은 세계, 그러면서도 영영 지루해지지 않을 세계다. “‘Pendant World’는 네오클래식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연약함으로 구현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준다”는 리뷰(The Line of Best Fit)는 나중에 찾아 읽었다. 
지금 내가 하는 노력은 어떤 성취로 이어질까, 지금 내가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어떠한 영감이 될까 하는 강박이 나를 그리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지 않을 거라는 깨달음을 통과하는 중이다. 좋은 글을 써냄으로써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싶던 나는, 하루의 시간을 쪼개어 무언가를 헤집고 다니는 식의 노력을 이어왔지만, 이 전략은 사실 며칠에 한 번쯤 쫓기는 꿈을 꾸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음을 인정하는 중이다. 발모라이가 편안함과 신비로움을 번갈아 들려준 것처럼 일상의 성실함 속에서 부유하는 무언가를 기다려볼 셈이다. 다른 세계를 기웃대다가도 같은 자리에서 머뭇대더라도(‘ElseWhere’), 커다란 혼돈에도 아름다움이 중첩되는 게(‘Violet Shiver’) 삶일 테니.🐌 

Balmorhea – Step Step Step
이번 메일은 어떠셨나요? 나디아의 수요일에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이 있으면 wednesday.nadia@gmail.com로 보내주세요!
발행 나디아의 수요일  |   wednesday.nadia@gmail.com   |   수신거부 Unsubscribe
stibee

좋은 뉴스레터를 만들고 전하는 일,
스티비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