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겨울이 참 길었죠. 그런데 도대체 봄이 언제 오냐, 꽃은 언제 피냐 했던 것이 무색하게 봄이 갑자기 정말, 정말 갑자기 찾아온 느낌이었어요. 갑자기 온동네 꽃이 다 피기 시작하더니, 반팔을 입을 날씨가 되어버리고, 어느새 벚꽃이 지기 시작하다니.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바쁘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주로 차 안에서 눈치채게 됩니다. 아쉽다는 말은 아니에요. 네모난 차 앞유리 너머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가슴벅찰 때가 있어요. 저는 버드나무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제가 운전하는 길에는 버드나무들이 좀 많거든요. 어느 나무의 새순이나 맑은 연두색이긴 하지만, 버드나무의 새순은 조금 더 네온 컬러에요. 정말 뭔가 꼬물꼬물 피어나는 초록입니다.

매일 버드나무 옆을 운전해 지나가고 잎들이 피어나고, 점점 잎이 길어지고, 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온 세상이 초록이네요. 왜 양반들이 굳이 '산천초목에 신록이 가득하니' 같은 문장들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어요. 세상이 너무 아름다운거에요. 기록하지 않기에는. 

봄이에요 구독자님. 목련과 영춘화가 피고, 뒤이어 개나리와 매화, 벚꽃이 피고, 제비꽃에 라일락이 피는 계절. 정말로 아름다운 계절 한가운데를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감동스러워집니다. 이 짧은 봄을, 조금이라도 더 함뿍 즐겨야 해요! 

신록(新綠), 새로운 초록이라는 의미로, 사실은 늦봄에 올라오는 나무의 새순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무의 새 잎을 이르는 말이지만, 저는 봄나물도 어쩐지 땅을 뒤덮는 신록인 것 같아요. 연중 나오는 나물도 이 계절에 나는 첫 잎이 더욱 부드러운 법이고, 맛도 향도 진합니다. 그래서 꼭 챙겨먹어야 해요.

봄나물이 순서대로 나올 것 같지만, 사실 요이 땅! 하고 우르르 쏟아져나오거든요. 잠시만 신경을 안쓰면 어떤 것들은 한 해 동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봄나물이 나오면 마음이 너무 급해져요. 이번 레터 주제를 정하려고 마트에 가서 머위, 달래, 아욱, 취나물, 세발나물, 땅두릅 같은 것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 어떤 음식을 해야할까....그런데 아무래도 못정하겠더라고요. 다 맛있는데 어떻게 정해 😭 하나만 정한다는건 너무 잔인한 일이에요.

그래서 결국 다사왔습니다!! 봄나물을 넉넉히 넣은 비빔밥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거든요. 예년보다 빨리 더워졌으니, 봄나물도 금방 자라서 출하 시기가 짧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빨리 다 먹어버리자는 마음도 있었구요.

머위와 취나물, 세발나물, 시금치, 그리고 달래를 준비했습니다. 하나하나 손질하고 흔들어 씻고 있자니 조금 힘들기는 했는데요, 그래도 봄나물은 썰고 다듬을 때마다 향이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기분을 신선하게 만들어주는지 몰라요. 오랜만에 요리하기 전에 그릇에 아주 예쁘게 채소를 담아보았는데요. 화면으로 보는 지금도 참 눈이 싱그러워지네요. 사실 채소야 연중 내내 있지만 이 계절에만 즐길 수 있는 색감이 확실히 있습니다.

머위는 쌉싸름한 맛이 좋고, 취나물은 쌉싸래한 맛 사이로 스며든 특유의 향, 시금치는 달콤한 맛이 있어요. 달래는 연하고 부드러운 마늘 향이 있고, 세발나물은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어쩐지 짭쪼름한 맛이 특징입니다. 이제부터 각 나물을 요리해서 하나의 비빔밥으로 만들거에요.

일단 달래를 제외한 채소를 각각 소금물에 데친 후에 찬물에 헹궈냈습니다. 데치면 채소의 색이 확 진해지잖아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구경하려고 해요. 특히 세발나물의 변화가 드라마틱한데요, 맑은 연두색의 불투명한 잎의 색이 진해지면서 투명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포토샵으로 보정을 하는 것 같달까요.....채도 높이고, 대비 조금 주고, 누끼 따서 배경 투명하게 한 다음에 이미지에 투명도 주는....그런! 

앗 딴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세발나물을 건질 때가 됐습니다. 물만 끓으면 데치는건 금방이에요. 바로 건져낸 후에 찬물에 씻어서 물기를 꼭 짜냈습니다. 뒤이어 취나물과 머위, 시금치도 동일하게 요리했어요. 

분명히 채소를 4개 데쳤는데, 왜 3개만 있느냐! 취나물은 데쳐지고 있었는데요 ㅋㅋ 제가 일단 느낌만 본다고 사진 찍어놓고 취나물은 완성되면 더해야지 해놓고 까먹었습니다. 취나물이 사진 밖 어딘가에 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여러분...

그와중에 저 접시가 아까랑 같은 접시인데! 무성하던 채소가 데쳐지니 세상 한줌입니다. 사진속의 채소 다 데친거거든요. 갑자기 마음이 조금 슬펐습니다. 아니 밑준비를 신나게 했는데, 왜 내 손에 남은 것은 한줌인가. 이것이 바로 나물 요리의 기본이자 고통입니다. 손질은 힘든데 데쳐놓으면 시상에 한줌 뿐인. 그래도 어쩌겠어요. 맛은 있으니까-

이제 각각의 채소를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 양념해야 해요. 세발나물은 바다 향을 살리기 위해 소금과 들기름 조금으로 간 했고, 시금치와 머위, 취나물은 참기름과 조선간장 약간으로 간을 했습니다. 달래는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양조간장으로 살짝 무쳤고요. 이 나물들을 다 각각 버무리려니 너무 설거지거리가 많아질 것 같아서 밥에 그릇을 담은 다음에, 먼저 볼에 달래를 살짝 무쳐 밥 위에 올리고, 한 번 헹궈낸 다음에 같은 볼에 세발나물을 무친 후, 차례로 시금치, 머위, 취나물을 무쳤습니다. 적당히 재료가 비슷한 것 끼리 묶으면 돼요.

그런데 사진은 또 잊고 말았어요.....사실 이 사진을 안 찍었다는 것을 레터를 쓰면서 알았네요. 제가 사실 지난 두 주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얼마나 정신이 없었느냐면요? 감자 계란국을 끓이는 것도 사진을 찍어두자! 해놓고 이 육수내는 컷 하나만 찍고 뒤의 과정을 모두 잊어버렸어요 😂 진짜 제발 정신 차려야 하는데, 이날 사실 욕심부려 혼자 요리를 너무 다양하게 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그래도 너무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여러가지 업무가 겹치면서 정말 근 2주를 제대로 잠도 못자서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채였거든요. 스트레스도 너무 심하고 너무 답답해서 화도 많이 냈어요. 이 요리를 하던 밤도 밤 9시에 집에 들어왔는데, 한 끼도 제대로 못먹었던 날이었거든요. 이시간에 꼭 요리를 해야하나 싶다가도 제 하루가 이렇게 남을 위해서만 쓰이게 두고 싶지가 않았어요. 나 좋을 일을 하나는 해야지. 그래서 칼을 꺼냈습니다. 잘 먹기라도 하자 싶어서요.

밥 위에 가지런히 봄나물을 올려냈어요. 쌀이라곤 보이지 않는 구조! 샐러드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비주얼!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비빔밥'이 아니니까 저는 딱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늘의 비빔밥의 특별한 점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는데요?

🥁🥁🥁 (두구두구) 🥁🥁🥁🥁🥁

바로 간장 비빔밥이라는 점입니다! 안동이나 진주 지역에서는 '헛제삿밥'이라고 해서 제사 음식을 평소에 차려내 간장을 넣어 비벼내는 요리가 있는데요. 어릴때 안동에 놀러가서 처음 먹어봤을 땐 너무 슴슴해서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니 종종 생각이 날 때가 있더라고요. 간장과 들기름만 넣으니 재료 자체의 맛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하고, 부담스러운 느낌도 덜하고요.

봄나물처럼 향이 좋은 것들을 담아놓고 고추장을 끼얹어버리면 사실 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잖아요. 고추장이 모든걸 압도해버리고 마니까요. 하지만 간장 비빔밥이라면 봄나물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았어요. 다만 양조간장이 아니라 청장이나 진간장을 넣어야 합니다. 양조간장에는 들큰한 맛이 있거든요. 청장과 들기름을 넣어 깔끔하게 비벼냈습니다. 생각보다는 간장이 많이 들어가지만 어떤 간장이냐에 따라 또 양이 달라지니까 맛을 보아 가면서 천천히 맛을 찾아보시는걸 추천해요.

순한 봄에 어울리는 순한 맛의 비빔밥이라, 고추장비빔밥을 싫어하셨던 분들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헛제삿밥에는 꼭 탕국과 전이 들어간다고 해요. (그것 말고도 사실 들어가는게 많지만...제가 호박전이 먹고싶었으니까 핑계 삼는걸로!) 그래서 일단 맑은국을 끓였어요. 두부와 달걀, 감자를 넣은 포근한 맛의 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을 끓이고 남은 두부를 두껍게 지져내고, 애호박도 지져냈습니다. 밀가루 옷을 입히고, 달걀을 입혀서 낮은 온도의 기름에 지글지글 익혀내는 일은 참 손이 많이 가지만 그래도 너무 맛있는 것을 어째요. 좀 고되긴 했지만 이렇게 차려놓고 나니 정말 헛제삿상같네요.

다행히 밤 12시가 되기 전에 식탁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비빔밥을 숟가락으로 쓱쓱 비벼내서 크게 한 술 떠 입에 넣었어요. '아, 봄이다.' 봄이네요. 봄은 이런 맛이었죠. 쌉싸름하고, 짭쪼름하고, 얇고 부드러운 맛. 늦은 밤 이 비빔밥을 꼭꼭 씹으면서 요리를 잘 해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에요. 꼭꼭 밥을 씹어 넘기고 나서 배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설거지는 내일 하기로 했어요. 물에 불리기만 하면 되죠~ 설거지의 클라이언트는 저고? 이 클라이언트는 일정 여유가 있다고 하네요. 일단 너무 힘들어서 저는 자러 갔습니다! 이만 안녕!

레시피를 이미 다 소개하기는 했지만요, 그래도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해봅니다. 첨언하자면, 달래나 돌나물(돈나물)은 생으로 넣고, 다른 채소들은 데쳐서 넣는게 좋습니다! 향이 연한 채소에는 소금 양념을, 향이 강한 채소에는 간장양념을 하는 것이 좋아요.

밥 1공기

다양한 봄나물

봄나물 양념: 소금, 참기름, 간장

양념: 국간장 + 들기름 

사실 나물을 직접 데치고, 손질하는 과정은 힘이 많이 듭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하는 버릇이 있는데요, 그래서 봄나물 손질하는걸 즐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마음을 단디 먹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긴 해요. 저는 구독자님이 봄나물을 꼭 드셨으면 좋겠는데 동시에 봄나물 손질을 시키는 것은 좀 망설여져요. 그래서 나물투데이 를 꼭 소개하고 싶어요! 당일 손질하고 데쳐낸 나물을 몇백그람 단위로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인데 퀄리티가 참 괜찮습니다. 종류도 다양하고요. 이미 손질까지 다 되어있는 봄나물 몇 개를 구입해서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모여서 비빔밥을 해드시면 어떨까요? 봄기운을 손쉽게 나눌 수 있을거에요!

이 계절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길이 있어서 소개해보아요. '시방 위험한 계절이여'라고 농담삼아 말할 만큼 아름답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그런 길이에요. 

여긴 바로! 미군기지 담장 길인데요, 녹사평에서 삼각지로 넘어가는 구간입니다.

이 길에는 정말 라일락이 가득 심겨져있어요. 어쩐지 이 길이 유독 그렇습니다. 저는 라일락이 피는 이 계절에는 이 길을 꼭 걸어봅니다. 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걸으러 가요. 흰 라일락과 연보라색의 라일락이 길 내내 피어있는데, 저녁에 이태원에서 술을 조금 마신 채로 슬슬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요, 정말로 없던 사랑도 생길 것만 같습니다.

밤이 되면 유독 라일락 향이 진해져요.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결국은 벤치에 앉아서 라일락 향을 즐기게 되어버리고 마는 저를 발견해요. 며칠 전에도 새벽녘에 이 길을 걷게 되었는데 쌀쌀한 밤공기 사이로 라일락 향은 얼마나 따뜻한지. 저는 이 길을 정말 좋아합니다. 미군기지가 개방되고 나면 이 나무들은 여전히 이 곳에 있을까요? 어딘가로 옮겨심어질까요?

이 길에는 제 많은 추억이 어려있는데, 가능하면 라일락나무들이 이 자리를 앞으로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 여름 이 길을 걸으며 내게 있었던 일들, 이 계절을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싶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이 길이 사라지기 전에 저와 함께 즐겨주세요. 

벚꽃 이야기를 한가득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벚꽃의 계절이 지나가버렸다니. 시간이 너무 빠릅니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네요. 시간이 너무 빠르고, 모든건 너무 찰나라는. 일부러라도 매일의 예쁨을 찾아내 즐기지 않으면 정말 나를 스쳐지나가버릴 것 같아서 요즘은 일부러 하늘을 보고, 나무 사이로 피어나는 새 잎을 보고, 계절의 음식을 찾아 먹습니다.

그래도 이제 본격적으로 식재료들이 쏟아져나올 거에요. 바삐 찾아먹을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렙니다. 올해는 저와 함께 맛있는 것을 많이 먹어요! 이렇게 4월의 첫 번째 레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