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추에이션십과 결혼, 그리고 성+인물
Zoe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안녕하세요, 에디터 Zoe입니다.


얼마 전 결혼을 하면서 주변에서 '결혼'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받았어요.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봤는지,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담은 없었는지, 경제적인 이슈는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참 많았습니다. 실제로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니 주변에서 결혼은커녕 연애도 시작하기 어렵다는 사람이 더 늘어나고 있는데요. '사귀자'는 말을 하기 어렵다며 진지한 관계는 맺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죠. 그래서 오늘의 레터는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우리의 영원한 숙제,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1.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으로도 충분해?
2. 전통적인 결혼의 종말?
3. 성+인물이 보여주고 싶은 세상

💘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으로도 충분해?

© Oxford Word of the Year 2023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 들어보셨나요? 최근 몇 년 사이 해외 MZ들 사이에서 트렌드가 되면서,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출간하는 옥스퍼드대출판부에서 이 단어를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는데요. 시추에이션십이란 말 그대로 상황을 뜻하는 'situation'이라는 단어와 관계를 뜻하는 'relationship'이라는 단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신조어입니다. 연인관계처럼 정서적, 육체적인 연결을 주고받지만,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는 관계에 놓여있을 때 이를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옥스퍼드에 따르면 이 단어가 처음 소셜미디어에 등장한 건 2000년대 초~ 2010년대부터였지만, 최근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이 단어가 폭발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해요. 데이팅앱의 확산과도 연관이 있을 거고요. 헌신과 의무 대신 욕구와 필요의 충족을 관계의 중심에 두고 있는 트렌드가 점차 번지기 시작한 건데요.


실제 구글 검색 추이를 보면 2020년대에 이르면서 이 단어의 검색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BBC에 따르면 틱톡에서 시추에이션십 태그(#situationship)가 붙은 영상은 8억 3900만 회 이상 조회됐고, 비슷한 태그(#situationships)의 영상도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고 알쏭달쏭할 때, 그리고 이 관계에 '남자친구/여자친구'처럼 공식적인 라벨링을 붙이고 싶지 않을 때, Z세대는 '시추에이션십'을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썸'이라는 단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추에이션십'에서는 연인관계로의 발전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관계 에스컬레이터를 표현한 그림. 이 단계를 밟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우리는 알고 있었죠. © Reddit

영국 BBC에서는 이런 회색지대에 놓인 Z세대의 연애에 대해 여러 차례 특집 기사로 다루기도 했는데요. 미국 미시간 대학 사회학과 엘리자베스 암스트롱 교수는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시추에이션십의 코어를 "관계가 더 발전하지 않을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암스트롱은 이를 '관계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저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처음 보는 두 사람이 만나 정서적, 육체적 교감을 주고받고, 데이트를 하다가, 사랑에 빠져 '커플'이 되고, 결혼의 과정을 거쳐 '부모'가 되는 전통적인 관계의 발전을 '관계 에스컬레이터'라는 단어로 표현한 겁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관계의 계단식 발전을 Z세대는 원하지 않으며, 커플로 명확히 명명되지 않더라도 적당히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거죠. 


BBC는 Z세대가 기존 세대에 비해 현실적 관점에서 관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자기 성취와 취향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헌신적인 연애에서 오는 의무감보다는 시추에이션의 '자율성'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기후 위기, 인플레이션 급등, 정치적·사회적 격변과 함께 불안정한 경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도 스스로의 직업적, 재정적 안정성이 우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만일 헌신적인 관계가 개인적 안정성에 방해가 된다면, 유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겁니다. 암스트롱 교수는 이런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시추에이션십인지 아닌지 판단해볼까요? 시추에이션십 리트머스 테스트. © tweak
재미있는 건 전통적인 관계맺기를 거부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라는 시추에이션십조차 그들 사이의 관계를 라벨링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어라는 겁니다. 온라인에서는 본인이 시추에이션십에 놓여 있는게 맞는지 자가진단 테스트를 하려는 트렌드가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시추에이션십에 적극 찬성하는 건 아닙니다. 해외 반응도 동조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리는 추세에요. "시추에이션십이라고 정의하는 남자를 만난다면, 그 사람은 그냥 당신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트윗이 여러 차례 리트윗되기도 하고, 시추에이션십으로부터 벗어나는 팁을 주는 틱톡커들도 수없이 생겨나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건, 이게 과연 일부 사람들이 향유햐는 문화냐에 대해 논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이 흐름의 기저에는 과연 어떤 원인이 있는 걸까요? 그리고 정말 우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먼 나라에서 생긴 현상에 불과한 걸까요?

💍전통적인 결혼의 종말?

최근 발표된 국가통계포털(KOSIS)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 사이 혼인 건수가 약 40% 정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지난해 혼인 건수가 잠정 19만 3,673건으로 집계됐는데, 10년 전인 2013년에는 32만 2,807건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작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23년 3분기 혼인 건수는 4만 1,706건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혼인 건수 추이는 매년 하락하고 있습니다. ©뉴시스

언론혼인 건수가 큰 폭으로 줄어든 주요한 이유 중 하나로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꼽았습니다.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의 비율이 줄고 있다는 건데요.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13세 이상 인구 중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2012년 20.3%에서 2022년 15.3%로 줄었고, 이에 비해 '결혼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33.6%에서 43.2%까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런 인식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원인에 기반합니다. 실제 젊은 세대가 꼽는 '결혼하지 않는 이유' 1위는 경제적인 이유로 나타났는데요. 2022년 사회조사에서 20대의 32.7%, 30대의 33.7%, 40대의 23.8%가 혼수비용·주거 마련 등 결혼자금이 부족해서' 결혼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실제 기존 연구들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이 둔화될수록 혼인율이 감소한다는 결과가 다수 보고되기도 했으니까요.


이는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트렌드는 전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어요. OECD 국가로 한정하면 모든 나라에서 혼인율이 감소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하면 1974년 대비 2018년에는 혼인율이 6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득구간별 혼인율 추이 비교 © CNBC

CNBC가 소개한 Brookings Institute의 2020년 연구에서는 이런 추세가 소득구간별로 차이를 보인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고소득층의 경우에는 최근 40년간 혼인율에 크게 차이가 없게 나타났지만, 중소득과 저소득층의 경우는 급감하는 추세를 보였다는 것이죠. 중소득층의 경우 66%, 저소득층의 경우 3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경제성장률이 둔화되어 중소득층과 저소득층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축적하기 어려워질수록 혼인관계에 뛰어들기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시추에이션십'의 배경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인데요. 결국 직업적, 경제적 안정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젊은 세대는 의무와 헌신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관계 맺기를 꺼린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결혼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경제적인 이유뿐 아니라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하고, 개인의 커리어 발전에 더 초점을 두다 보니 결혼을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하죠. 시추에이션십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결혼이 아니라 '커플'로서 가져가야 하는 의무와 헌신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트렌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결국 특정한 단어로 '라벨링'되고 단단히 묶인 상태에서 져야 하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죠. 


누군가는 이게 무책임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물론 이 트렌드에 마냥 동의하는 것은 아니에요. 얼마 전 결혼을 하기도 했고, 안정적이고 탄탄한 관계에서 오는 충족감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이 흐름이 결국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세상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성+인물》이 보여주고 싶은 세상

그런 의미에서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의 《성+인물: 네덜란드, 독일편》은 생각해 볼 만한 점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는 저에게 충격 그 자체이기도 했거든요. 신동엽, 성시경이 출연하는 넷플릭스의 《성+인물》 시리즈는 다양한 국가에서 성과 연애, 사랑과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예능 프로그램인데요. 2023년 일본편과 대만편을 시작으로, 올해에는 네덜란드/독일편을 공개했습니다. 

성+인물 네덜란드/독일편 포스터 © 넷플릭스

해당 국가에 MC들이 직접 찾아가서 실제 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체험까지 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만큼 현장감과 실제감이 어마어마한데요. 시리즈 초기 일본편이 공개되었을 때는 일본 AV산업과 호스트바 등 성착취 문화를 미화시킨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시즌 2와 3으로 이어지면서부터는 다양한 성 관련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평가를 더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특히 제 눈길을 끈 건 6번째 에피소드인 《한 침대에서 셋이서 잡니다!》 였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다자간 연애인 '폴리아모리(polyamory)'에 대해 소개하면서 실제 독일에서 폴리아모리로 살아가는 커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인터뷰하는 과정을 담았어요.


폴리아모리란 한 번에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에 제한을 두지 않는 다자간 연애를 말합니다. 바람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일부일처제에 익숙한 모노가미(monogamy)를 믿는 사람들의 주장이라는 게 폴리아모리스트들의 의견입니다. 폴리아모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다자간 연애 및 결혼을 모두 긍정하며, 로맨틱 관계에 놓인 모두를 하나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생활한다고 해요.


실제로 이 에피소드에도 폴리아모리를 통해 하나의 가족으로 맺어진 한 여성과 두 남성, 그리고 그들이 낳은 두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일부일처제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에 대해 가감없이 답변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갖고 있는 상식이 전 세계 모든 곳에서 통용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네덜란드의 섹스워커, 독일의 나체주의자, BDSM플레이어, 베를린 클럽 퀸/킹 등 다양한 사람들이 시리즈에 출연해 각자의 삶의 방식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번 네덜란드/독일편에서 특히 눈에 띈 건, 서로 다른 생활방식에도 불구하고 현지 출연자들이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본인은 주류가 아니며, 네덜란드/독일에서도 이런 삶의 방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메시지가 시리즈 전체에 깔려 있었습니다. 

대만 청춘들의 연애는 어떻게 시작될까요? © 성+인물 대만편 | 넷플릭스

앞서 말씀드렸던 BBC와의 인터뷰에서 암스트롱 교수는 시추에이션십이 "선택의 폭을 다양화"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의 다른 부분도 잘 챙기면서, 낭만적· 성적 정체성을 여행하려는 Z세대에게 최선의 선택지일 수 있다는 거죠. 시추에이션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는 어렵지만, 변화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기반으로 젊은 세대가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추에이션십과 같은 가벼운 관계만 맺는다면 정서적, 심리적 문제를 겪게 될 거라는 '꼰대'같은 멘트는 잠시 넣어두겠습니다. 결국 연애든 사랑이든 결혼이든,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에 기반할 수밖에 없고 우리 모두의 선택은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결혼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소수가 되고, 조금 더 느슨한 관계가 다수가 되는 세상이 온다면 오히려 우리는 이 '느슨한 관계'를 어떻게 사회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다양성의 모습들이 낯설지만 반갑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편집/윤문 | 나나

당신이 불안한 "진짜" 이유 5가지 | 너진똑 NJT BOOK

에디터 <Zoe>의 코멘트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 있나요? 왜 이렇게 불안한지, 이유를 알고 싶었던 적은 혹시 없었나요? 유튜버 너진똑은 이 영상을 통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왜 불안한지, 그리고 불안감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노력하고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였던 건 아니었을까요. 이 영상이 정답을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영상을 다 보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질거에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오늘도 여러분의 평안한 일상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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