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평가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마치 먹구름이 생기면 비가 오고 비가 오면 옷이 젖는 게 당연한 이치처럼 말이다. 


내가 좋아서 그린 그림들에 어떤 평가가 붙을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그게 3살 즈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엄마는 자잘한 육아 스트레스와 유아교육을 모두 창작 행위로 해소했다. 엄마 혼자서는 아빠가 쓰던 인두기를 가져와 돌아다니는 나무판에 그림을 그렸고, 동생과 나의 한글 교육을 모두 그림으로 하기도 했다. 쌀에 물감을 풀어 촉감놀이를 하고 외갓집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만두를 만든다는 핑계로 거실에 큰 상을 펴고 밀가루로 작은 인형을 만들어주셨다. 생각해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에도 항상 창작 행위가 함께했다. 사촌과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흰 벽을 매직펜으로 낙서하는데 시간을 보냈고 지난 달력의 뒷면을 뜯어 그림을 그리기 바빴다. 9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자극적인 놀이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외갓집이나 우리 집에도 TV에는 케이블채널이 잘 나오지 않았고 나름 자극적이라고 느껴지는 장난감이라고 할 것은 엄마가 누군가에게 받아온 짝이 없는 대량의 레고 조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즐거운 창작 기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다 지겨워지면 커다란 원형의 레고 바구니를 뒤집어 아무거나 만들었다.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로봇도 만들었을 정도로 레고만 한 장난감이 없었다. 규칙이 생기면 없애고 내 맘에 드는 규칙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 수 있는 레고가 가장 좋은 자극제였다. 


어린 시절의 창작에는 후한 평가가 붙는다. 원을 그려도 점으로 사람 눈코입을 대신해도 모두 잘 그린다 칭찬한다. 마치 아이가 한 손에는 종이와 펜을 들기만 해도 칭찬할 준비를 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굉장히 잘 그린다 착각했었고 그 착각은 운 좋게 중학생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람들의 후한 칭찬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 입시를 시작하면부터였다. 물론 그전부터 이미 엄마에게서 오던 평가는 야박해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인물화를 공부해야 하는 시점이 온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엄마의 평은 꽤 날카로워서 ‘엄마 이건 예술이고, 나는 일부러 그렇게 그렸어’라고 하지 않는 이상 끝낼 수 없다. 물론 엄마는 하고 싶은 평가를 시작하기 전에 ‘또 너는 일부러 그렇게 그렸다고 하겠지만’이라고 하기 때문에 나의 저 말은 온전한 방패가 되지 못했다. 


중학생 때 내 그림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을 한 친구와 크게 싸운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그릴 생각도 없지만 어쩐지 관심은 많은 친구여서 가깝게 교류하던 사이였다. 무언가 느낌만을 덧댄 인상평가가 주를 이루어서 작가적 태도가 자리 잡을 시점의 나에게는 꽤나 거슬리는 평가였다. 보통 평가를 원할 때는 ‘평가자가 예술적인 권위가 있는 사람인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 하는 평가인가?’라는 전제가 들어가야 받아들이기 쉬워지기 때문에 한창 사춘기 시절에는 그 항목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평가를 극도로 싫어했다. 미술입시를 할 때 학원 선생님을 괴롭히며 질문하고 평가받으며 평가에 절여진 삶으로 들어섰고 20대를 지나고 나니, 평가에 대해 전반적으로 관대해지는 순간이 왔다. 미술대학을 거치며 나름의 권위자 대학 교수들의 평가를 받는 삶으로 4년을 보내니 든 생각은, 누가 무슨 평가를 하든 내가 알아서 필요한 것만 주워 먹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용케 살아남아 현재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길 가는 사람에게도 피드백을 받고 싶을 정도로 목마른 사람으로 성장할지 그때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인상평가도 좋고 방향 조언도 좋을 정도로 지금의 나는 거의 모든 평가를 원한다. 이제는 어떤 평가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머리를 맞은 듯한 평가를 듣고 싶기도 한 것일지 도 모른다. 평가란 애정이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것은 남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좋고 다른 인상을 말해줘도 도움이 된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가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조언과 평가를 하지 않기도하는데,  발전을 원하는 사람은 작은 실마리에도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