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늦었습니다. 사실 ‘없는 생활’의 마감 시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2주에 한 번,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아침 사이에 발송한다는 정도의 느슨한 원칙만 있거든요. 저는 대개 새벽에 편지를 써서 보낸 다음 자곤 하는데, 사람마다 읽는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신기합니다.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다가, 지구 저편 어딘가의 한낮에, 출근한 직후 자리에 앉아서, 혹은 점심시간의 여유를 기다렸다가 읽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갑기도 하고 책임감이 좀 더 생기기도 합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제가 어제 이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휑하면서도 어수선한 책상 앞에 앉아 있어요. 살면서 이렇게 큰 규모의 이사를 해본 건 처음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이사는 엄마의 주관이었고, 잠시 친구와 같이 살 때는 짐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렸듯, 이번에는 책 정리부터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다 마치지 못하고 상자만 바꿔서 다시 들고 왔지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말로 유명한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책이나 방송을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없습니다. 봐도 어차피 정리하지 않을 걸 아니까요. 그런데 몇 달 전 ‘그’ 곤도 마리에도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정리에 관해 어느 정도 포기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데 집중한다는 기사를 읽고 인생이란 참 재밌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는 인생을 정리하는 경험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삼 느끼게 만드는 일 같습니다. 저는 물건을 많이 사는 성격은 아닙니다. 문제는 온갖 것에 다 설렌다는 점이죠.

어디선가 계속 슬그머니 나오는 먼지 쌓인 상자를 열어보고 버리는 대신 새 상자로 옮기기를 택할 때마다 ‘너도 참 너다’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 묶음(이건 버리기 아깝긴 하죠),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개 브로치(비싼 건 아니지만 추억이니까요), 물감으로 색칠한 지점토 목걸이와 어딘가에서 주운 전복 껍데기(가 담겨 있는 나드리 향수 상자),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열렬히 주고받은 쪽지(윤상을 사랑했던 민경아, 혹시 요즘 라이즈에도 관심 있니?), 故 신해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인이던 전람회가 출연한 방송분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역사적 자료니까 일단 보관). 그리고 ‘H.O.T. nCD’라고 적힌 연보라색 압축 파우더(언젠가 로또 1등 당첨되면 덕후 박물관 세워서 기증하려고요.) 등을 하나도 버리지 못했거든요.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중에 다시 보면 재밌지 않을까? 이것도 어디 쓸 데가 있지 않을까? 그중 가장 원대한 꿈은 제가 폴라로이드에 사인받은 연예인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면 그 사진을 <전당포 사나이들>에 보내서 거액에 파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성공하시길…….

그나저나 오늘은 이만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은행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달려가 급한 업무를 처리한 다음 창문에 붙일 시트지와 분무기, 우산꽂이, 행거, 주전자, 발 매트를 사야 하거든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책더미에서 다음 주 과제에 필요한 책들을 구해내고 노트북과 모니터를 연결하고 이사하다가 망가진 독서대도 수리하고 뒤죽박죽이 된 서랍장을 정리해야 합니다. 바닥 물걸레질은…일단 좀 견뎌보고 시간이 나면 해야겠어요.

바람이 차가워졌습니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을 때가 되었네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