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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반복되지 않을 한 해가 저물고,
단 한 번뿐일 한 해가 다가옵니다.
뿌듯함과 허무함, 설렘과 두려움이 오가는 유난히도 소란스러운 시기.
끝과 시작, 그사이에서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12월 2주차 #35 인터뷰ㅣ작가 유지혜의 문장들
12월 3주차 #36 아티클ㅣ문장에서 시작하는 한 사람만의 이야기 by 작가 오은
12월 4주차 #37 인터뷰ㅣ작가, 누데이크 아트디렉터 박선아의 문장들
12월 5주차 #38 큐레이션ㅣ디스커버리 + 텍스터의 기록

문장에서 시작된 한 사람만의 이야기입니다.
귀를 기울여 주세요, 그리고 함께 읽어주세요.

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문학과지성사
원고를 보내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수정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아직은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보낸 원고를 고치지 않는다. 다시 열어보지도 않는다. 토씨 몇 개를 넣거나 빼고 몇몇 단어와 어미를 바꾸어 쓰는 일,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방금 보낸 원고는 그 상태로 발송되었고, 당시의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읽으면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울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원고를 보내기 전의 나와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나는 변화했다. 
 
두 번은 없다. 원고를 보낸 다음, 나는 중얼거린다. 말 바꾸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깨끗하다’를 쓸지 ‘끼끗하다’를 쓸지 고민하던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시계태엽을 돌려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깨끗하다’를 선택했다. 내가 묘사한 풍경에 생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끼끗함은 깨끗함에 생기가 더해진 개념이다. 그렇다면 생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 아닌가. 실제로 풍경에 생기가 서려 있었는데, 나 자신이 무기력하여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나는 원고를 고치지 않는다. 두 번은 없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분량이 길지 않은) 웬만한 산문은 앉은자리에서 다 쓰려고 한다. 몇 시간만 지나도 그때의 리듬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한 번 깨진 리듬을 되찾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와 점심 먹고 산책을 한 직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씻은 다음의 심신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다음 날 같은 시각에 이어서 써보기도 했지만,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그사이 나는 약간이라도 달라지고 말았다. 언젠가 나는 이를 가리켜 일종의 ‘오염’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 주변이 가득했던 시절이다. 나는 오염되지 않기 위해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오염된 나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절도 두 번은 없다. 없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번 관계가 틀어지고 나면, 제아무리 극적인 화해를 할지언정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지난날처럼 마주 보고 스스럼없이,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기 쉽지 않다. 무방비 상태로 웃을 때조차 의식의 한 부분은 상대를 신경 쓰고 있다.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고 있다면, 평소대로 행동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나를 가장하거나 과장하는 수밖에 없다. 그사이 나와 상대 사이에 모종의 거리감이 생긴다. 그러므로 두 번은 없다는 말은 단순히 횟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시간에 더욱 깊게 꽂힌다. 

하물며 사랑은 어떻겠는가. 어떤 시간에 함께 깊숙이 발 들인 사람들이 과연 행복했던 그때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마음을 상하게 된 계기가 있었고 서로에게 등 돌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랑의 깊이가 길이를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새로 시작하자고 다짐할 때조차 우리의 마음은 이미 가장 뜨거웠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이 간극이 사랑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는 있어도, 같은 사람을 두 번 사랑하긴 힘들다. 상대에 대해 잘 알기에 미리 기대하고 벌써 실망한다. 사랑은 머물지 않는다. 꿈틀거린다.

그리움을 이야기할 때 ‘사무치다’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라는 뜻이다. 사무침 속에는 깊이와 거리가 둘 다 있다. 지금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공간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워할수록 역설적으로 현실에 가까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을 감각하기 위해 나는 습관적으로 찬물을 들이켠다. 여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걷는 발에 부러 힘을 준다. 현실은 공허하고, 공허함은 안온함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매주 어김없이 돌아오는 월요일이지만, 오늘의 월요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두 번은 없는 월요일이다. 과거에 매여 있어도, 미래를 꿈꿔도 누구나 지금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사실만큼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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