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힘들 때 무엇을 하시나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 글의 다음 문장에는 으레 글쓴이가 힘들 때 하는 무언가가 제시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 글엔 그것이 없을 예정입니다. 저는 힘들 때 하는 무언가가 딱히 없기 때문입니다. ‘힘든 때’는 많지만, 그때 하는 무언가는 없습니다.


굳이 따지면 좋아하는 특별 음식을 먹는 것 같기는 합니다. 양꼬치 혹은 마라탕이 그 음식입니다. 같이 먹을 사람이 있을 때는 양꼬치, 없을 때는 마라탕에 양고기를 많이 넣어 먹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들은 그렇게 쉽게 먹을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둘 다 아무 때나 재빠르고 간편히 먹을 수는 없기에, 힘든 순간을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거죠. 특히 마라탕의 경우는 레시피 자체가 복잡해서 집에서 해먹을 엄두도 안 나는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말하다 보니 정말 아쉬운 것이 힘들 때 하는 것이 없다는 점인지, 아니면 마라탕을 쉽게 못 먹는다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는데요. 관련해서 예전에 한 패션 잡지의 특집으로,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진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조수미 성악가, 이준익 감독, 김창완 가수를 비롯한 문화계 ‘어른’들이, ‘살면서 마주한 크고 작은 절망과 그 절망을 밀어내는 단 한 가지’에 대한 답을 제시했었던 글이었는데요. (글 읽기) 그 글에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답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언젠가,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게 질문했다. 당신은 힘들 때 어떤 영화를 보나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럴 때는 영화 안 보는데요. 나는 영화를 볼 때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때마다 긴장을 느낀다.



[NO.36]


힘들 때 요리하는 사람과 마라탕 먹는 사람


2022년 11월 12일



고백하자면 저 또한 힘들 때 영화를 보지 않습니다.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저 역시 영화를 보는 것은 긴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를 보고 드는 생각이나 느낀 점을 항상 글로 풀거나, 컨텐츠화 하느라 피곤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질문들로 뇌가 분주히 활동하는 것만큼은 ‘항상’이므로, 영화 관람은 웬만해선 머릿속이 백지처럼 비워져 있을 때에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저 자신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보여질 영화 입장에서도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전 연인을 아직 잊지 못한 상태이거나, 혹은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상태에서 다른 새로운 사람과 만남을 시도한다는 것이 상대에게 예의가 아닌 듯한 느낌이랄까요. 고작 영화 한 편 보면서 이러는 제가 조금 유난스러운 것 같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우연히 본 영화에서 갑작스러운 위로를 받은 적은 많습니다. 이 또한 ‘만남’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우연히 탑승한 택시의 기사님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한 기대 없이, 혹은 일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우연으로 만나게 된 영화로부터 따뜻한 무언가를 느끼게 되는 경험 말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우연히 만난 작품은 <더 베어>라는 드라마입니다. 아니 <더 베어>의 주인공 카미를 만났습니다. 카미도 역시 많이 힘든 상태였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형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카미가 더 답답한 것은 카미가 이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형은 카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고, 시카고에 있는 작은 식당 하나만을 남겼습니다. 뉴욕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유명한 셰프였던 카미는 그렇게 형의 식당 ‘더 비프(The Beef)’를 맡아 운영을 시작합니다.


<더 베어>는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는 8부작 드라마입니다. 한 화가 20분에서 4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리 길지 않은 호흡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게 된 이유는 이 작품의 소개 글 청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제목을 보고 디즈니의 동물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포스터를 보니 사람들이 앞치마를 입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남자의 표정과 이마를 짚고 있는 손동작을 보고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길래 손에 요리 기구를 쥐고 있는 대신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 이 남자의 사정을 알게 되니, 정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힘들 때 영화를 보지 않는 것처럼, 이 요리사 역시 힘들 땐 요리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는 요리가 완전히 넘쳐나는 드라마입니다. 카미는 놀랍게도 힘들 때 요리를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항상 신경질적이고 같은 주방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긴 하지만, 그래도 요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형의 유산인 ‘더 비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자신이 일했던 레스토랑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체계가 하나도 잡혀 있지 않는 보잘것없는 곳이지만, 카미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며 꾸준히 무언가를 시도합니다. 이 작은 식당 따위 없는 것처럼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그냥 다 버리고 자신을 원하는 고급 식당에서 많은 돈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식당을 차근차근 꾸려 나갑니다. 마치 이 식당이 대박이라도 나면 형으로부터 뭔가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처럼. 혹은 이 식당마저 버려버리면, 형과 자신을 잇는 마지막 연결 고리가 끊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두 가지의 재미 포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여느 ‘식당’ 드라마들처럼, 엉망이었던 한 식당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방의 여러 개성 있는 인물들 간의 갈등과 각자의 사연이 자아내는 스토리가 꽤 볼만한 드라마입니다. 성격이 불 같은 카미의 사촌 요리사,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만은 최고인- 그리고 그 열정이 때로는 단점이기도 한 요리사, 초코 케익 담당이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도넛을 연구 중인 요리사, 형의 예전 식당 운영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카미의 방식을 탐탁지 않아 하는 붙박이 요리사 등등이 모두 주연 못지않은 매력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 명만 빠져도 잘 굴러가지 않고 삐걱댈 분주한 주방,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던 일류 셰프인 카미 또한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이 드라마의 두 번째 매력 포인트는 카미의 극복 과정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카미에게 있어서 이 식당은 ‘공’이자 ‘사’입니다.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형에 관련한 무엇, 아니 쉽게 말해 그냥 형 그 자체입니다. 카미는 ‘형’을 자신의 방식대로 바꾸어보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것은 마침내 극복해 내지만, 또 어떤 것들에 관해선 마침내 형의 방식을 인정하고야 맙니다.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것과,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의 유산을 치열하고 집요하게, 가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지지고 볶던 카미는, 시즌1의 피날레에서 형이 식당에 숨겨 놓았던 선물을 아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 선물을 통해 카미의 아픔이 완전히 치유됐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엔딩에서 볼 수 있는 카미와 식당 ‘더 비프’의 따뜻한 변화는 <더 베어>의 시즌2를, 시즌2의 카미를, 아니 카미의 시즌2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카미도 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나 자신의 다음 시즌을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재밌는 영화 한 편이, 맛있는 마라탕 한 그릇이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음 뭐 일단 그냥 맛있잖아요. 이 맛있는 거 다음에 또 먹고 싶잖아요. 다음 마라탕이 기대되잖아요. 먹고 또 먹다 보면 언젠가 세상이 숨겨 놓은 선물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양꼬치 드실 분을 찾습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개봉 영화 추천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자신의 '사이즈'를 알기 위한 두 여자의 필생의 급발진"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가장 뚝심 있고, 그 에너지가 무시무시한 영화입니다.
모녀를 '모녀'가 아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구도로 표현해낸 감독의 시선이 돋보였습니다.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단연 베스트입니다.
(아마 다음 주에 다룰 수도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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