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바비>를 관람했습니다. 개봉 전 공개된 티저 트레일러부터 소소한 화제를 일으킨 영화였지요. 추억 어린 인형 '바비'의 비주얼을 실감나게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서 현대 사회의 모순을 코믹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희극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지만, 충분히 볼만 했습니다. 2시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미처 다 넣지 못해서, 메시지가 잡아먹은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현대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와 '그냥 켄'일 뿐일 켄이 사는 바비의 세계는, 인간의 현실 세계가 역전된 세계입니다. 바비의 세계에서 기득권의 삶을 누리던 바비가, 현실 인간의 세계에 와서 겪는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거꾸로 '가부장제를 발견한 켄'이 혁명을 일으킨 바비의 세계를 그려내죠.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착취하는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함께 화합하자'는 다소 진부하지만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블랙 코미디, 아니 핑크 코미디의 방식으로 유쾌하게 그려내죠.
영화 <바비>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서구 문화권은 물론 멕시코, 브라질, 대만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여성 감독 최초로 수익 10억 달러 돌파, 2023년 최고 흥행작 중 하나로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여성인권운동과 맞물려 흥행을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미션 임파서블> 최신작과, 한국영화 대작인 <밀수>에 스크린 수가 밀려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있죠.
단순히 스크린 수에서 밀렸다기에는, 온라인 상에서 영화 <바비>에 가해지는 허수아비 때리기 식의 국내 커뮤니티 여론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가 인류 보편적으로 다 함께 화합하자는 이야기와, 모든 성별을 착취하는 가부장제 시스템의 모순을 다루고 있고, 심지어 과격한 페미니즘은 지양하자는 관대한 메시지까지 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페미니즘의 'ㅍ'만 들어가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고, '<명탐정 코난>보다 흥행 못함'이라며 국내에만 한정되는 조롱을 하며 스스로를 갈라파고스처럼 고립시키는 한국 커뮤니티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인종, 출신, 종교, 성별, 성적 지향 등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제는 이제 더이상 윤리나 당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사자들이 진행하는 사회 운동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자본가와 기업들이 앞장서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녹여낸 많은 영화, 음악, 게임,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가 생산되고 있고, 활발한 투자와 수익 활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품질이 들쑥날쑥하여 간혹 '재미없고 못 만든' 콘텐츠가 나오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주류 트렌드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팩트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선진국과 거대 자본이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흐름은 자연스럽습니다.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성장률이 더뎌지고, 동력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선진국은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200년 전에는 그것이 식민지였고, 100년 전에는 그것이 세계전쟁이었고, 50년 전에는 금융산업이었고, 30년 전에는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시장이었고, 20년 전에는 월드와이드웹이었고, 10년 전에는 모바일이었죠. 2020년의 이 시기에 새로운 경제 주체를 받아들이고, 산업의 구조를 개편하고, 새로운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대한 흐름으로서, 선진국들과 거대 자본이 선택한 먹거리는 '기후와 다양성'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경제 전문가도 사회과학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저의 이 부족한 글에 많은 이견이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들이, 영화가, 드라마가 PC에 잠식 당했다'며 조롱하기에 바쁘지만, 제 개인적인 시선에서는 지금 세계를 휩쓰는 거대한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고 뒤쳐지고 있는 모습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다양성과 환경 이슈는 당위적인 논의를 넘어 실제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소비자의 소비 기준이 되고, 수익을 창출해내는 '먹거리'인데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우스갯소리로 '정부기관보다 정보력이 뛰어나고 경제 분석력이 뛰어난' 삼성이 앞장서서 이 'PC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2023년 인사 발표에서 국내 기업 중 최다인 65명의 여성 임원을 임명했고, 이는 전년도에 비해 10명 증가한 숫자입니다. 아직 전체 임원의 10% 수준이고, 갈 길이 아직 멀긴 하지만, 기업 지배구조에서 다양성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죠.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서는 다양성을 논의하는 건 사치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십 년 전에 안착한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해결책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걸요. 최소한의 기준인 ILO 권고사항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절절 매며, 세계적인 트렌드에서 수십 년 뒤쳐져 있는 한국에서는, 최신 트렌드인 '기후와 다양성'은 남의 이야기로 느껴질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현 상태를 비판하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을 독려하기엔 사실 제 역량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점점 늙어가고, 뒤쳐져서, 서서히 죽어가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하면 시민들과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공감대를 이끌어내어 한 단계 진보할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효과를 보았던 방법은, 현실로 나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만남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모니터 너머로 텍스트를 보며 냉소와 조롱과 비난을 날리던 것이, 사람과 만나 서로의 얼굴을 보면 교감과 공감을 할 수 있더군요. 그래서 우리 종로구위원회가 그런 만남과 대화의 장이 되고 있는 모습이 즐겁습니다. 서로 존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위로하고, 토론하고,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되어가는 종로구위원회의 공간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공간을 소중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 참석자가 많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고요. 이런 공간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라는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