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친배우미, 안녕하신가요?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인 12월로 접어들었습니다. 날씨도 한층 추워졌고 슬슬 한 해를 마무리하며 2022년은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보게 되네요. 이번 ‘마친배우미’ 스물일곱 번째 소식의 주인공은 바로 유자(유예나)입니다. 유자는 더배곳에 다니면서 『한국의 90년대 전시도록』, 『달날파티』를 작업한 주인공이에요. 2020년 2월 배곳을 마친 후에는 양혜규 작가와 함께 일하며 서울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평면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어요. 시적연산학교를 만든 최태윤 작가와도 협업했고요. 현재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앞으로 회사에 들어가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려고 준비 중이랍니다. 흥미진진한 유자의 이야기를 뉴스레터에서 확인해보세요!  

안녕하세요, 유자. 오랜만이에요! 

해리,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가 지난 2019년이었던 것 같아요. 더배곳은 언제 졸업했어요?

2020년 2월에 졸업했답니다.

유자가 더배곳 몇 기였죠?

매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도 헷갈리는데요. 하하. 7기 혹은 8기 같아요.

예전에는 들어온 기수로 자신을 소개했는데, 요즘은 졸업한 해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 같아요. 

아, 맞아요. 아마 저처럼 다들 헷갈려서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웃음)

아무튼 졸업 무척 축하합니다! 이제 바야흐로 2022년이 끝나가는 때인데요. 졸업 이후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청해봐도 될까요? 긴밀한 소식통에 의하면, 최근 PaTI에서 발간한 굉장히 독특한 책을 디자인했다고 들었어요. 이름도 엄청 특이하던데요? 『돠이꼬그라띠몸것』이라고… 

책 이름이 참 독특하죠? PaTI 한배곳 친구들이 국립현대무용단과 함께 진행한 동명의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이에요. 수업의 주제가 ‘유행어’였는데요. 여러 유행어 중에서 ‘야민정음’이라고, 한글의 자모음이 지닌 형태적 유사성을 활용해서 재미있게 표현하는 방식이 있거든요.

파티×국립현대무용단 연계수업 기록집 『돠이꼬그라띠몸것』, 2022

개인적으로 자주 쓰진 않지만, 예는 잘 알고 있어요. ‘멍멍이’를 ‘댕댕이’라고 표현하는 게 딱 야민정음이죠? 

맞습니다. 수업 이름에도 야민정음을 활용했어요. ‘돠이꼬그라띠몸것’은 사실 ‘타이포그라피몸짓’이라는 단어에요. 이 수업은 배우미와 스승이 사회의 유행어와 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몸과 움직임을 통해 현실에 구현하고, 최종적으로는 쇼케이스에서 퍼포먼스를 하며 대중에게 선보이는 과정을 거쳤는데요. 그 시작부터 끝까지 기록한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책이 기획되었어요.

듣기만 해도 흥미롭네요. 호신용 도구 대신 써도 무방할 정도로 책이 되게 단단하고, 세로로 긴 비율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책의 판형은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를 스프레드로 펼쳤을 때 정사각형 형태가 나오도록 의도했어요. 수업 중에 ‘몸 글자’라는 걸 만들었는데요. 특정 포즈를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약속한 후 이를 기반으로 단어를 표현했어요. 이 몸 글자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가 정육면체에서 시작했거든요. 3차원의 정육면체를 2차원의 지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상징적으로 정사각형을 판형으로 제안한 거죠. 사진 비율이나 그리드 레이아웃도 정사각형을 기준으로 설계했고요. 책이 단단한 이유는, 기록집이라는 특징을 너무 무겁거나 형식적이거나 딱딱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 출발했어요. 표지에서 내지로 넘어갈 때 느낌이 너무 급격하게 바뀌기보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느낌을 추구했는데요. 이를 위해서 내지 용지를 좀 더 두껍게 설정했어요. 그래서 단단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사실 매우 주의 깊게 의도한 결과는 아닌데, 특징으로 느낀다니까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책의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해야겠네요. (웃음)

PaTI×국립현대무용단 연계수업 기록집 『돠이꼬그라띠몸것』, 2022

유자를 보면 『한국의 90년대 전시도록』이라는 책을 잊을 수 없어요. 유자가 디자인해서 PaTI에서 발간했는데, 《한겨레》에서 선정한 ‘2019년도 올해의 아름다운 책’에 뽑혔잖아요. (웃음) 

이렇게 말로 들으니까 되게 쑥스럽네요. 사실 그 책이 아름다운 책으로 뽑힌 이유에 북 디자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책이 나오기 몇 년 전부터 그래픽 디자인과 관련한 여러 책이나 전시에서 ‘아카이빙’이라는 방법론을 많이 활용했기에, 그래픽 디자인 신에서도 자기 결과물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공감해서 반응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간단히 말하면 콘텐츠의 힘이 컸던 거죠. 그리고 그 책은 전가경 스승이 진행했던 더배곳 수업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함께 수업에 참여한 민선, 야위엔과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랍니다. 자료 수집과 편집도 함께 했어요. 책의 본문 디자인은 제가 많이 참여했지만, 책 표지에 들어가는 세심한 연대표는 야위엔의 공이었죠. 정말 말 그대로, 공동 작업이었어요.

그 뒤에도 PaTI에서 발간한 책의 북 디자인을 맡지 않았나요? 

두루미(오진경) 스승이 진행했던 세미나 내용을 묶은 『달날파티』인데요.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주목할 만한 석사 논문을 쓴 주인공을 초대해서 연찬을 마련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묶었던 의미 있는 결과였어요. 근데 이것도 다른 배우미와 같이 작업한 터라…사실 지금까지 말한 PaTI 출간물 중 오롯이 저 혼자 디자인한 건 『돠이꼬그라띠몸것』 정도에요. 이 책도 수업을 기록하는 과정에 함께한 다른 배우미의 기록물에 기대어 작업한 부분도 많아서 온전히 혼자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죠.

『한국의 90년대 전시 도록 xyz』, 2019
『달날파티』, 2020

PaTI를 졸업한 이후, 독특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다 아는, 무척이나 유명한 국제적인 아티스트의 스튜디오에서 일했잖아요…? (웃음)

하하. 처음에는 ‘그’ 스튜디오에 정식으로 소속되어서 일한 건 아니었어요. 졸업 직후 양혜규 작가님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평면 작업에 들어가는 그래픽 요소를 만드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냐는 게 핵심 과제였어요. 그 해에 《MMCA 현대차 시리즈》의 일환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큰 규모의 개인전을 여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거든요. 저는 작가님 부탁으로 벽지 작업의 새로운 버전과 애드벌룬에 달린 현수막에 들어가는 그래픽 작업을 도와드리게 됐어요.

양혜규 작가님이면 요즘 정말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아티스트인데요. 그분의 대형 개인전에 디자이너로 참여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정말 궁금하네요.

제가 의뢰받은 작업 사이즈가 무척이나 컸어요. 가로 폭만 18m가 넘을 정도였거든요. 전시 또한 규모가 엄청났고요. 제가 평소에 해보지 않은 작업이고, 그렇게 거대한 스케일의 전시에 참여하는 일도 처음이다 보니까 겁이 많이 나더라고요. 실수할까 봐 무섭기도 했고요. 사실 양혜규 작가님과 함께 일하기 전에는 작가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의뢰를 받고 웹으로 검색하면서 작가님 작업을 꼼꼼히 찾아봤는데 너무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이 정도 크기의 그래픽 작업을 실제로 구현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 또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결코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리곤, 두려움 반 설렘 반 상태로 작업을 진행했던 것 같아요.

양혜규 작가님과 유자 간의 호흡이 잘 맞았나 봐요.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전시 준비에 참여한 이후에 1년 동안은 아예 스튜디오 소속으로 월급을 받는 직원으로 일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실수도 많이 하고, 스스로 미숙한 점을 많이 느꼈는데,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주셔서 무척 감사했죠.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2 & H2O》, 〈디엠지 비행〉, MMCA, 서울, 2020
《양혜규: 황홀망恍惚網》, 쇼케이스 전경, 국제갤러리, 서울, 2021
(사진: 안천호 / 이미지 제공: 양혜규 스튜디오)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일하면서 어떤 일을 맡았어요?

스튜디오에 들어와 일하는 걸 권유하시면서 제가 할 일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요구하신 게 있었어요. 작가님은 독일과 서울에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계시고, 작업의 스펙트럼 또한 넓은 편이에요. 평면 작업의 경우, 독일 스튜디오에서는 원래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시리즈 작업이 있었고요.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설치 작업 위주로 작업을 진행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작가님은 서울 스튜디오에서도 평면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싶은데 머릿속으로 계획 중인 새로운 평면 작업이 있으니 이 작업 개발에 참여하길 제게 권하셨어요. 여기서 ‘개발’이란 단어를 쓴 이유가 있는데요. 처음 작품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작가님이 풀어가려는 키워드에 대한 리서치, 필드 트립, 전문가 미팅부터 사용하는 재료에 대한 연구, 재료 관리와 발주, 그리고 작가님과 제작팀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는 일까지 전반적으로 서포트를 담당했거든요. 그래서 보통의 인하우스 디자이너처럼 그래픽 작업 결과물에만 집중하기보다, 평면 작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도와드리는 역할을 맡아서 무척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어요. 아, 참고로 제가 참여한 작업은 〈황홀망〉 시리즈입니다!

우와. 저 그 작업 정말 좋아하는데요. 유자가 큰 역할을 했군요!!

저는 그냥 ‘멤버 1’이었을 뿐이에요. 부끄럽네요.

《Interweaving Poetic Code》, Gallery 1 입구, CHAT, 홍콩, 2021
(사진: Centre for Heritage, Arts and Textile (CHAT) / 이미지 제공: 최태윤 스튜디오)
《재난과 치유》, 〈마법 같은 수의 세계: 빛과 어둠의 역함수〉, MMCA, 서울, 2021
(이미지 제공: 최태윤 스튜디오)

너무 겸손해요. 시적연산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를 공동 설립한 최태윤 작가님과도 일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능력이 검증된 거죠!

사실 일들이 다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요. 최태윤 작가님이 양혜규 작가님의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을 방문해서 벽지 작업을 보셨는데요. 작가님의 작업 중 페인팅이나 드로잉 작품을 다음에 참여할 전시에서 주어진 전시 공간의 벽면에 맞춰 새롭게 작업을 변형하려고 계획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큰 사이즈로 평면 작업을 구현하는 데 관심을 두고 계신 터라 어느 날 제게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최태윤 작가님과는 총 3개의 프로젝트에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참여했어요. 2021년 홍콩 섬유예술미술관(CHAT)에서 열린 단체전 기획을 맡으면서 작가이자 아트 디렉터로 참여하셨는데요. 그 전시에서 작가님의 평면 작업을 CHAT 전시 공간에 맞게 새롭게 구현하는 과정에 도움을 드렸어요. 전시가 끝나고 난 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재난과 치유》라는 단체전에 참여하셨는데요. 그때 커다란 크기의 가벽에 여러 작업을 설치하셨는데, 저는 그 배경이 되는 가벽의 그래픽과 레이아웃을 담당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CHAT에서 열린 전시가 서울의 아트선재센터에서 후속 전시로 진행되었는데요. 같은 작품을 전시하더라도 열리는 공간에 맞춰 새롭게 구현해야만 하는 작업의 특성상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생겼어요. 아, 생각해보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는 추가로 아이디어 노트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맡았고, 아트선재센터 전시에서는 전시 아이덴티티와 전시 도록을 함께 디자인했네요.

듣고 보니, 엄청 치열하게 살았네요. 그래서 올해에는 계속 쉬려고 했나 봐요. 

맞아요. (웃음) 제가 한 6개월 정도 푹 쉰 다음 취업뽀개기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요. 갑자기 외부에서 일이 한두 개씩 들어왔어요. 그중 하나가 아까 말했던 PaTI의 『돠이꼬그라띠몸것』이었고요. 예전에 양혜규 작가님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분이 ‘모호 프로젝트’라는 뮤지션으로 활동하세요. 얼마 전 발표한 솔로 작업의 음반 아트워크와 아티스트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의뢰하셔서 작업했답니다. 이제 시간도 꽤 흘렀으니, 얼른 취업 자리를 알아봐야 해요. 하하.

모호 프로젝트 아이덴티티 디자인 및 정규 2집 〈Sauce, Kite, Lake〉 음반 디자인, 2022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볼까요. 유자는 PaTI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입학하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저는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는데요. 4학년 마지막 학기 때 수업에 필요한 작업 레퍼런스를 찾다가 PaTI와 명필름이 함께한 《명대사 with PaTI》 전시 사진을 접하게 됐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 커리큘럼은 타이포그래피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던 편이라 졸업할 즈음 타이포그래피를 더 배우고 싶다는 아쉬움과 갈증이 컸어요. PaTI에 대한 리서치를 계속하면서 이곳이 제도권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수업이나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그래서 원래 취업용으로 만들던 포트폴리오를 PaTI 더배곳 진학용 포트폴리오로 수정해서 지원하게 되었죠.

PaTI 더배곳을 다니면서 잊을 수 없는 다양한 기억이 많을 텐데 혹시 공유해줄 수 있나요?

구체적인 기억보다는…그냥 두성집에서 수업 듣고 과제에 밤새운 적이 워낙 비일비재해서 그때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생활한 기억과 두성집 풍경이 계속 떠오르네요. (웃음) 지금 두성집 공간이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최근 가보지 못해서 새로운 풍경이 궁금하기도 해요.

혹시 지금도 계속 생각나는 수업이나 스승이 있는지 궁금해요.

아무래도 앞서 얘기했던 『한국의 90년대 전시도록』, 『달날 파티』 책을 만들었던 수업과 그 수업을 지도했던 스승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정규 수업 외에도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했던 지라 제 PaTI 생활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요. 붙잡고 있던 시간이 길기도 길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책을 만드는 과정부터 결과까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상황에서 두 수업을 통해 책의 콘텐츠를 구성하고,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방법까지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라서 더 기억에 남는 듯해요. 전가경 스승은 책의 콘텐츠에 대한 비평 의식이나 콘텐츠를 보여주는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셨고, 두루미 스승은 타이포그래피와 레이아웃, 책의 디자인적인 구성과 만듦새에 대해 고민하고 작업하는 방식을 알려주셨어요.

PaTI 더배곳 ‘수집과 글쓰기’ 수업의 전가경 스승(위)과 책 멋지음 작업 모습(아래), 2018~2019

마친배우미로서 PaTI의 장단점을 꼽아볼 수 있을까요? 

학교에 다니는 배우미에 따라 배곳의 모습이 많이 바뀐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미가 학교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정말 큰 장점이지만, 동시에 함께 생활하는 구성원끼리 서로 영향을 크게 주고받아서 심리적으로 힘든 부분도 많이 생기거든요. PaTI는 아무래도 배곳 안에서 일어나는 프로젝트와 기타 다양한 일이 많고,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에 더 그렇지 않나 싶어요.

PaTI에서의 경험은 유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제가 어떤 것을 얼마나 모르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고 그냥 단순히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입학한 후 많이 헤맨 덕분에, 이제는 배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PaTI는 유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지 궁금해요. 

짤막하게 정의하기에는 어려운 곳이죠. PaTI는 마친배우미와 함께하는 행사도 꾸준히 진행하고, 배곳과 관련한 일을 가끔 의뢰하기도 해요. 그래서 함께 일을 도모하는 공동체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지금 PaTI를 다니는 배우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제가 PaTI를 다닐 때는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더 잘할 수 있을까’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졸업 이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디자인을 포함한 더 큰 카테고리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디자인 능력도 결국 ‘일’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PaTI에는 프로젝트 수업이 많잖아요. 즉 다른 배우미, 스승과 협업하는 기회가 다른 곳보다 열린 셈이죠. 그러니까 PaTI에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경험하면서,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이 자신에게 필요한지 생각해 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회 닿는 대로 함께 하고 싶어요.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웃음)

PaTI 더배곳 마친보람 맺음전 전시 포스터, 2019

지금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 귀에 팍 꽂혔어요. 요즈음 어떤 디자인에 관심이 가나요?

북 디자인에는 늘 관심이 많고요. 아무래도 그때그때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일을 진행하면서 관심사를 확장하거나 옮기기도 하고요. 올해만 해도 브랜딩, 공간 기획, 앨범 디자인, 공연 자막 디자인 등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분야의 일을 많이 경험했는데요. 비슷한 분야의 다른 프로젝트를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취업에 성공한다면, 다양한 분야의 일을 도모하는 곳에 가고 싶어요.

유자는 스튜디오를 운영해도 될 것 같은데, 취업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인팀이든,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이든,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그래픽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졸업 후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보면 전부 제가 유일한 그래픽 디자이너였거든요. 그때 와닿았던 부족함을 회사 생활에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고 있어요. 지금도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혼자 일을 해결하는 경험은 계속하고 있으니, 이제 조직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해보며 제가 결국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회사에 들어가면 무엇에 집중하고 싶어요?

디자이너로서 전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우고 경험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 깊이가 손에 물 묻히는 정도에 그치는 것 아닐까 종종 불안했거든요. 그래서 분야별로 좀 더 깊게 파고들고 싶어요. 더불어 제 취미나 관심사의 많은 부분이 디자인과 연관돼있기도 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하는 데 쓰다 보니 디자인과 생활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회사에 다니면 일단 작업 공간부터 물리적으로 분리되니까 그런 김에 디자인 외의 취미 생활도 전투적으로 누리고 싶어요. (웃음)

PaTI 더배곳 졸업 작업 〈사이풍경〉, 2019

목전에 놓인 취업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유자가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궁금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성취하고 싶네요. (웃음) 그리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 불가능할까요? 실제로 경험해 봐야 제가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요.

유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궁극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미래에 대한 엄청 구체적이고 큰 계획은 아직 없어요. 그냥 오랫동안 작업자로 남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하죠. 기왕이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작업자가 되고 싶어요. 오랫동안 작업자로 남으려면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인 환경도 뒷받침되어야 할 거예요. 저는 서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아직 서울에서 살아본 적은 없는데요. 그래서 서울 밖에서도 재미있는 일이 일상적으로 많이 벌어졌으면 좋겠어요. 더불어 그런 일을 해당 지역에서 해결하는 인프라가 갖춰지길 바라봅니다.

뉴스레터로 접하던 마친배우미 인터뷰에 직접 참여한 소감이 궁금해지네요. 

다른 사람 이야기를 읽을 때는 재밌었는데, 막상 제가 주인공이 되니까 힘드네요. (웃음) 이번 마친배우미 인터뷰를 준비하며 걱정이 많았어요. 아직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은 부분이나 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데 이를 인터뷰로 남기는 일이 무서웠거든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정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부분을 다시 짚어보며 생각을 다듬어나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PaTI에서의 추억, 졸업 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번 인터뷰를 제 삶을 기록한 한 권의 책 ⅓ 부분에 꽂힌 책갈피 같은 거로 생각하고 싶어요. 페이지를 열심히 넘기다가 가끔 생각날 때 돌아와 저를 다시 살펴보는 지점이 될 것 같네요.

행복의 정의는 각자 다른데요. 유자는 지금 행복한가요? 어떻게 하면 더욱더 행복한 일상을 꾸릴 수 있을까요?

행복하다, 아니다,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한다면 저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체로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일상은 존재하지 않잖아요.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슬픔에 잠기다가 예능 프로를 보며 피식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불합리한 일에 분노를 느끼지만 밥 시간이 되면 밥 먹고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니까요. 행복에 연연하면 도리어 불행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어진 하루에 충실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예상치 못한 행복과 슬픔에 놀라기도 하면서 삶을 꾸려나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못 한 말이 있다면 마음껏 해주세요!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요. (웃음) 2022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다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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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마친배우미 소식지 보기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ju Typography Institute, PaTI)은 2013년 봄, 파주에서 움튼 독립 디자인 학교입니다.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필요성에 동감한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와 여러 스승이 꾸린 교육협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지혜와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무권위와 무경쟁을 지향합니다. 배우미는 스승과 함께 학교를 디자인하며 스스로 뜻한 바를 자발적으로 성취합니다. PaTI는 일반 대학에 준하는 4년제 바탕 과정 ‘한배곳’과 대학원에 준하는 2년제 심화연구 과정 ‘더배곳’, 1년제 ‘PaTI.is(일러스트레이션)’, ‘PaPA(프로덕션디자인)’ 특별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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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7.물날
인터뷰·글: 전종현  |  편집·발행: 박하얀
영상 촬영·편집: PaTI 영상연구소 이형곤, 한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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