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처신하실 것 같아요.” “작가님은 말씀을 워낙 잘하시니까, 황당한 봉변 같은 건 당하시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당황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심리학과 문학 공부로 완전 무장한 나도 언제나 당당하지는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봉변도 당하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직업이 모든 무례함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이 세상 어떤 직업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이 ‘나는 판사다’, ‘나는 교수다’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유난히 허례허식이 많은 우리나라, 명품이나 고급 승용차나 자택의 평수 따위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이런 사치와 허례허식은 ‘그냥 한 번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아무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리라’는 강력한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벌이나 명품 액세서리나 고급 자동차 같은 것들로 ‘나를 더 돋보이게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병든 페르소나의 발로다. 진정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다.
당황스럽게도 무례한 사람들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오히려 점점 늘어가는 느낌이다. 이쪽에서 아무런 액션이 없을 때조차도, 그냥 혼자 조용히 나의 일만을 했을 뿐인데도, 황당한 봉변을 당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온갖 심리학과 문학으로 철벽수비를 해왔건만. 이번에는 잘 되지 않았던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지하철 좌석에 앉아 열심히 원고를 쓰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하루였지만, 어디서든 노트북을 펴놓고 타이핑을 하는 것은 내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글을 썼다. 내 앞에 두 여성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20대, 다른 한 사람은 50대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20대 여성이 내 노트북을 무심코 툭 쳤다. 노트북이 내 무릎에서 떨어질 뻔했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놀란 나머지, 나는 잠깐 얼어붙었다. 실수로 그런 거겠지,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다시 원고를 썼다. 그런데 그 다음에 들려온 그들의 대화가 더욱 충격적이었다.
“네가 노트북을 망가뜨린 것도 아니잖아. 뭘 그래, 그냥 가만히 있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노트북을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타인의 물건을 확 치고도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20대 여성이 뭔가 곤란한 제스처를 취했나 보다. 그런 모습을 보고 50대 여성이 조언을 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런 문장이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 노트북을 망가뜨린 건 아니라니. 나는 이번에는 더 큰 놀라움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말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네가 노트북을 망가뜨리기를 했어? 이 사람을 한 대 치기라도 했어? 그냥 가만히 있어.”
자신의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것일까.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정당성을 만들어 붙이고 싶은 거였을까. 나는 녹음이라도 해둘걸,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몸은 너무 뻣뻣하게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투쟁도피반응’인가 보다. 외부의 자극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 나는 솔직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고, 어떤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분노를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게 그들에게 한 방 먹이는 말이. 하지만 ‘이런 사람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내 안의 방어기제가 더욱 강했다. 사과하지 않는 20대 여성도 무례했고, 절대 사과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50대 여성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기이한 재능이 있었다.
50대 여성이 계속 자신의 놀라운 주장을 펼치는 동안, 20대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쭈뼛쭈뼛, 어쩔 줄 모르겠다는 제스처만 취했다. 당신도 어른인데, 왜 당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가. 당신의 잘못인데, 왜 정당한 사과를 하지 않는가. 2초만 용기를 내어 사과를 했다면, 깜짝 놀란 나는 물론 그날 세 사람 모두의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대 여성의 잘못이 50대 여성의 더 큰 잘못으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일파만파 커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분노했지만, ‘아름다운 오늘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이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말았다. 한마디로 에너지가 부족한 날이었다. 하루의 격무에 너무 지쳐서 싸울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옛날의 나는 아예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지만, 요즘의 나는 의도적으로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내게만 중요할 뿐 타인의 눈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은 눈뜨고 봉변을 당하고 있네. 자기를 지킬 줄 모르네. 이렇게 보일 것이 당연하다.
이제 회복탄력성을 되찾은 나는 그때 ‘봉변을 당하고도 꼼짝 못하던 나’에게 이런 뒤늦은 시나리오를 짜주고 싶다.
- 먼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 20대 여성을 먼저 바라보며 말한다.
- 제 노트북을 왜 치셨지요? 그랬다면 사과를 하셔야죠.
- 50대 여성을 나중에 더 오래 바라보며 말한다.
- 옆에 계신 분을 아끼시는 것 같은데, 좀 더 신중하게 조언을 해주시면 어떨까요.
- 두 사람을 함께 당당하게, 그러나 공격적이지는 않게 바라보며
- 잘못을 저질렀을 때 최대한 빨리 사과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정도는 시도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쪽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일파만파 말싸움으로 번질 수는 있겠지만, 나는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그렇게 싸울 의도도 에너지도 없으니 거기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다. 그 두 사람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물리적, 심리적 공격을 했을 때는 ‘어이없는 에피소드’쯤에 그칠 사건이 나의 당당한 대응으로 인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에피소드’로 변하지 않았을까. 봉변에 대한 무대응은 사태를 악화시킨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기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환멸’이 싹틀 수도 있겠다. 저렇게 당하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다니. 공격하는 사람은 나쁘지만, 당하는 사람은 한심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