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연두색 잎이 바람과 춤추는 모습,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강아지가 나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는 얼굴, 공연장에서 처음 보는 음악가의 노래가 너무 좋아서 뱃속이 간질거릴 때, 나란히 걸으며 나누는 맛있는 대화, 받을 사람의 환한 얼굴을 상상하며 쓰는 편지…."
누군가와 함께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써 보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늘진 얼굴의 친구를 앉혀놓고 좋아하는 목록을 써 보게 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무거운 마음을 억지로 끌고 나온 친구는 당연히 하기 싫다고 말해요. 양보하기는커녕 저는 오히려 기준을 높여 100개의 목록을 만들자고 조릅니다. 한두 개라면 ‘내가 정말로, 진짜로, 가장 좋아하는 것’ 같은 걸 고르는데 쓸데없는 시간을 쓰게 되거든요. 100개쯤 찾으려면 뒤지고 뒤져서 별것 아닌 시시한 조각까지도 꺼내야 합니다. 견딜 수 없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억지로 떠올리려고 잔뜩 구겨져 있던 미간이 천천히 풀리는군요.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눈이 되었네요. 스스로 눈치채기도 전에 입가에 미소가 스르륵 번집니다. 친구를 감싸던 그늘이 서서히 걷히고요, 얼굴에 불이 환하게 켜집니다. 제가 수도 없이 확인한 사실이에요.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얼굴은 변합니다. 다만, 사람은 자기 얼굴에 켜지는 불을 영영 볼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어요. 비극의 시작입니다. 저에게 편지는 얼굴에 불을 켜는 스위치와 같습니다. 받는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그려보는 시간이니까요. 볼 수는 없지만, 아마 그때의 제 얼굴도 은은하게 빛이 날 거예요. 해가 비치는 달처럼, 달이 비치는 바다처럼. 빛은 서로를 향해 비추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감탄하는, 기뻐하는, 미소 짓는, 눈물 흘리는, 안심하는, 깜짝 놀라는, 지긋이 바라보는, 부끄러워하는, 살아있는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요. 감정이 피어나는 순간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저는 타인에게서 살아있는 얼굴을 찾습니다. 언제까지나 편지 쓰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이유입니다. 대화도, 노래도, 읽기와 쓰기도, 여행도, 공부도, 요리도, 모든 것은 편지가 될 수 있지요. 그렇지 않나요?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모든 것은 편지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깨가 축 늘어진 친구에게 제안했어요. '자신에게 팬레터를 써 보자! 낯부끄럽다며 심드렁하게 시작하더니 4장을 쓰더라고요! 서서히 밝아지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제 얼굴에도 미소가 따라옵니다. 물론 저도 함께 썼어요. 이내가 이내에게 보내는 팬레터입니다.
이내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지내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잘 지낸다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테지요.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 어떠한 모습보다는, 내면 깊은 곳에서 당신이 바라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누리는, '잘 지내는' 일상이기를. 다시 매일 편지를 쓰기 시작했지요? 아침 해가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오듯, 우편함을 열면 당신의 소식이 도착합니다. 매일 달이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오듯, 안심되는 편지입니다.
어제는 블루스 노래를 만들 거라고, 제법 신이 나 있던걸요. 당신이 신이 나서 떠드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러니 부디 마음껏 신나 하길. 시간을 다 잊어버릴 만큼, 즐겁게 노래를 만들고 불러주세요.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당신의 모습도 애쓰는 마음이 전해져 애틋하고 사랑스러웠어요. 최근에는 좀 달라졌네요. 살랑살랑 상쾌한 바람이 부는, 촉촉한 나무 향기가 나는, 쉼의 순간을 나누고 싶어 하는 당신의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요.
이내답게, 계속해서 흘러가 주세요. 저는 언제나 당신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2023년 8월 18일 이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