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룸 비하인드: 내 삶과 일을 모두 지켜낸다는 것

투룸 비하인드

나의 삶, 나의 일

글 / 사진 차유진


매 달 15일은 그다음 달 1일에 발행될 투룸매거진의 원고 마감일입니다. 편집장의 역할도 하고 있는 제 메일함에 원고 피드백을 요청하는 메일과 사진, 일러스트들이 쏟아지는 날이지요.


지난 6월 15일은 제가 사는 베를린이 여름 기운으로 한껏 이글거리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 조금만 가면 Krumme Lanke, Schlachtensee, Grunewald 등 아름다운 숲과 호수들이 있는데요, 간단한 간식을 싸들고 강아지랑 물가에서 놀기 딱 좋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즐거운 상상을 뒤로한 채 저는 창밖에 펼쳐진 여름 풍경과 컴퓨터 모니터에 번갈아 시선을 두며 메일과 구글드라이브에 쌓여있는 원고더미를 한참 동안 정리 했습니다. 


한참을 업무에 집중하다 성큼 다가온 늦은 오후, 바닥에 늘어져 낮잠을 자던 강아지와 조금 지체된 산책을 하러 나갔습니다. 평소 산책 때만큼은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데, 무심결에 챙긴 모양인지 바지 뒷주머니에서 투박한 진동음이 느껴졌습니다. 무심한 얼굴로 바탕화면에 뜬 알림을 보았더니,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서 “외할머니가 방금 하늘나라로 가셨다.”라는 짧은 카톡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은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는 걸 보고 솔직히 ‘오바’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인간은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으면 몸에서 힘이 빠지더군요. 어떻게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답장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일단 강아지와 하염없이 동네를 걸었습니다.

물을 무서워했던 마일로
Schlachtensee에서
용기 내어 물속으로 퐁당!
Grunewald에서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병들어 아픈 구순이 넘은 할머니셨으니 머지않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이방인의 삶이란, 가족과 친구들의 중대사들을 힘없이 놓쳐버리기도 한다는 것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 웃프게도 할머니의 부고를 받고 먼저든 생각은, 이번 마감은 어떻게 하지? 였습니다. 이렇게 불효막심한 손녀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계신 곳에서 저 먼 유럽대륙 어딘가에 살아가는 저는 눈앞에 놓인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으로 제멋대로인 추모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당장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갈 수 없으니, 눈 앞에 놓인 삶을 최대한 충실히 살아보자는 거였지요.


지난 10년 간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스쳐 지나간 수많은 결혼식과 부고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매우 자유로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서글픈 일이 생각지 못한 순간에 종종 발생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7월호 마감작업을 했던 폭풍 같은 일주일 동안 저는 자유로움보다 서글픔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제 삶이 일에 완전히 정복당한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추모의 한 방법으로 주어진 일에 집중한 것인지, 커다란 몸집을 하고 눈앞에 서있는 슬픔으로부터 등 돌려 도망치기 위한 몰입이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원고를 탈고하고 창밖을 보니 저 멀리 해가 조금씩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해가 지는 걸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저는 할머니와의 온갖 에피소드들을 떠올렸습니다. 무뚝뚝하고 엄한 할머니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걸 마치 일생의 미션인 것처럼 생각했던 저는,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덜렁 혼자 할머니 댁에 몇 번이고 방문해 할머니가 좋아하는 빵을 잔뜩 선물한 뒤 12첩 반상을 아무렇지 않게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독일에 살다 처음 한국에 갔을 땐, 저보다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걷던 할머니가 동네에서 제일 큰 중국집에 저를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던 일도, 중국집 알바생을 채근하며 빨리 가져다 달라고 했던 그 뾰족한 눈도 기억해요. 외국인 손녀사위를 처음 봤을 때의 동그란 눈을, 저와 남편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말없이 멀리서 쳐다보던 눈빛도 기억합니다. 지는 햇볕에 몸을 늘어뜨리고 앉아 할머니와 함께했던 오래된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지난 며칠간 머리에 잔뜩 힘을 주고 마감을 끝내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종일 이글거리던 해가 마침내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을 때, 그제야 저는 빙긋 웃으며 할머니께 “잘 가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편집장의 책상.
집중할 때면 입술을 물어뜯기 때문에 립밤은 필수입니다.

나의 삶과 일을 모두 지켜내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이방인의 일상에서 삶이 일부가 무너져 내릴 때,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줄 가족과 친구들이 저 멀리 떨어진 모국에 있을 때, 홀로 꼿꼿하게 서있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언뜻 보면 ‘나의 삶’이라는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나의 일’이라는 작은 동그라미가 속해 들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 그 둘은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라는 동그라미 하나, 나의 일이라는 동그라미 하나가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하되, 비슷한 속도와 방향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 일의 속도를 맞춰가지 못할 때, 나의 일이 나의 삶 곁으로 다가와 함께 비슷한 속도로 걸어주는 느낌이랄까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제 삶과 일이 안전한 속도로 함께 걸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더 클 때도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삶과 일이 지속 가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제 능력이 아닌, 꾸준히 투룸매거진을 응원해 주시는 독자님들과 팔로워분들, 함께 투룸매거진을 만드는 투룸 팀 멤버들, 콘텐츠 서포트를 해주는 객원 필진들, 그리고 독일과 한국에서 저를 응원해주고 믿어주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저에게 남겨준 유산은 아무래도 이 새삼스런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삶과 일이 서로 불협화음을 낼 때, 잠시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눈길을 거두고, 제 삶을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돌려보려고 합니다. 종종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건강한 식사를 천천히 준비해 먹기도 하면서요. 투룸라운지 회원 여러분들도 건강하고 즐거운 여름날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퇴근 멍친구 마일로와 함께
에디터의 취향
마음의 위로가 되어준
투룸매거진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이방인의 여행
서핑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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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살고 있는 한 국제부부가

한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호주 시드니 여행을 계획합니다.

낯선 곳에서 여행자로, 이방인으로 겪은

예상치 못한 일들과 그로 인해 일어난

감정의 소용돌이에 대해

담담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글/비바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