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OUND Vol.86〈나부끼는 사랑을 따라〉정다운DQM―다큐멘터리 감독

오늘의 슬픔을 부지런히 기록하며

떨어지는 낙엽마저 때 이르게 간 이들의 작별 인사처럼 느껴져 망연한 계절입니다. 지난 한 주간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애도하는 자리가 곳곳에 마련되었어요. 짙은 노란 빛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광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꽤나 무거웠습니다. 분향소에 모인 행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누군가는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선 분주하게 풍경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떨리는 등을, 바람에 흩날리는 포스트잇을, 거리마다 늘어선 국화꽃을요. 카메라 뒤에서 숨죽인 그들을 보며 그또한 애도의 한 방법임을 깨달았어요. 어쩌면, 지극히 사소한 장면들을 부지런히 기록하는 것만이 오늘의 슬픔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그 풍경을 관망하다 “사람의 감정은 작은 지점에서 더 잘 드러난다.”는 정다운 감독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았어요. 정다운 감독은 한 걸음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안부를 묻고, 프레임 너머에서 요동치는 감정들을 가만히 담아냅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지난주 발행된 《AROUND》 86호 ‘영상으로 전하는 사람들(Video Storyteller)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11.10. Another Story Here―책 너머 이야기

AROUND Vol.86 영상으로 전하는 사람들(Video Storyteller)

나부끼는 사랑을 따라 정다운DQM다큐멘터리 감독


11.24. What We Like―취향을 나누는 마음

어라운드 사람들의 취향을 소개해요.


12.08. A Piece Of AROUND―그때, 우리 주변 이야기

오늘 다시 보아도 좋을, 그때의 이야기를 소개해요.

다운이 찍는 다큐멘터리 ‘다운큐멘터리’는 감정을 따라 흔들린다. 마음껏 나부낀다. 누군가의 떨리는 귓불 위로, 새하얀 양말 너머로, 빛나는 금색 손목시계 속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운 여자들의 머리카락 곁으로. 영상 속에서 들려오는 다운의 웃음은 해사한 표정을 연상케 하고, 무심하게 던지는 질문은 그때 가장 선명할 감정을 닮아 있다. 정제되지 않은 영상에 안온함을 담아내는 다운의 공식은 언제나 하나다. ‘사랑’. 더도 덜도 말고, 오로지 그것이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

서로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묘하네요(웃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어요.

저희 엄마는 위암 판정을 받고 악화 속도가 빨라 굉장히 일찍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반년 동안은 제가 옆에 계속 붙어 있었는데요. 그때 이야기도 많이 나눴지만 솔직히 지금은 제가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모든 게 허무하더라고요. 근데 어느 날 엄마가 찍힌 영상을 봤는데 꼭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글도, 사진도 그렇지 않았는데 영상만큼은 엄마가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영상이 단 두 개밖에 없다는 게 아쉬워서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찍어놓을걸….’ 후회도 했는데요. 문득 제 곁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을 기록하는 게 남은 인생의 숙명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찍기 시작했어요. 친구들이랑 보내는 일상을 계속해서 기록해 나간 거죠. 쉬지 않고 찍다 보니 순식간에 자료가 쌓여서 윈도 무비 메이커로 조금씩 편집하면서 정리를 시작했어요. 이 파일들을 어디에 보관해야 하나 싶을 때쯤 유튜브를 알게 됐죠. 그땐 유튜브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여서 공짜로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때부터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죠. 보통은 친구들이랑 노는 영상에 제가 즐겨 듣는 음악을 입히는 식이었는데, 특별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다 같이 마포대교를 걷거나 집에서 춤추는 걸 찍었거든요. 그런 영상이 지금의 다큐멘터리로 발전한 거예요.


다운큐멘터리의 뿌리엔 엄마가 있는 셈이군요. 다운씨한테 엄마는 어떤 존재였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사랑받은 기억이랑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같이 떠올라요. 저는 엄마를 좋아했어요. 고등학생 때까지 뽀뽀하고, 친구보다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죠. 엄마는 저를 일찍 낳으셔서 생각이 열려 있고 이야기도 잘 통했어요. 제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할 때도, 모델이 되고 싶다 할 때도 편견 없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한 번도 틀에 박힌 말을 하신 적이 없어요. 대신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호되게 혼이 났어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셨죠. 저는 어릴 때 할아버지·할머니부터 육촌까지 함께 살았는데요. 그 누구도 제가 맞고 자라는 줄 몰랐대요. 혼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다운이가 착하게 크는구나.’ 생각하셨다는 거 있죠(웃음)?


그런 엄격함도 애정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엄마는 제가 주도적으로 자라길 바랐어요. 학원을 보내거나 억지로 진로를 정하려고 하신 적도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엄마한테 진짜 멋이 무엇인지를 배웠어요. 졸업 사진 찍을 때 친구들이랑 옷을 사러 가기로 했는데 엄마가 그러시는 거예요. “라코스테 피케를 입는 게 진짜 멋있는 거다.” 초등학생 땐 딸기 운동화를 갖고 싶다고 졸라도 나이키 코르테즈를 사주던 분이셨어요(웃음). 그땐 코르테즈가 얼마나 신기 싫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그거 신고 맨날 1등 했어요. 어릴 때 육상부여서 달리기를 꽤 열심히 했거든요.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

정다운 감독은 언어로 형용할 없는 정서들을 장면으로 그려냅니다. 살아있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슬픔과 고통, 행복과 사랑은 그의 프레임 속에서 다채롭게 일렁이지요. 정다운이 포착한 가장 인간적인 순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장면들을 이곳으로 소환해봅니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선셋 롤러코스터(Sunset Rollercoaster) Candlelight(feat. OHHYUK)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푸른 논밭을 가로지릅니다. 사람들은 땅을 치며 오열하다가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 부딪히고 분노하지요. 그러다가도 담배를 입에 물고 해소할 수 없는 설움을 내뱉고, 감정을 실어 춤을 추기도 합니다. 해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한 사람은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을 든 채로 기도하듯 노래합니다. 리드미컬한 밴드 연주가 흐르는 동안 죽음을 둘러싼 희로애락들은 점층적으로 쌓여가고 풍성한 화음을 이룹니다. 어느덧 어두워진 하늘을 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누군가를 보내야만 하는 이들의 하루가 유달리 길었음을 짐작해봅니다.

최선을 다해 헤엄치는 마음

장기하와 얼굴들(Kiha & The Faces)별거 아니라고(Nothing After All)

수심이 무릎께 정도 오는 얕은 수영장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수면 너머엔 환한 빛이 비치고 있지만 그에게 그 위의 세상은 먼 허공과도 같지요. 턱 끝까지 밀려드는 숨을 꼭 부여잡고선 망망대해 같은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을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노래 제목처럼 ‘별거 아니라고’ 말해 줄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헤엄칠 수 있도록 잠시라도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다 보면 어떤 감정들은 물살에 자연스레 씻겨 내려갈 테니까요.

우리가 마주보며 설움을 토해낼 때

실리카겔(Silica Gel) ― I’MMORTAL(feat. sogumm) 

누군가가 우는 모습을 마주치면 어찌할 도리 없이 따라 울게 되곤 해요. 감수성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실은 나도 사람처럼 모든 감정들을 쏟아내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아서겠죠. 노래 후반부 등장하는 일그러진 사람들의 얼굴은 오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어줘요. 무엇이 그들을 울게 했는지,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전부 수는 없습니다. 뺨에 얼룩진 눈물 자국들을 보다 보면, 이렇게나마 함께 고통을 나눌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집니다.

다정이 뿌리 내린 자리에

예지(Yaeji)  WHAT WE DREW 우리가 그려왔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폭풍처럼 휘몰아 칠 때, 고통 속에서도 생각 외로 오래 버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제서야 내가 발 딛고 있는 자리에 다정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단 것을 실감하게 되죠. 살갑게 이름을 불러주며 안위를 살피는 사람들, 나를 지탱하는 사랑들 덕에 오늘도 무사할 수 있었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해봅니다. 

잘 마른 손수건 같은 위로

슬픔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등을 토닥여 주는 일이 유난히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어쭙잖은 위로를 전했다가, 되레 잔잔하던 일상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키게 되진 않을까 염려가 되었거든요.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언젠가의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던 문장들을 조심스레 건네볼까 합니다. 적당한 타이밍에 내민 잘 마른 손수건처럼, 이 문장들이 누군가의 젖은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길 바라요.

저마다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있잖아요. 저는 고통을 구석구석 살피고 오랫동안 응시하며, 잘근잘근 씹어 보는 편이에요. 이해되지 않더라도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언어가 되어 눈으로 보이거나 어떤 판단으로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바라보는 거죠.


AROUND Vol.77 기록생활자(My Record)

〈다치지 않을 무해한 세계〉

황예지―사진가

“많은 사람이 세월호 사건 때 이렇게 말했죠.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저는 그 말이 많은 사람에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뭔가를 구하고 싶어요. 살리고 싶어요. 서로를 살리는 문화 속에서, 살리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일부로 살고 싶어요. 책을 다 쓰고 나니까 제가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이제 죽이는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제 서로를 살리는 이야기 속에 살자.’ 저는 이 말을 하고 또 하는 것을 제 역할로 알고 있어요. 삶이 지고 스러지는 것을 사무치게 안타까운 맘으로 바라보게 된 끝에야, 그토록 큰 슬픔을 겪고서야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찾게 된 거죠. 제가 조금 전에 ‘살리는 이야기의 일부’로 살고 싶다고 했는데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서로를 살리지 않는 이야기의 일부분에 속해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이 답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제 글에는 저 혼자만이 아니라 늘 타인이 등장해요. 저는 오롯한 개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늘 관계, 집합으로 존재하니까요. 저 역시 타인과 연결된 개인일 텐데요. 딸이 재수를 하면 재수생 엄마가 되고, 아이가 힘들어하면 저도 힘들고, 친구가 아프면 신경이 쓰여요. 글을 쓰면서 이걸 좀더 예민하게 느끼게 됐어요. 세상에 나와 무관한 사람은 없고, 나는 절대 혼자일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저만 행복할 순 없다는걸요. 누군가 불행하면 저에게도 그 불행이 오고, 제가 불행해지면 제 주변으로 퍼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제 생각이 구체적이고 예민하게 바뀌면 세상도 조금은 바뀔 거라고 믿어요. 제가 세상의 일부니까요.” 


AROUND Vol.80 우리의 말하기(Talk Talk Talk)

〈좋은 말들을 재료 삼아〉

은유작가

어느 만화의 명대사처럼 기억에서 잊히지 않으니까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거란 말만으로는 위로하기가 어렵다. 맞다. 슬픈 건 슬픈 거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했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인과관계가 슬그머니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은 누군가 떠난 빈자리를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감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없어도, 그와 주고받은 사랑의 총량이 이를 증명해준다. 모순적이게 ‘애’와 ‘도’ 사이에 사랑이 있음을 그제야 눈치챘다.

               AROUND Vol.33 동물(Animal)
눈을 뜨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뭐라 쉽사리 입을 열기 어려운 날들을 통과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의 다친 마음을 보듬어 안으며 안녕을 기원하는 것뿐이었지요. 한 치 앞도 모르는 내일 앞에서, 오늘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고 한탄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이들에게 71호 오늘의 기분(Now Is Good)에 수록된 한 문장을 쥐여주고 싶습니다. 기원을 통해 우리의 삶은 어떤 공허와 피폐 속에 침잠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 곁에 머물다 간 감정들을 애써 외면하지 않길 바라요. 충분히 느끼고, 온 마음을 다해 끌어안자고.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면 기꺼이, 최선을 다해서 그래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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