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작하신 명절 음식 준비에서 아버지는 맨나중에 제기를 꺼내 정성껏 닦으시는 걸로 맺음을 하셨다.
그때까진 거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셨고 이런 태도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이어졌다. 아직도 올케언니들은 아버지를 아이스크림과 피자로 기억한다. 그리고 오후 두 시쯤 다 같이 보러 간, 추석 특집 영화관도.
그리고 내 추석은 이렇게 보냈다.
난 시집으로 가서 한 번도 뵌 적 없는, 조상님들을 위해 명절 음식을 정말 많이 종류별로 준비했다. 특히 추석엔, 아직도 더위가 남아서 추석 전날 저녁에 해 놓은 음식도 상할까 봐 간수하느라 힘들었다. 시집이 지방이어서 10시간 넘게 걸려 내려가 곧장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들로 끼니를 차렸고 술상을 간식처럼 차려 냈다.
그리곤 다시 서울로 왔는데 올 땐 더 막혀서 17시간 걸렸던 해도 있었다. 추석의 끝은 온몸을 감기몸살 약으로 달래며 나서는 출근길에서였다. 나는 그 길에서 한껏 들이마셨다.
서울, 내, 공간에서, 맛보는, 자존의 공기를.
그러기를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말아라'와 이 천하에 백해무익한 가부장제를 '낱낱이' 파헤쳐 가닥가닥 비판하면서, 추석을 보냈다. 아니, 치러냈으며 견뎠다.
그 후 명절의 주관자가 남편 세대로 내려오면서 남편의 형제들과 돌아가며 주관하게 되었고 나는 내 몫만 챙기면 됐다. 이것만 해도 정말이지 살 것 같았다.
그러다, 올해부턴 아주 간소하게 말 그대로 주과포혜만 차례상에 올리고 식사도 밖에서 하기로
전격 결정됐다.
시어머니의 병환이 결정적 계기였다. 당신이 평생 업으로 삼았던 봉제사를 내려놓으신 것이다.
처음엔 얼떨떨했지만 얼른 태세를 바꿔, 다섯 가지 나물과 채소전, 육전, 생선전, 세 종류의 탕국.....에서 놓여 나지 못하고 '이제서야' 하면서 급히 시집 근처에 있는 휴양림을 검색해서 운 좋게 예약까지 했다.
병환 중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바베큐도 하고 산책도 하고 커피도 내려 마시며 달구경도 할 예정이다. 추석을 기다리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적 새 옷 한 벌씩 얻어 입었던 때 이후로.
이제 다시는 다섯 가지 나물과 각종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다시 돌아가려면, 우리 아버지께서 이른 아침에 방앗간부터 가셔야 한다. 그리고 두루마기 챙겨 입으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키셔야 한다.
조상님들 오시게 대문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