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간다.

사고싶은 물건을 산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홈페이지 문구 발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은 원할 때 마트에 가고 원하는 위치의 물건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원하는 시간에 실행하면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요? 지난주 MSV <시니어>호의 마지막 인터뷰로  60대 중증 장애인 대표님과의 대화를 마치며 접근성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삶의 의지를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제약으로 무력하게만 느껴졌던 상황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접근성을 높이는 디자인은 시각장애인 건축가 크리스도우니가 말했듯이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말을 건네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접근성을 높이는 인클루시브 디자인 프로세스의 방법, 두 번째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이번 글은 지난 5월 13일 홍익대학교 공공디자인연구센터에서 주관한  공공디자인 포럼 2023에서 발제한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글
김병수, 미션잇 대표

두 번째 방법, 

배제되었던 사용자 돌아보기


제품을 기획하거나 디자인하다 보면 진짜 사용자들을 간과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MSV <안전>호에 소개했던 사례 중 에어백 테스트에 쓰이는 인체 모형을 평균적인 남성 사이즈로만 만들어 충돌 사고 시 여성 운전자들의 사망률이 더 높았던 경우가 있었죠. 구글에서도 카메라 앱을 개발할 때 흑인이나 아시아계 사용자의 피부색을 반영하지 못한 적이 있었고요. 기획 단계에서 충분히 여러 사용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게 문제였습니다. 물론
디자이너나 개발자 집단의 인력 구성이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도 한몫합니다. 에어백 사례에서 당시 개발자들은 주로 30,40대 남성들이 대부분이었고 구글에서 카메라 앱을 개발할 당시 개발자들도 백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연령과 관련해서는 어떤가요? MIT 에이지랩의 창설자인 조지프 F 코글린은 현업에서 일하는 기업 실무자들의 나이가 보통 49세를 넘지 않기 때문에 49세라는 나이는 시장 조사 담당자가 결코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사실상 마지노선이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실무자를 연령이나 장애 유무에 따라 완전히 다양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로젝트 진행 과정 중 배제하고 있는 사용자들은 없는지 충분히 검토하고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아래 소개해드릴 샌디 훅 초등학교 리빌딩은 어른 중심의 기획과정에서부터 다시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여 발전된 사례입니다. 

01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 아닌
가장 좋은 학습환경으로
: 샌디훅 초등학교 리빌딩
미국 현지 시각으로 2012년 12월 14일 오전 9시 40분경 코네티컷 주의 뉴타운이라는 마을에 있는 샌디 훅의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사건으로 어린이 20명, 교장을 포함한 교직원 6명, 범인의 모친, 범인까지 총 28명이 사망하였였습니다. 2012년까지 고등학교 이하의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5년 뒤 참사가 발생한 이 지역에 초등학교를 다시 세우기 위해 건축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어떤 시안들이 들어왔을까요? 대부분 요새같은 형태의 디자인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벽과 울타리를 세워 아이들을 보호하고자하는 의도에서였죠. 하지만 담당 건축 파트너로 배정된 스비걸스 파트너스Svigals + Partners의 제이 브로트먼Jay Brotman은 과연 이런 환경이 아이들이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인지 반문하게 되었습니다. 요새같은 학교는 어른들의 의견이었지만 실상 아이들은 그런 환경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학부모, 교사, 지역주민, 시설 관리팀, 샌디 훅 초등학교 학생 등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된 건축자문위원회에서는 학습환경의 본질을 놓고 다시 고민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 아닌 가장 좋은 학습환경을 만들기로 결정했죠. 삭막하고 높은 울타리가 아니라 자연의 요소들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집처럼 느낄 수 있는 곳. 또 온갖 CCTV와 보안 장치로 부담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환영할 수 있는 요소들이 담긴 학교를 만들기 위해 의견을 모았습니다. 2012년 총기 사고 당시 자녀를 잃은 학부모들도 인터뷰를 통해 다음 세대가 요새 같은 곳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데 의견을 보태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의견들은 디자인에 많은 부분 반영되었습니다. 울타리를 높게 치지 않는 대신에 큰 나무들이 자연적인 펜스 역할을 하도록 했고, 개방된 유리창을 통해 빛을 최대한 끌어드리는 동시에 오히려 학교 폭력이나 따돌림 같은 내부적인 문제들을 더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커뮤니티 모두가 과거의 비극을 넘어 학생들이 어떤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했기 때문에 진척된 결과였습니다. 


좌) 어른들 입장에서 오리 조형물은 유치해보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자연물을 생각할 수 있는 리프레시 요소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우) 사진 우측 하단을 보면 펜스가 낮게 쳐져있고 그 앞에 나무가 높게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공적인 벽이 아니라 자연물로 펜스를 쳐서 최대한 아이들이 숲속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조성했다. 
넓은 유리창은 채광을 한껏 받아들이는 동시에, 학교 폭력이나 따돌림 등 내부 감시를 위한 요소로도 사용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 말고, 가장 좋은 학습 환경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햇빛, 자연, 그리고 커뮤니티예요.”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안전>

세 번째 방법, 

지속적으로 피드백 받기


지속적인 피드백 수집은 공간과 콘텐츠 접근성을 향상시키고 사용자 만족도를 높이는 데 중요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공간을 디자인하고 기획하는 실무자는 장애인이 아닐 수도 있고, 연령이 어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용자 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피드백을 수집해야 합니다. 놓치고 있었던 점을 찾을 수 있을 뿐더러 새로운 관점을 통해 더 나은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사례는 정기적으로 운영되는 접근성 자문단과의 협업을 통해 지역 방문객 수를 다시 높일 수 있었던 호니먼 뮤지엄과, 지역 장애인 연구 기관 및 단체와 정기적 교류로 장애 친화적인 박물관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글레이저 칠드런스 뮤지엄입니다. 

02
지역 주민들의 방문 수를 다시 높일 수 있었던 접근성 자문단
: 호니먼 뮤지엄 엔 가든스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호니먼 뮤지엄은 인류학 유물과 자연사 유물을 포함한 다양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고, 동물 농장, 나비 정원도 있어 지역주민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곳이다. ©Horniman Musuem and Gardens

런던 남동쪽 포레스트 힐 Forest Hill에 위치한 호니먼 뮤지엄은 1901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박물관으로 2019년 기준으로 연간 약 95만 명이 방문하였습니다. 다만 런던 중심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관광객들이 자주 올수 있는 곳은 아니고 지역 주민들이 가족 단위로 뒷마당 드나들듯 자주 방문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 방문자 수가 줄었다고 해요. 그 이유로 포레스트 힐 지역은 점점 고연령층도 증가하고, 다양한 인종 특성도 보이고 있는데 반해 호니먼 뮤지엄은 이런 지역 인구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내부적인 의견이 있었죠.


그렇다 보니 박물관 내부적으로 “지역 커뮤니티는 역시 접근이 어렵다.”라는 인식이 팽배했었다고 합니다. 호니먼 뮤지엄의 커뮤니티 매니저 줄리아 코트Julia Cort는 "접근하기 어려운 박물관"이 문제이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 커뮤니티"라는 말은 정말 역설적으로 들렸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토의 끝에 '박물관이 지역 주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시설' 이었음을 인식하게 되었죠. 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접근성도 떨어졌을 뿐더러 콘텐츠도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반영하지 못했었으니까요.

다양한 장애를 가진 12명의 접근성 자문단을 모집하여 정기적으로 접근성 회의를 가지는 모습. 2018년부터 지금까지 5년 째 지속하고 있다. 동일한 사람들이 자문들을 지속하기도 하고, 몇몇은 새로 뽑기도 하였다. ©Horniman Musuem and Gardens

그래서 모집하게 된 접근성 자문단은 정기적으로 모여 뮤지엄의 물리적 접근성과 콘텐츠 접근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보통 접근성이라 하면 시설적인 측면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호니먼 뮤지엄 접근성 자문단은 콘텐츠 접근성까지 고려하여 지역 주민이 어떻게 박물관의 전시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지 커뮤니티 팀과 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 인상 깊은 부분입니다. 자문단 모집 시에는 지역 주민이면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을 모집하였고, 자문단 구성원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여러 장애 유형의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견을 균형 있게 조율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청각장애를 가진 자문단원이 수어가 담긴 비디오가 갤러리 전체에 있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자폐성 장애 아동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시각적인 자극이 많이 갈 것 같다며 우려를 표시하여 결국 설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또한 접근성 자문단은 장애인식과 관련된 역사적인 변화와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전시인 '모든 이야기에 담겨있다 Always Part of the Story'전도 자체적으로 기획해서 진행했습니다. 장애인이면서 지역주민인 사람들이 뮤지엄과 협업하여 함께 전시를 만든 점도 인상 깊었고, 이후에 지역주민의 의견을 반영한 공동 큐레이션 작업을 진행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물리적 접근성부터 콘텐츠, 커뮤니티 접근성까지 총체적 측면이 발전된 셈이죠.

“뮤지엄은 시혜자이고 방문자는 수혜자라는 관점을 넘어, 외부인에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놀이>
03

지역 장애인 기관 및 연구센터와 정기적으로 교류를 통해 접근성을 향상 시킨 : 글레이저 칠드런스 뮤지엄

글레이저 칠드런스 뮤지엄은 미국  플로리다 템파 지역의 도심에 위치한 뮤지엄으로 자폐성 장애 아동 친화적인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달 마지막 일요일 오전, 박물관의 조명과 음향의 강도를 낮추고 자폐성 장애 아동들이 한결 더 편안하게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는 선샤인 선데이Sunshine Sunday 프로그램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이날은 비장애 아동들도 함께 방문할 수 있고 연령도 특별한 제한은 없어서 45세 쯤 되는 성인 자폐성 장애인도 방문 가능하다고 합니다.


'왜 자폐성 장애 아이들만 따로 나누어서 관람시간을 잡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죠. 인터뷰이였던 마케팅 부사장 케이트 화이트Kate White의 의견에 다르면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게 목적이 아닌, 한 달 중 하루만큼은 북적이는 박물관의 인파와 소음을 힘들어할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훨씬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방문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부 설비도 흥미롭습니다. 청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폐성 장애 아이들을 위해 센서가 달린 변기 커버를 제공하여, 아이가 용변을 보고 문 밖으로 나간 뒤에 물이 내려갈 수 있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편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죠. 또한 사전에 박물관에 걸어 오는 길을 숙지할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 영상을 미리 제공하여 자폐성 장애 아이들이 박물관에 익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피젯fidget 장난감이나 노이즈 켄슬링noise cancelling이 되는 헤드셋은 상시 준비되어 있고요. 또 여름 행사로 비장애인과 장애인 10대들이 함께 어울리며 소셜 스킬을 기를 수 있는 선샤인 스쿼드Sunshine Squad 캠프도 제공되죠. 10여 주 기간동안 진행되는 캠프(*숙박은 아님) 프로그램 중 6~8주는 어티즘 프렌들리Autism Friendly 주간이라고 해서 스테프 수도 특별히 더 보강되고, 아이들이 잠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콰이어트 룸Quiet Room이나, 압축 조끼 등 정서안정을 위한 다양한 장비들이 추가로 마련됩니다.


주변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노이즈 켄슬링 헤드셋은 상시 제공된다. ©Glazer Children's Museum


물론 특정 기간만 자폐성 장애아동을 고려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케이트 화이트는 모든 프로그램과 시설이 어티즘 프렌들리를 지향하지만 특정 기간에는 자폐성 장애 아동들이 더 많은 것들을 안전하게 시도해 볼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이 취지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언젠가는 특정 기간이 아니더라도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아이들누구나 박물관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자폐성 아동들에게 친화적인 설계는 지역 장애인 센터 및 연구기관과 정기적인 협력이 뒷받침 되어 가능했습니다. 글레이저 칠드런스 뮤지엄의 최고운영책임자가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의 자폐 및 관련 장애 센터(Center for Autism and Related Disabilities)의 이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에 최신 소식을 매번 업데이트 받을 수도 있었고요. 센터의 정기적 방문으로 박물관 직원과 스태프 교육, 자폐성 장애 아동에 대한 정보 제공이 진행되어 내부적으로 장애 아동에 대한 충분한 학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시각장애인 기관과의 협업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방문자들에게 뮤지엄이 충분히 좋은 접근성을 제공하고 있는지 웹사이트 접근성이나 텍스트를 꾸준히 점검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태프들의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 장애아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충분히 학습한다. ©Glazer Children's Museum
“장애인법을 준수하는 것은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에요. 그런 법을 넘어서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자문해야합니다. 장애 아동과 그 가족에게 삶에서 '한 주를 살아냈다.'는 안도가 아닌 '가장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여야 합니다.”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놀이>
미션잇은 신체, 감각, 인지 활동 지원이 필요한 사용자 누구나 더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디자인을 연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 포용성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MSV 임팩트 레터 발행 안내

사회적 가치를 만나는 MSV 임팩트 레터에서는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사이트를 전달드립니다. 핵심적인 키워드는 ‘디자인의 사회적 가치’와 ‘포용적인 디자인’ 그리고 ‘접근성’ 입니다. 매주 1회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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