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유니버설뮤직입니다. 어제가 선거일(공휴일)인 관계로 오늘 이유식을 보내드립니다. 다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소중한 한 표 행사하셨는지요.

요새 "록의 붐은 오는가"라는 글이 심심치 않게 보여요. 그러면서 몇몇 아티스트 사진도 올라오는데요. 바로 밴드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와 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입니다. 이들의 사진은 지금 봐도 정말 멋있습니다. 거침없는 록스타의 전형이랄까요. 특히 4월을 맞아서 커트 코베인 관련 콘텐츠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30년 전 4월 5일,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저는 커트 코베인의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아립니다. '시대의 대변인', '록스타'라는 겉모습 속에 항상 외로운 소년이 보였거든요. 오늘 이유식에선 영원한 소년 커트 코베인의 삶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번 주 니버설뮤직 소함께 보실까요?
오늘 이유식은 아래 순서로 작성하였어요.

1. 세상, 소년을 버리다.
2. 펑크와 만나다.
사진 출처: The New York Times  
🎤Nirvana - Aneurysm (Live at Reading 1992)
1. 세상, 소년을 버리다.

 “자신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 – 인터뷰 도중 한 기자가 물었던 질문과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답


 커트 코베인은 공연 막바지에 기타를 자주 부쉈습니다.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앙코르 요청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쿨한' 답변도 있었고, 기타가 부서질 때 나는 피드백 소리가 좋아서 그랬다고도 합니다. 공연이 X 같았을 때는 자기를 마음껏 비웃으라는 짜증의 표현이기도 했죠.


 그런데 너바나(Nirvana) 활동 막바지로 갈수록 로커의 표출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목소리도 힘을 잃고 있었죠. 커트 뒤로 비췄던 삶의 후광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기타를 부수는 행위는 생을 위한 힘의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방아쇠를 당겼고, 거대한 총성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사진 출처: 게티 이미지  

 커트 코베인은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주 에버딘의 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친척이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커트 코베인은 섬세한 감성을 키울 수 있었죠. 2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고 4살 때는 피아노를 쳤습니다. 커트 코베인은 비틀스(The Beatles),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ectric Light Orchestra)부터 라몬스(The Ramones)까지 수많은 음악가의 음악을 듣고 따라 불렀습니다. 그 모습에 어른들은 관심을 가져줬고, 꽤 행복한 꼬마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커트 코베인은 그때가 자신의 화양연화가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9살 때 부모가 이혼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명랑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섬세했던 소년은 도대체 왜 부모라는 보호막이 사라졌는지 이해하지 못했죠. 또래 친구들 앞에서 떳떳이 설 수도 없었습니다. 창백한 피부의 소년 앞에 갑작스레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그의 일생 함께 할 악마의 씨앗이었습니다.

2. 펑크와 만나다
사진 출처: SLATE  

Nirvana - School (Live At The Paramount, Seattle / 1991)


 “내가 최초에 우리들 공동체의 독립심과 용인을 지지하고 있던, 그래 윤리라고 할까... 그것에 접해 있던 이래 몇 년에 걸쳐 펑크록 101코스로부터 파생한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만드는 것에 대해 흥분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 커트 코베인의 유서 중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도중, 커트 코베인은 수업에서 밴드 멜빈스(Melvins)의 로저 오스본(Roger Osborne)을 만납니다. 그 당시 워싱턴주(정확히는 북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에는 펑크신이 꽃피고 있었고, 로저 오스본은 그 속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술적인 것에 끌렸던 커트는 로저와 급격히 친해지기 시작했죠. 로저 오스본은 곧 자기가 일하는 슈퍼마켓 옆에서 밴드의 무료 공연이 있을 테니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행사 당일, 조약한 무대 근처로 꽤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펑크 공동체였다. 멜빈스가 만들어 낸 굉음과 인파가 내는 소음이 조용한 마을을 뒤덮었습니다. 커트 코베인에게 그때 그 풍경은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과 같았습니다. 마음속의 빈 구멍을 메워주었고, 카타르시스와 소속감을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커트 코베인은 펑크 로커가 되고 싶었습니다.


 커트 코베인은 고등학교 졸업 2주 전 대뜸 없이 자퇴를 선언합니다. 어머니는 직장을 구하지 않을 거면 집에서 나가라고 했고, 커트는 이후 떠돌이 신세가 됩니다(가끔 몰래 집에 숨어들어왔다고 하네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페미니스트 펑크 밴드 비키니 킬(Bikini Kill)의 토비 베일(Tobi Vail)을 만납니다. 둘은 대부분의 시간을 정치와 철학 이야기를 나누는 데 썼습니다. 1990년에는 배스텁 이즈 리얼(Bathtub Is Real)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하기도 했죠. 


 커트 코베인은 토비 베일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모성의 부재를 채워줄 손길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토비 베일에게 커트 코베인은 연애 상대가 아녔습니다. 베일은 수많은 남자를 연인으로 거느리고 있던 ‘진보적’ 연애가였습니다. 커트 코베인은 그녀가 거느린 액세서리 중 하나였을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커트 코베인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커트 코베인은 비키니 킬의 멤버 캐슬린 한나(Kathleen Hanna)와도 자주 교류했습니다. 어느 날 무정부주의와 펑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나는 벽에 “"Kurt Smells Like Teen Spirit(너한테 데오드란트 냄새가 나)"라고 씁니다. 커트는 'Teen Spirit'이 탈취제 이름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네, 모두 아는 너바나의 히트곡 ‘Smells Like Teen Spirit’이 이때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이 곡은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곡의 대성공 이후, 음반 가게 주인장들은 구석에 있던 인디 록을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옮겨 놓기 시작합니다.

 분량이 많아서 오늘 이유식은 여기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다음 이유식은 평론가 희미넴님이 재미난 주제를 다뤄주실 예정입니다. '30년 전 4월에 떠난 소년 , 커트 코베인의 삶(下)'는 그다음 편으로 나갑니다.
04.08    요루시카, 한국서 아티스트 테마 카페 개최 예정
04.09    우타다 히카루, 데뷔 25주년 맞아 첫 베스트 앨범 발매 예정
  😎오늘 이유식이 재밌었다면 주변에 추천해 주세요!
🌍이전에 이유식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다면?
📌현재 구독 중인 이메일 주소를 바꾸고 싶다면?
유니버설뮤직코리아 미디어마케팅
문의 mediamarketing@umusic.co.kr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