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낮의 여름

 

비가 많이 오고 있어요. 가뭄으로 오이가 써졌다고 하던데 비가 오면 좀 나아질까요?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는 걸 보고 있으면 온갖 것들이 걱정돼요. 사람들도, 동물들도6월 날씨가 10년 전에도 이렇게 더웠는지, 남은 여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편지를 쓰려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저런 생각이 드네요.


$%name%$님은 여름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뜨거운 해는 무섭지만, 여름 밤의 귀뚜라미 소리는 좋아해요. 선풍기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여름 밤, 열대야가 찾아오면 저녁 공원의 물가에 나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풍경을 생각해요. 여름 바다는 어떤가요? 습하고 짭짤한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 모래사장을 밟을 때의 간지러움, 발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나가는 파도의 차가운 온도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죠.


제게 여름의 인상은 조금 소란스럽고 다정한 느낌이에요. 옷차림이 가벼워지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만 같구요. 어디든지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겨울보다 더 많은 감각들이 느껴지는 걸까요? 겨울엔 꽁꽁 싸매고 안에 콕 박혀 있게 되니까요. $%name%$님은 여름을 생각하면 어떤 감각이 떠오르세요? 여름이 온전히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지난 페미워커클럽 모임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나누었어요. 2022년의 절반이 지나간 6, 지난 6개월이 어땠는지 돌아보고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특별히 감각에 집중하면서 지난 시간을 생각했어요. $%name%$님은 매일 일기를 쓰시나요? 우리가 일기를 쓰기 위해 오늘 하루를 떠올리면, 보통 사건과 생각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기존과 다르게 감각을 중심으로 내 시간들을 재구성해보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은 지난 6개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나에게 온전히 집중했던 순간으로 꼽았어요. 내가 냈던 가장 큰 성과도, 대단하고 멋있는 것을 봤던 순간도 아닌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요.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봤던 노을이나, 혼자 선릉을 산책하던 날, 캠핑에서 불멍을 하던 밤. 계절과 시간과 공간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


지금 편지를 읽고 있는 $%name%$님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은 밤인가요, 낮인가요? 혼자 조용한 곳에서 읽고 계신지 아님 시끄러운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지금 $%name%$님의 주변에는 어떤 감각들이 있나요? 그 감각들이 마음에 드나요, 아니면 불편한가요? 저는 페미워커클럽 모임에서 감각에 대해 떠올리면서, 내가 평소에 감각을 소홀하게 대해왔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인지하지 않으려고 했던 순간들이 많았어요. 출근 길 시끄러운 지하철에 앉아있을 때, 내 감각들을 모두 차단하고 싶은 것처럼요

 

그런데 감각과 감정이 꽤나 깊게 관련이 있다는 거 아시나요? 배고프고 더울 때 짜증이 난다거나, 불편한 공간에 가면 몸이 뻣뻣하게 굳고 움직임이 어색해지는 경험처럼요. 우리 생각보다 더 내 감각과 감정은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고 있다고 해요. 감각이 감정을 만들기도, 감정이 감각을 만들기도 하면서요.


페미워커클럽 모임에서 감각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준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3월 대선부터 시작해서 이번 지방선거까지, 온갖 혐오에 필터링 없이 노출되어왔던 페미니스트 노동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번 여름을 보내게 될지 마음이 쓰였어요. 저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잘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풀지 못한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결국 한 번에 터지더라구요.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완전히 번아웃되어 움직이지 못하거나. 이번 상반기도 마찬가지였어요. 특히나 이렇게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는 혼자 알아차리기 더 어려워서요.


그래서 $%name%$님에게도 묻고 싶었어요. 마음을 잘 돌보고 있나요? 혹시 내가 받는 스트레스를 모르는 척 하고 있지는 않나요? 시끄럽고 혼잡한 길거리를 지나갈 때 모든 감각을 차단해버리듯, 감각과 감정을 외면하고 있나요?

 

만약 $%name%$님이 그렇게 지내고 계신다면요. 아프고 힘든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이번 여름에는 감각에 집중하고 감정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해요. 머리 아픈 하루의 저녁 시간을 잠시 내어 풀벌레 소리를 들어보거나, 실수 때문에 짜증나는 오후를 보내고 있다면 그냥 뜨겁고 습한 공기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면서요. 이런 것도 물었으면 좋겠어요. ‘나 요즘 어떻지. 괜찮은가?’ 친구들에게 마음을 쓰듯, 나에게도 마음을 쓰면서요.


혐오와 무례에, 폭력적인 도시에, 불편과 불쾌에 노출되기 쉬운 나날들이에요. 나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기 쉬운 여름이구요. 제철 과일을 잘 챙겨먹어야 더위로 몸이 상하지 않는대요. 이번 여름에 $%name%$님에게도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좋겠어요. 여름을 온전히 느끼면서 날 수 있게요. 편지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어 제일 좋아하는 책 구절 인용하며 마칠게요.


[사진1] 혜리가 직접 노트에 쓴 책 문구. 노트 주변에는 햇살에 비춰진 나뭇잎 모양의 빛 그림자들이 흩뿌려져 있다. 노트에 쓴 문구는 다음과 같다.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이런 나무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 너무 한낮의 연애중에서

 

나는 일상을 가만히 견디다가도 어느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주변의 누군가에게(낯선 당신에게라도)가서 막무가내로 묻고 싶을 때가 잦은데,

그건 그러니까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하는 질문이다. 괜찮습니까, 하는 질문.

왜 이렇게 됐습니까, 괜찮습니까.

그렇게 물을 때 나는 사람들 곁에,

차가운 창의 흐릿한 입김처럼 서 있겠다, 누군가의 구만 육천원처럼 서있겠다,

읍산의 느티나무처럼 서 있고, 잃어버린 다정한 저처럼 서있겠다.

  • 작가의 말중에서


 

이제 장마래요. 우산 잘 챙겨 다니세요. 비 오는 날 바지 밑단이 조금 덜 젖기를, 다정하게 소란스러운 여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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