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씨네21에 다음 주 수요일 개막을 앞둔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천 작품에 관한 리뷰를 썼었습니다. 두 편의 일본 영화와 인도 영화 한 편, 홍콩/중국 영화 한 편, 그리고 <페이퍼맨>이라는 한국 영화 한 편이었습니다. 다섯 작품 중 한국 영화의 제목만 굳이 여기에 적은 이유는 제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NO.30]


인피니티 스톤 혹은 크립토나이트


2022년 10월 1일



라기보다는 그 영화가 국적을 떠나서 가장 신선했고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 ‘페이퍼맨’은 마치 마블 시리즈의 한 작품처럼 화려한 액션과 극적인 영웅 서사를 예상하게 만드는 제목인데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인목은 다리 밑에서 노숙을 하며 폐지를 줍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인데, 그 폐지를 남들보다 조금 더 먼저 줍는 방법을 통해 동네의 ‘1등 폐지 수익러’, 즉 ‘페이퍼맨’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더 체계적인 방법으로 영악하게 폐지를 휩쓸어가는 누군가가 등장함에 따라 인목이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시고 어쩌면 정말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가진 영화라고 느끼실 수도 있을 듯 한데요. 그래서 만약 누군가 제게 ‘내가 이걸 왜 영화로까지 봐야 하나’라고 따진다면 쉽게 반박하기가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박 포기할 저는 아니고요. 쉽게는 아니지만 어렵게라도 반박을 시도해보겠죠. 다소 헐렁하고 사소해보이는 사건일 수는 있겠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 입장에선 정말 인생 전부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몸이라도 편히 뉠 수 있는 다리 밑 보금자리가 그들에게는 지구고, 은하계고, <아바타>의 나비족들이 지키는 영혼의 나무이며, 그들이 그토록 최선을 다해 손에 넣으려는 페이퍼가 그들에게는 인피니티 스톤이자 크립토나이트라고, 말입니다.


<페이퍼맨>


<페이퍼맨>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단지 그것 하나뿐만은 아닙니다. 기모태 감독의 창의적인 표현력 또한 인상적인 점 중 하나였습니다. 영화엔 주인공이 박스로 만든 집이 등장하는데요. 이는 주인공의 생활이 나름 사치를 부릴 정도가 됐다는 것을 시각화한 소품 중 하나입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어 주인공이 비싼 옷을 산다거나 하는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박스 집’을 세워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저는 재밌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에선 심지어 이 박스 집의 발전 과정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처음에는 바닥과 벽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던 공간이, 나중에 지붕과 창문까지 겸비한 말 그대로 ‘하우스’ 그 자체가 되어 영화에 등장할 때, 정말 그 기발함에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과감하고 기발한 영화적 장치들은, 주로 감독들의 데뷔작에서 만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것이 제가 영화제에서 감독들의 데뷔작을 즐겨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감한 상상력이 데뷔작에서 자주 발견되는 건 물론 초심자의 용기의 영향도 있겠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좀 더 큰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아직 유명하지 않아 제작비를 많이 투자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현하고 싶은 어떤 것을 ‘저렴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창의력이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감독으로 하여금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죠. 물론 그 저렴함이 너무나 드러나서 영화 전체를 저렴한 영화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위험도 존재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성공한다면 엄청나게 큰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퍼맨>을 히어로(가 만든) 영화라고 칭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행>

이번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 중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또 한 편의 한국 히어로(가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이름에서부터 ‘기발의 기’가 들어가는 영화, <기행> 입니다. 그러고 보니 <페이퍼맨>의 감독 이름에도 역시 ‘기’가 있었네요? 아무튼 <기행>의 감독 이하람 감독은 이력부터 정말 신인 그 자체인 감독인데요. 2002년부터 17년간 요리사로 일하셨고, 현재는 배달대행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행>의 후반작업을 할 때는 낮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 후에 새벽까지 편집을 하셨다고 하네요.


<기행>은 한국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데뷔작에 역사극 연출이라니, 대체 얼마큼의 제작비로 어떻게 그걸 구현해냈을지 궁금증을 가진 채 영화를 보았는데요. 하지만 영화를 보면 시대 배경이 크게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정말 대담하게도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은 이렇습니다. 부랑자 촌에 혼자 남겨진 소년에게 처녀 귀신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소년은 처녀 귀신을 따라 지옥과 천국을 향하는 여정을 떠납니다. 이 신비로운 길에 동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의 ‘캉캉’이 울려 퍼집니다. 감독은 그 여정을 아이폰과 이케아 스탠드 조명, 그리고 스티로폼을 활용해 스스로 만든 세트를 통해 구현해냅니다. 그야말로 홀로 만든 핸드메이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기행>의 크레딧을 보면, 감독/각본/음악/편집/미술/촬영/조명 등 많은 역할을 감독 혼자서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데요. 심지어 마지막 ‘Special Thanks to’ 목록에도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Apple i phone’과 ‘Adobe Stock’ 같은 회사 이름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애플과 어도비에게 스페셜 땡스 투를 전하는 감독은 태어나서 처음 본 것 같네요.



아무튼 사용된 장비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저렴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이 다 티가 나는 영화입니다. 아이와 처녀 귀신이 지나가는 길의 뒷배경엔 모두 진짜가 아닌 수제로 만든 것 같은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고, 몇 장면에 등장하는 컴퓨터 그래픽 합성 장면은 근래 개봉하는 CG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그 완성도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웠습니다. 아니 저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티가 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놀라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저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고스트 스토리>와 <그린 나이트>가 떠오르기도 했었는데요. 처녀 귀신과의 소리 없는 대화 장면,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영겁의 시간, 이미 정해진 운명을 향해 길을 떠나는 주인공 등의 요소가 두 영화를 연상시킨 것입니다. 영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던 사람이 홀연히 아이폰과 스티로폼을 뚝딱뚝딱해서 만든 영화가, 저런 최고의 영화들과 맞먹는 감흥을 주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기행>의 어떤 장면이 감동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영화를 만나게 될 분들을 위해 스포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감흥은, 이 처녀 귀신을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직접 함께 걸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접 경험으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는 어떤 것이랄까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말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영화. 오로지 나의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을 통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 말입니다.


물론 <기행>이나 <페이퍼맨> 같은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영화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큰 감동을 주는 영화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모두에겐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영화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영화제에 가면 더욱 다양한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최고의 영화’를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진 채로 말입니다. 실제로 제가 부산영화제에 처음 가서, 처음으로 본 영화가 <윤희에게>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의 데뷔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였고, 그때 큰 감동을 느꼈던 짜릿한 경험이 있는데요. 이 영화에 관해서는 언젠가 꼭 길게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영화제는 저에겐 클럽(?)이고, 영화는 제게 인피니티 러브인 셈입니다. 이렇게 쓰고 나니 조금 초라해지기는 하지만,,, 기왕 다녀오는 거 올해도 신나게 내적 댄스 흔들어 제끼고 오겠습니다 :)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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