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에게,

유튜브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별별 영상을 보여주잖아. 그러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 스트리머를 알게 됐는데, 너무 신기해서 하던 일을 제쳐놓고 영상을 몇 개를 봤나 몰라. 처음 듣는 게 분명한 음악을 몇 초 듣지도 않고 반주하고, 에어컨 실외기 소리부터 고양이 코 고는 소리까지 세상의 소음을 어느새 음악으로 만드는 거야.

재능보다도 놀라운 건 태도였어.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건반 위에서 숨을 쉬는 그는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도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피아노라는 게 꼭 그의 것 같았어.

그런 아이들이 있지. 똑같이 물에 발을 담가도 어느새 혼자 저 멀리 헤엄쳐가는 법을 익히는, 똑같은 크레파스를 갖고도 어떤 색을 칠해야 사과가 진짜 사과 같아 보이는지를 아는, 똑같이 숫자를 세기 시작해도 숫자가 말을 걸기라도 하는지 거대한 숫자들 사이에서 길을 찾는, 부름을 받아 태어난 듯한 아이들 말이야.

나는 늘 그런 아이들을 부러워했지만, 생각해 보면 내게도 그런 분야가 없지는 않아. 그러니까 난, 언제나 언어가 내 것처럼 느껴졌어.

책을 많이 읽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없어서 책을 더 읽었던 걸까. 나는 책 속에서 숨을 쉬었고, 단어들을 수집했고, 이야기 속에서 살았거든.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얼굴은 다 잊었어도 그때 읽었던 책은 또렷해. 언어가 누구 하나의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건 내 것이 분명했지.

완전히 흘러가 버린 옛날 옛적의 자랑을 꺼낸 이유는 이번 달에 숙명대에서 열린 여성의 달 기념행사에 강연을 하러 다녀왔기 때문이야. 주최 측에서 너무나 알차게 준비해서 보내준 강연 기획안에서 “가해자의 언어가 아닌 ‘우리’ 언어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를 발견하고는 이것만큼 내가 말을 잘 할 수 있는 주제도 없다 싶어서 얼른 승낙했지.

“영어가 되었건 한국어가 되었건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는 가해자의 언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번역가는 그 언어를 도구 삼아 싸워 나가야 한다는 숙명을 안고 있다.” - <여자는 인질이다>, p. 19

아마 내가 쓴 옮긴이의 말을 읽은 것 같아. 우리가 처한 현실을 처절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든 책과 6개월 넘게 씨름한 후에 쓴 글이라 조금 비장한 어투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어. 나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언어가 가해자의 언어라고 생각해. 지금 네게 편지를 쓰는 이 언어마저도.

아이러니하지? 언어와 그토록 친밀하다 느꼈고, 대학과 대학원 내내 언어를 공부했고, 지금도 언어로 먹고살고 있는 나는 이제 와 2시간 가까이 왜 언어가 우리 편이 아닌지 토로하는 사람이 되었어.

너도 외국어 하나쯤 배워본 경험이 있을 테니 알겠지. 외국어를 한다는 게 얼마나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기분인지 말이야. 토플이나 토익 라이팅 시험을 보거나, 전화 영어를 해 봤다면 더더욱 공감이 갈 거야.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해봤을 테니까. 언어의 제약이 생각을 제약한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을 거야.

하지만 국적의 개념에서 벗어나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내가 번역한 책 <위안부는 여자다>의 제목으로 나는 <우리의 국적은 여자다>를 밀었었거든. 페미니스트가 된 후 나는 어떤 나라를 가도 그곳의 여자들을 주시하게 됐어. 일본 교토에서는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높은 나막신을 끌며 급히 걷는 마이코들에게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는 케이팝을 좋아해 한국에 가고 싶다던 헝가리어 선생님에게서,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마른 팔로 내 다리를 아프게 누르던 마사지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어.

나와 같은 국적의 어떤 남자들보다도 그들이 가깝게 느껴졌는데, 막상 우리는 불 꺼진 방에서 벽을 더듬듯 아주 간단한 단어로만 소통할 수 있다니.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도 서로의 맨손을 잡을 수 없다니. 우리의 국적이 여자라면, 우리는 모국어를 갖지 못한 나라임이 틀림없어.

편지를 읽어온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여자라는 뜻으로 ‘우리’를 써. 남자를 두고 여자끼리 다투는 걸 기정사실화하는 ‘여적여’라는 단어 대신, ‘여돕여’라는 틀 안에서 다른 여자를 돕고 또 다른 여자의 도움에 문을 열어 둬. 여자를 ‘그녀’라고 부르는 대신 남자를 ‘그남’이라고 부르는 통쾌한 시도를 해 봐.

언어는 세상을 바꾸는 게 맞아. 하지만 언어는 그보다도 언어를 쓰는 인간을, 나를 먼저 바꿔놓았어. 나는 완전히 다른 틀에서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게 되었어. 예전처럼 남에게 빌린 언어를 내 것인 양 능숙하고 편하게 쓰지는 못해. 삐걱삐걱 새로운 언어는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워. 그렇지만 이건 온전히 내 것이야. 우리의 언어야. 그게 얼마나 커다란 만족감을 주는지.

강연을 듣는 자매들에게 단 한 가지만을 전할 수 있다면 그 만족감을 전하고 싶었어. 이미 다 지킬 수도 없는 수많은 언어 규칙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규칙을 하나 더 추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지도 몰라. 사회 대다수 공간에서는 여자답게 사근사근하라는 말을 듣고, 우리끼리의 좁은 공간에서는 일단 ‘애기어’를 쓰지 말라고 서로를 엄하게 단속하지. 양쪽의 규칙을 매번 다 지킬 순 없으니 항상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우리의 언어는 쓰지 말아야 할 단어와 말투의 조합이 아닌걸. ‘흉자’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면 우리는 대신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 ‘애기어’를 쓰면 안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남자와의 로맨스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의 언어는 어떤 언어여야 할까? 우리에게는 금지가 아니라 더 나은 답이 필요해.

우리가 온 의미를 담아 멀리 밀고 나가는 만큼 언어는 우리 땅이 돼.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내 땅을 일굴 때의 뿌듯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

내 뜻이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어. 강연이 끝난 후 질문 시간에 앞으로의 언어생활을 주의하겠다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충분하지 않았던 것도 같아. 철렁해서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붙잡고 규칙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덧붙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내가 강연에서 말했듯 우리는 징검다리로 나아가는 거겠지. 한 번에 멀리 가기를 바랄 수는 없을 거야. 이번에 내가 자매들을 위해 다음으로 밟을 돌을 놓았다면, 다음번엔 강연을 들은 자매들이 나를 위해 다음 돌을 놓아줄 수도 있을 거야.

네 앞에도 징검돌을 하나 내려놓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써서 부친다.

2022년 3월 31일 

길었던 여성의 달에 혜담이.

추신 1.

내가 해준 양배추 볶음이 맛있다고 친구들이 감탄할 때마다 나는 내가 가장 이방인이었던 순간이 떠올라. 북적북적하고 담배 연기로 자욱한 ‘선술집’(말 그대로 의자도 없이 모두가 서 있어야 했어)이었는데, 나만 빼고 모두가 내가 모르는 언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내 옆에 있던, 나와 결혼했던 남자까지도 내가 아닌 그들과 대화했어.

일본 도쿄에서 머무르는 동안 몇십 번은 갔을 그 선술집에서 나는 끼지 못한 채 그저 내가 아는 것에 집중했어. 내가 아는 재료가 다져지는 모습과 볶아지는 냄새 같은 것들, 언어가 아닌 것들.

이건 그렇게 알아낸 레시피야. 몇 번이나 관찰해서 정확해.

앤초비가 어느 냉장고에나 있는 재료가 아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기엔 꼭 필요해. 앤초비는 서양의 멸치 절임이라고 보면 돼. 이 양배추 볶음을 한번 해 먹어보면 앤초비를 큰 통으로 사고 싶어질걸?

앤초비가 준비됐으면 간단해. 양배추를 1/4통 정도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씻고 물기를 빼두고, 앤초비와 마늘을 잘게 다져.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팬을 불에 올리고, 기름을 좀 넉넉히 둘러서 앤초비와 마늘을 태우듯 볶아서 향을 내줘. (앤초비 향이 마음에 든다면 앤초비를 담고 있던 기름을 같이 부으면 더 진한 풍미가 나.) 주의할 점은 앤초비 때문에 사방에 기름이 튈 수 있다는 것. 막으려면 냄비 뚜껑을 잠시 덮어도 좋아.

곧 향이 확 올라올 거야. 그때 아주 뜨거운 팬에 양배추를 넣으면 치이익 증발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나지. 양배추가 팬에 가득 찰 텐데 꼭 억지로 바로 뒤섞지 않아도 돼. 조금 숨이 죽으면 그때 뒤집어 줘도 충분해.

양배추가 투명해지면 굴소스를 조금 넣어 뒤섞고 불을 끄면 끝이야. 이제 넌 나처럼 그런 순간을 겪지 않고서도 집에서 편하게 이 양배추 볶음과 함께 하이볼이나 맥주 한 잔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추신 2.

웬만큼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도 정치가 우리 삶과 얼마나 가까운지 의식할 수밖에 없는 한 달이었지?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선언하고 여성가족부 폐지가 주요 공약이었던 후보가 당선됐다는 사실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그래도 막판에 가서 결집한 여성 유권자의 표심이 숫자로 드러나면서, 여자의 표도 똑같은 1표라는 당연한 사실을 언론계나 정치계에서도 알아차린 모양새야. 여러 기사가 나왔지만, 20대 여자가 냉동인간처럼 얼려져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양 호들갑을 떤다는 이 비판이 나는 아주 통쾌했어.

민주당 내부에서 변화를 끌어내려 애쓰는 박지현 비상대책위원장이나 정춘숙 의원, 권인숙 의원의 노력에 힘이 실려서, 여성 인권의 후퇴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내가 존경해 온 정현백 전 여성부 장관님의 인터뷰도 언제나처럼 핀트가 완벽하게 맞아.

조금 숨을 돌리고 싶다면 여성 래퍼들의 곡을 들어보면 어때? 힙합 웹진 리드머에서 한국 여성 래퍼 베스트 트랙 20을 선정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래퍼들의 좋아하는 곡들이 여럿 들어있어. 여성혐오적이고 겉멋 든 남자 래퍼들 때문에 힙합이라는 장르 전체에 반감을 갖기엔, 자기 얘기를 날카롭게 내리꽂을 수 있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여자와 만났을 때의 파괴력은 엄청나거든.

추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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