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다닌 세월이 꽤 길다. 


어른들은 그것을 ‘영감’이라 했는데, 내가 봤을 때는 도토리에 집착하는 다람쥐처럼 무언가 보이면 일단 저장하고 보는 병적인 태도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영감이라는 단어에 대한 환상 때문에 ‘예술’에 국한되어 수많은 전시를 보는 것으로 꽤 많은 도파민을 소비했는지도 모른다. 전시는 내가 그림에 대한 욕구가 없을 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엄마 손에 이끌려 인사동으로 전시를 보러 다닌 게 다섯 살, 여섯 살 때부터였다. 어릴 때는 나의 의지로 집 밖으로 멀리 가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엄마의 욕구를 위해 동행했을 뿐이었다. 육아의 괴로움을 전시를 보는 것으로 풀었던 엄마를 따라 인사동, 삼청동은 가장 만만한 동네가 되었고 나에게도 잊을만하면 영감을 채우러 가는 곳간 같은 곳이 되었다. 적어도 20살 초반까지는 그랬고 요즘은 전시가 서울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많이 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가서 보는 편이다.


인사동을 가면 자주 가는 곳이 몇 곳 있다. 일단 종로 2가에서 내려서 탑골공원 왼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미림 아트센터가 있눈데 예쁘고 좋은 화구를 사고 싶을 때 종종 들어가 구경하기도 한다. 쭉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 골목 안에 개성만두 집이 있고 그 맞은편 경인 미술관이 좋은 전시를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겨울에 개성만두에서 만두를 먹고 경인미술관을 가면 딱 좋은 데, 어릴 때 경인 미술관에 처음 갔을 때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식 건물과 오래된 건물이 어우러진 예스러운 정원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받은 좋은 충격으로 대학생이 되어도 혼자 갔다 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나와 인사아트센터를 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에서부터 걸어내려오면서 전시를 보면 딱 좋다. 인사 아트센터 옆에는 관훈갤러리가 있는데 중학생 때 일본의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준이치 오노의 전시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는편이고, 관훈 갤러리는 도전적이면서 공간과 잘 어울리는 전시를 곧 잘했던 곳이며 갤러리 안에 있는 카페도 꽤 좋은 공간이다. 그리고 나서는 삼청동으로 가는 길에 눈에 띄는 전시가 있으면 보는 편으로 긴 시간을 지나왔다. 안국역으로 건너가기 전에 <조금>이라는 이름의 솥밥집과 <토오베>라는 찻집이 있으니 시간 날 때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요즘의 북촌은 예전보다 좋은 전시 공간이 더 많다. 송현 녹지 광장의 꽃밭을 구경하고 나면 서울 공예 박물관을 가도 되고, 걸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를 보고 그 안에 있는 테라로사에 가서 커피를 마셔도 좋다. 봄날이나 가을날에 전시가 가장 많은 날을 잡아 친구나 엄마와 삼청동을 한 바퀴 돌아보며 전시를 보기도 한다. 국제갤러리, 금호미술관, 아트선재센터, PKM 갤러리, 학고재는 시간이 많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전시를 하는 곳이다. 계동 쪽으로 나오면 창덕궁과 담을 공유하는 동네에 고희동 미술관이 있다. 그곳도 좋은 전시를 많이 하니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레터를 쓰는 현재는 이수진 작가의 사물의 독백이라는 전시를 10월 26일까지 하니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관람시간은 10:00~18:00/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5길 40]


전시를 보며 너무 많은 자극에 노출된 까닭인지 인상에 남는 전시가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에는 뮤지컬과 연극 등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평면의 작업물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는 예술을 보니 새로운 자극이 되어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대신 지갑 사정은 좀 아쉬워지고 있지만.  영감을 전시를 보는 것으로 받으려는 습관을 벗어나기 위해 일상의 부분들을 작업의 자극제로 끌어오려고 노력한다. 초초분분 단위로 인상 깊은 순간을 자주 갖는 것이다. 별것 없다. 내가 그냥 ‘인상 깊게’보면 된다. 사진을 찍기 위해 보아도 좋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보아도 좋다. 20년 넘게 영감을 찾아다닌 결론은 ‘핵심은 태도’라는 것이다. 사소한 부분에서 폭발적인 자극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생활 관찰자의 태도로 사는 게 작업에 더 도움이 된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다. 배타적인 태도로는 공기 중에 떠다는 영감을 잡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꽤 긴 시간 동안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다 보면 정말 좋은 작업 실마리를 얻게 된다. 예전에 한 프로그램에 연예인 이효리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구교환 배우와 이옥섭 감독을 만났었는데, 거기서 이옥섭 감독이 사람이 미우면 사랑해버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쉽게 사랑하는 것이 여전히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서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들에게 서사는 작업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동력이 될 수 있다. 궁금하고 알고 싶고, 그러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이미 창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매일 쉽게 사랑해 보려고 한눈파는 노력을 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