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철(가명) 씨 동생 광태(가명) 씨가 퇴원을 했다.


  최근 있었던 일 중에서 이슈가 제일 많았던 일에다가 내 맘을 종잡을 수 없게 했던 일.


  광철 씨는 뇌전증 장애(간질)로 인해 오랫동안 정신과적 약을 복용 해 왔고, 약간의 경계성 지적장애도 가지고 있다. 광철 씨가 청소년 시기였던 그때부터 사회복지사로 인연을 맺은 우리는 광철 씨가 마흔 살이 넘어서도 느슨하게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사이가 됐다.

  가정사를 다 알고 있는 내가 편했었는지, 광철 씨는 무슨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도,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 왔다. 코로나가 끝이 나면, 갈비탕을 ~옥 같이 먹자고 약속한 사이다. 그의 동생 광태 씨는 이제 마흔 살이고, 세류동 쪽에서 배달일을 하면서 혼자 살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주유소에서 비중 있는 일을 한 것으로 알았는데, 목 수술을 하느라 오랫동안 일터를 비우게 되면서 배달 일로 전향을 했다고 했다. 수원을 뜨고 싶은 마음에 잠시 경기도 이천에서 자리를 잡았었지만, 얼마 전에 수원 세류동으로 다시 왔다고 했다.

  7월 초 어느 날 아침, 광철 씨로부터 걸려온 갑작스런 전화는 나를 당황케 했는데, 광태 씨가 아주대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 환자가 심근경색으로 실려 왔는데, 죽을 수도 있으니 보호자께서는 빨리 오시라” 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황한 광철 씨는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급한 대로 광철 씨를 차에 태우고 아주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아주대병원 응급실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각자의 사정들로 길게 줄을 선 대기자들이 많았다.

저기요, 전화받고 왔는데요”

급하게 외쳐 병원 스탭에게 사정 설명을 한 후에야 긴 줄을 뚫고 광철 씨는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코로나 사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가방 속에 있는 묵주를 꺼내어 “광태 씨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40세 청년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에는 그 삶이 너무 안쓰럽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불현듯 몇 년 전, 둘과 함께 식사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밥과 찌개, 반찬이 골고루 맛있는 집에서 광태 씨는 아주 야무지게 식사를 하면서 계속 ‘맛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반면 광철 씨는 식사를 하고 나와서는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아마도 평소의 식사 질이 유난히 나빴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 날의 식사가 광철 씨 에게는 무리가 되는 식사였던 것 같다. 간간이 들었던 어머니 사정,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정, 광철 씨와 광태 씨의 사정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면서 너무나 가혹한 그들 가족의 삶에 대해, 꺼 억, 꺼 억 깊은 울음을 삼키는 일밖에는 어떤 위로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그런 날이었다.
 
  그날 밤, 8시가 넘은 시간에 광철 씨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 관장님, 광태 괜찮데요. 내일 아침 830분에 면회가 된다고 세면도구랑 필요한 것 좀 가져다 달래요”

“광태가 직접 전화했니?”

“네~. 죽다 살아났데요. 관장님, 내일 아침 병원에 같이 가주세요”

  다음 날 아침 중환자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광철 씨의 표정은 덤덤했다.

“괜찮아요”, “관장님, 광태 괜찮아요”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광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관장님, 저 죽다 살아났어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간병인 좀 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중환자실은 일반 병실의 세 배가 넘는 값을 내야 하는데, 일반 병동으로 옮겨 달라고 했더니, 간병인을 구하라고 하네요. 제가 심장 수술을 해서 48시간 주의 관찰을 해야 한다구요. 여기서도 구해 보려고 여러 사람에게 물었는데, 요즘 사람이 없다고 해서요. 혹시 관장님은 가능 하실까 해서...”

“그래, 내가 한번 적극적으로 구해 볼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 하구~”

“아니요. 필요한 건 없어요”

  나는 우리 경기복지시민연대 회원이신 김춘단대표님께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고, 기관 사례 지원팀과도 의논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몇 시간 동안 수소문을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가족 이외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때론 돈 때문에, 때론 사람이 없어서 적절하게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 광태 씨, 그냥 중환자실에 몇 일 있으면 어떨까? 사람을 구할 수가 없으니~ 그래도 안정은 취하고 며칠 쉬다가 나가는 게 좋잖아. 우리도 금전적으로 지원할 방법을 알아 볼게~ ”

“ 그건 좀 미안한데~. 관장님, 그러면 상병수당인가, 병원에 입원해서 일을 못 할 경우에 무슨 수당이 나오는 게 생겼다는데, 그것 좀 알아봐 주실래요?”

“ 그래요. 내가 알아볼게요

  전화를 끊고, 상병수당에 대해 관계되는 기관에 수소문을 했지만, 지금 시범 사업 중이라서 경기도에서는 부천시에서만 가능하고, 그마저도 정권이 바뀌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답변이 날아왔다.

  결국, 광태 씨는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퇴원을 하고 만 것이다.

광태 씨는 하루하루를 벌어서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려워했다. 그래도, 국가의 제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했는데, 결국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며칠 간의 경험은 무력한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자, 삶과 동떨어져 있는 제도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2013년 송파 세 모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대두되었던 ‘상병수당’ 논의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도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엊그제, 폭우 속 반지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가족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은 어떠한가?!

우리들의 무거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우리 사회의 이면에 대해 목격하고 있는, 목격자이자 증인으로서 우리들의 존재에 대해서.

때로는 너무 무거워 피하고도 싶을 때가 있지만, 피한다고 그 이면의 일들이 없어지는 삶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직면하고, 발견하고,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함께 하되, 꾸준히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존재로서 우리들의 일을 돌아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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