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훈이 어떻게 되시나요? 요즘은 이런 질문을 하면 옛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걸까요? 예전엔 집에 가훈 하나쯤은 다 가지고 살던 때가 있었는데요. 가훈뿐인가요? 학창 시절 각 학급마다 급훈이란 것도 있었죠. 급훈은 요즘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급훈 하니까, 학기 초에 다 같이 급훈을 정하며 서로 자신의 유우머 능력을 뽐내려 노력했던 때가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그 성적에 잠이 오냐?” 같은 학업에 관련된 것부터, “되면 한다”, “물은 셀프” 같은 그저 웃길 목적의 아무 소리가 남발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급훈에 약간의 조크가 허용된 것도 꽤나 최근에 일인 것 같습니다. 학교가 말 그대로 ‘빡센 학교’였을 시절에 저런 장난을 쳤다간, 반 전체가 바로 엉덩이가 부러질 정도의 빠따(?)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급훈의 힘이 약해진 건, 한국 사회의 단체/공동체에 대한 엄격함이 느슨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거죠.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사회의 압력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체가 다 같이 지켜야 할 하나의 약속 같은 걸 짓는 것이 그저 우습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나마 학교엔 ‘선생님’이라는 역할상 나름 권위를 가진 존재가 있어서 급훈 놀이를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존재가 없는 요즘의 가정에선 가훈을 세우는 게 완전 불가능할 것입니다.


갑자기 가훈 얘기를 하는 건, 소개하고 싶은 한 가정이 있어서입니다. 약간 [세상에 이런 일이] 느낌이 나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가훈을 가지고 있는, 아니 심지어 그 가훈을 현판에 글자로 새겨 벽에 걸어 놓기까지 한, 한국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한 신혼부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영화 <잠>의 주인공인 수진과 현수입니다.

  


요즘 가장 핫한 영화인 <잠>입니다. 오랜만에 꽤 볼만한 한국 공포 영화가 나왔다는 평이 전반적입니다. 실력 있고 매력적인 두 주연 배우의 호흡을 좋게 보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구요. 무엇보다 봉준호 감독의 칭찬이 이래저래 널리 퍼지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개봉 후 3일 동안(6일~8일)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구요. 물론 경쟁작들이 개봉한지 이미 오래된 <오펜하이머>나 <달짝지근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잠>은 꽤 괜찮은 공포 영화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좋은 기획이 돋보입니다. 중산층 신혼 가정을 위주로 펼쳐진다는 점. 몽유병과 임산부라는 나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익숙한 소재를 삼았다는 점. 물론 수면 중 이상 행동은 다소 희귀한 일이긴 하지만,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많이 묘사된 적이 있기에 ‘익숙’하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아무튼 신인 감독 입장에서 영화 연출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보이는 기획 자체가 영리하게 느껴졌습니다. 깔끔하게 이 가정에서 벌어질 일만 잘 표현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결과적으로 <잠>은 참 깔끔한 영화입니다. 작품이 목표한 공포 100을, 100 그대로 충실히 표현해낸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후반부 오컬트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 다소 뻔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 또한 그곳에서 뽑아내고 싶은 공포를 효율적으로 뽑아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후 마음에 약간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한 군데 남아 있기는 했습니다. 그게 바로 글 서두에 언급한 가훈입니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 이 가훈은 극 초반에 삐뚤어진 현판을 통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극 중 현수가 안전하게 ‘혼자 자겠다’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마다, 수진의 입을 통해 다시 소환됩니다. “안 돼 자기야. 우린 부부잖아. 우리 가훈 잊었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해야 해.”


<잠>의 공포는 이 가훈으로 인해 더 공포스러워집니다. 현수의 의견대로, <잠>의 주요 문제는 부부가 따로 자면 쉽게 해결되기는 합니다. 현수가 자면서 하는 이상 행동이 가족을 위협한다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현수를 격리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모두가 제일 먼저 떠올릴 방법일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이라면 말입니다. 이 중에 코로나 시대에 안 살아본 사람이 안 계시죠? 코로나 걸리면 어떻게 했나요? 안타깝지만 그냥 격리했습니다. 가족과 살면 가족을 아프게 할까봐 가족과 격리했구요. 혼자 살아도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을 아프게 할까봐 스스로 격리했습니다.


그러니까 <잠>도 현수를 격리하면 됐습니다. 특히 이 가족에겐 갓난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옵션은 재고할 필요도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갓난 아이에겐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건, 바로 그놈의 가훈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가훈. ‘함께’를 강요하는 가훈. 물론 이 가훈을 이 집에 세팅한 건, 감독이 만든 것이겠죠. 그래서 이 가훈이 걸리적거렸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며 '걸리적거렸다'는 것은 꼭 부정적인 평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걸리적거림은 때론,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느꼈던 무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잠>의 가훈이 깨닫게 한 건, 이 '함께'를 강요하는 무서운 사회였습니다. 함께여야만 한다. 함께가 아니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해야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외부의 무언가가 아닌, '함께'를 강요하는 우리들 마음속의 가훈 현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영화적으론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무서운 영화인 것은 맞으니까요. 될 수 있으면 혼자 말고, 누군가와 함.께. 관람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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