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나이가 드니 안 좋은 버릇도 같이 생긴다. 

웬만하면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아주 간사한 버릇이다. 작업 방식이 나름 효율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굳어지며 관성으로 작업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무료함이 생기니 무엇을 보아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고, 뻔하다고 느끼는 느낌 때문에 내 작업에도 흥미가 쉽게 붙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작업을 만들기 위해서도 그렇고,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아도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매일매일 점을 하나씩 그려 선을 만들고 선을 하나씩 그려 모아 면을 만드는 일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손에 기술을 익히는 일은 그 성장이 빠르게 보이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끊임없이 하다가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면 저만치 성장한 것을 뒤늦게 알 수 있는 느린 성장을 기반으로 한 아주 긴 호흡의 일인 셈이다. 기술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습득하기 어렵고 오늘 잘 익혀도 내일이면 잊어버릴 수 있기에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어제의 습득을 반복하고 깨우치고 다시 돌아가며 느리게 전진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말한 인생은 직선이 아닌 입체적 시공간 속에서의 나선형과 같다고 한 말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전진하는 것이다. 


입시 미술 학원을 등록하고 처음 수업을 들으면 다양한 선을 긋는 것부터 시작한다. 점을 찍어서 하나의 선을 만들기도 하고 선을 빙글빙글 굴려가며 그리기도 한다. 빗금을 쳐서 그리기도 하고 볼펜이나 연필로 그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 시간이 너무 괴로웠다. 나는 정말 바로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창피하게 왜 이것부터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모든 기술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을 긋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직선을 그리고 싶어도 직선이 그려지지 않고 곡선을 그리고 싶어도 그려지지 않는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주욱주욱 그려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나면 도형의 그림자와 반사광을 찾아 면을 그리는 과정을 맞는다. 자잘하고 작은 선들이 모여 면이 되고 그 면을 잘 분할해서 어둠과 빛 중간 면 등을 그려내는 것이다. 나는 역시 이 시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어서 지루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하지 않으면 절대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가끔 내 인생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느 지점에 왔는지 되돌아본다. 점에 있는지, 선에 있는지, 면에 있는지 말이다. 그러고는 곧  가늠하는 것을 놓고 다시 할 일을 한다. 성실한 일꾼의 모습으로 작업에 임한다. 사실 예전에는 마치 무능을 잘 포장한 단어 같아서 성실하다는 말이 듣기 싫었었다. 일은 못하지만 참 성실해 같은 말처럼 말이다. 매일 그림을 그려도 일이 들어오지 않고, 매일 그려도 그림이 늘지 않는 상황은 지옥 끝에서 런닝머신을 타고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몸에 지독하게 박혀버린 성실은 실제로 일이 많이 들어왔을 때 진가를 보였다. 일이 많아도 허우적대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때 익힌 성실함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은 성실들이 점으로 모여 곧 선이되고 선은 천천히 쌓여 면을 만들고 그렇게 면이 쌓여 인생의 형태를 만든다는 믿음으로 선을 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