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좀 정신이 없었습니다. 몇 년 전 부모님이 노후자금을 투자하신 계약이 있었는데, 중간중간 들려오는 소식이 영 찜찜하더라니 결국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물론 저라고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니라, 며칠간 여기저기 묻고 검색한 끝에 우선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필요한 서류를 챙겨 집으로 찾아오신 아빠는 제가 본 중에서 가장 풀 죽은 모습이셨어요. 실은, 저와 남편도 아빠의 강권으로(아빠는 지인의 추천으로) 같은 상품을 계약했다가 영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저희로서는 꽤 큰 손해를 보고 해지했거든요. 하지만 아빠는 그 후로도 내내 이 일이 잘 풀릴 거라 막연히 믿고 고집을 부리셨는데, 이제야 현실을 인정하게 되신 거죠. 평생 재테크라곤 저축밖에 모르고 허황한 투자 같은 건 손도 대지 않았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오신 아빠가 막판에 괜한 짓을 했다며 자책하시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더군요.

이튿날, 계약 당사자인 엄마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빌딩 사이로 부는 바람을 맞으며 영동대로를 따라 걷는데 문득 엄마가 진짜 자그마한 할머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를 닮아서 키가 큰 편인 저는 이미 초등학생 때 엄마의 키를 넘어섰지만, 그동안 주로 집과 동네에서 봐온 엄마는 그렇게 작지도 나이 들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말이죠. 떨어져 걷기가 걱정스러워 잡은 엄마의 손은 주름지고 따뜻했습니다.

변호사를 만나 계약 해지와 소송에 관해 설명을 듣는 동안 저는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어요. 변호사는 친절했지만, 평생 송사를 겪어본 적 없는 70대 노인인 엄마가 혼자 여기 오셨다면, 심지어 아빠가 함께 오셨다 해도 복잡한 용어와 절차를 잘 이해하기는 어려우셨을 것 같았습니다. 저보다 이 계약에 관해 잘 아는 남편이 미리 적어준 질문을 두어 개 했을 뿐인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며 자꾸 감탄하는 엄마 때문에 좀 민망하긴 했어도 역시 같이 오길 잘했다 싶더라고요.

상담을 마친 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걱정했던 최악의 상황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고 설명하자 크게 안도하는 눈치셨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면서 아빠가 제게 “고맙다”라고 말씀하실 때,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이를 먹어서도 늘 세상 물정 모르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자식으로 취급받던 제가, 드디어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 것 같은 순간이었거든요. 그건 꽤나 뿌듯하면서도 왠지 좀 쓸쓸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날 저녁, 엄마는 시내에서 친구분과 약속이 있으셨어요. 그 시간까지는 좀 여유가 있는데 엄마를 혼자 두고 올 수는 없다 보니 다시 지하철로 서울을 반 바퀴 돌아 약속장소 근처까지 갔어요.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어 가까운 백화점 지하 식당가에서 밥을 먹는 게 어떠냐고 여쭤봤습니다. 사실 그렇게 물으면서도 엄마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아는 엄마라면 백화점에서 밥을 사 먹는 게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실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의외로 반대하지 않고 찬찬히 한 층을 돌아본 다음 냉면과 한식을 파는 식당을 고르셨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받은 저는 엄마에게 소고기뭇국을 권했습니다. 집에서 종종 먹던 음식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라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그런 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데 왜 여기서 먹냐며, 오랜만에 병어조림 정찬을 먹고 싶다고 기대감 넘치는 얼굴을 하셨어요. 비록 병어조림이 다 팔렸다는 말에 실망하고 갈비탕을 드시긴 하셨지만요. 저는 자꾸 예상에서 벗어나는 엄마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지만 어쩐지 그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어둑어둑해진 번화가를 가로질러 친구분과 엄마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바삐 오가는 거리에서 엄마는 더 작고 느리게 느껴졌어요. 저는 다시 엄마의 손을 꼭 잡고 평소보다 조금 더 씩씩하게 앞장서 걸었습니다.

바쁜데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 전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에서 임이랑 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엄마랑 여행을 다니면 좋은 건, 내 엄마를 조금 더 ‘타인’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상한 하루를 보내고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라는 타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회는 여행만이 아니라는 것을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우리의 역할은 바뀔 수 있고, 그건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았던 부모님의 다른 면을 알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변호사를 찾아갈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요.

 

아침마다 가을옷과 겨울옷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는 계절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 추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는 11월 11일 토요일 저녁 7시에 서울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김보람 감독님을 모시고 이 영화의 GV를 진행하는데, 무척 좋은 작품이니 언제든 기회가 닿는다면 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