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없이 살기로 한 지 꽤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혹시 아이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라는 즐거운 상상이라기보다, 내 인생에 그렇게 갑작스런 변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라는 고민에 가깝습니다. 만약 지금 그런 일이 생긴다면,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을까? 내 건강은 괜찮을까? 육아에 들어갈 비용은? 같은 문제가 한꺼번에 닥쳐오겠지요.

아이를 ‘싫어했던’ 사람도, 아이 없이 살기로 합의했던 부부도 “막상 내 새끼 생기니까 달라지더라”라는 얘기를 자주 듣고 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요? 내가 그렇게 ‘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래도 모든 임신은 축복일까요? 이런 의문이 떠오를 때마다 조금 외로워지곤 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과 별도로, 모두들 저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상상 속에서조차) 찾아온 생명을 반기지 않는 제가 너무 냉담하고 꽉 닫힌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이런 의문에 깊이 파고들어 ‘끝까지’ 가는 작품입니다. 첫 장편소설로 주목받아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소설가 재이(한해인)와 학원 강사로 일하며 가정 경제를 꾸려가는 건우(이한주)는 어느 날 갑자기 재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미 무자녀로 합의한 관계였기에 재이는 처음부터 임신중지를 원하지만, 건우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낳기로 하지만, 사실 재이의 마음은 두려움과 고뇌로 가득합니다. “나는 좋은 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까지는 못해!”

그러나 건우도, 의사도, 편집자도, 싱글인 후배도 재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만삭에 가까워질수록 재이는 의지나 노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와 격렬한 감정의 진폭을 겪습니다. 재이를 돌보면서 태어날 아이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진 건우 역시 집 안팎에서 과로와 스트레스, 모멸감에 시달립니다.

영화와 드라마 속 많은 여성이 계획에 없던 임신 후 아기의 심장 소리나 초음파 사진에 감동하고 눈물짓다 마침내 모성애 충만한 엄마로 성장하는 것과 달리, 재이는 줄곧 이 사건에 적응하기를 거부합니다. 자유의지가 있는 성인이, 어차피 아이를 낳기로 ‘합의’해놓고 저러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만큼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재이의 ‘이기적인’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서 좋았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는 게 이기적이냐 묻던 재이의 의지가 은근하지만 벗어나기 어려운 방식으로 꺾이고, “자기 몸 안에 있는 아이를 미워하는” 재이의 소설 캐릭터가 이해받지 못하듯, 여성은 일단 임신하면, 특히 파트너가 있는 여성의 경우, 그것은 환영해 마땅한 일로 간주됩니다. 당사자가 혼란에 빠지거나 재이처럼 우울과 공포마저 느끼는 상황이라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쓰기 위해 무자녀 기혼 여성들을 만나면서, 혹시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다면 어떻게 할지 이야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피임을 열심히 했는데 아이가 생긴다면 그건 일종의 ‘계시’나 ‘아기장수’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라는 몇몇 분의 답변에 공감해 웃음이 터졌어요. 우리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식과 별개로, ‘낳아야 한다’라는 통념이 깊이 뿌리내린 무의식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저 역시 원하지 않았지만 ‘생긴’ 아이라면, 아니 바로 그래서 더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운명에 순응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고민과 함께 아래의 문장들을 썼습니다. 

[결혼을 앞두었거나 결혼한 여성이 임신한 경우, 그 자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감정은 놀라울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출산은 결혼의 묶음 상품 같은 것이며, 이를 회의하거나 거부하는 여성은 정상을 벗어난 혹은 천륜을 저버리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중략) 가족을 비롯해 그를 둘러싼 사회의 통념은 여성이 스스로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거나 판단하지 못하게 밀어붙인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인터뷰 참여자들을 만나는 과정이 그랬듯, <나의 피투성이 연인> 역시 저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는 재이가 ‘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그가 저항하고 상처투성이가 되고 무언가를 잃고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마지막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분명 나와 다르지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여성과 만나는 건 새삼 반가운 일이더군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