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독서 유형은 무엇인가요?
➊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권만 판다, 한우물형
➋ 분야 상관없이 이것저것 같이 읽으면 좋다, 다다익선형
➌ 앞부분만 읽다 만다, 수학문제집집합부분만너덜거려형
➍ 마지막 장을 열어 결말부터 본다, 셀프스포일러형
➎ 관련 있는 책을 비교하며 본다, 비교의항해술형(?)
딱 맞는 유형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없거나, 중복되나요? 사실 아무렴 어때요. 그렇죠?
질문을 드린 마케터는 때에 따라 다른 것 같지만 요즘에는 2번을 좇다 3번의 결과를 낳게 되는 유형에 속하는데요. 그래서 한 권을 완독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제일 익숙해지고 싶은 독서 방법은 5번이에요. 연결고리를 찾고, 동질과 이질을 따져보는 과정에서의 기쁨을 누리고 싶거든요.
그래서 저도 오늘 레터 속 글이 반가웠어요. 편독자님의 글에서 《비교의 항해술》과《남성성의 각본들》, 이 두 책의 교차점과 차이점을 발견하며 함께 기쁘게 길을 잃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아래로 주욱 내리시다 따끈한 신간 소식과 북토크 소식도 반갑게 느끼시면 좋겠네요!
그럼, 오늘의 레터 시작해볼까요?

📧 오늘의 오!레터

편독자의 독서 《비교의 항해술》×《남성성의 각본들》과 함께

따끈 신간 『가족을 구성할 권리』

EVENT 『비교의 항해술』 북토크

길 잃는 항해
《비교의 항해술》×《남성성의 각본들》과 함께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요서점이나 도서관의 분류 체계엔 없는데 저에게만 존재하는 그런 범주의 책들이요. 100(철학), 300(사회과학), 600(예술), 800(문학), 900(역사)…… 이런 분류표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때론 저 번호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책들 말이지요.


하지만 편집자의 가장 마지막 업무는 안타깝게도 편집하는 책을 저 중 어떤 분류체계에 넣을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ISBN 옆에 붙는 “03300”(단언컨대 오월의봄이 가장 많이 쓰는 코드!) “93680” 따위의 다섯 자리 부가기호는 바로 그 결과물이고오프라인 서점에서 인문사회과학예술 등으로 거칠게 분류된 특정 매대를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런 작업의 일환입니다그렇지만 그렇게 무 자르듯 명확히 분류할 수 있는 책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저는 인문이기도사회과학이기도예술이기도역사이기도 한그래서 어느 하나로 분류하기 어려운 책을 접하며 꽤 자주 머리를 찧곤 합니다.

지도에는 없는 길을 찾아서: 텍스트라는 징후 혹은 단서

《비교의 항해술》과 《남성성의 각본들》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영화, 문학, 역사, 철학, 사회학, 언어학, 예술이론 등 광범위한 영역들을 가로지며 항해하죠. 두 책을 보고 있으면 분류체계라는 것이 조금은 얄궂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애초부터 어딘가로의 소속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프로젝트인 것 같거든요. 네비게이션이나 지도에 등록된 익히 아는 길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만의 경로를 발굴해나가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 책의 길 잃는 항해를 추동하는 가장 뜨거운 불씨는 ‘텍스트’가 아닐까 싶어요. 저는 두 책의 궁극적인 목표가 기존의 역사 서술을 거부하고 새로운 계보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곧 문학이나 연극, 영화 등의 다양한 문화 텍스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텍스트라는 것은 이 사회의 부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나름의 방식으로 반영하고 제시하는 작용을 통해 역으로 사회적 현실에 관한 새로운 관점과 통찰을 생산해내는 장이 아닐까요? 혹은 기존의 역사(문학사)를 절실히 해독되어야 할 텍스트로 바꿔버리고 마는《남성성의 각본들》의 너무나 멋진 인식전환은 또 어떤가요?

“(나는) 남성성을 탈구축하고, 젠더화된 문학사를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지배적 허구에 관한 텍스트로 다시 읽음으로써 더 많은 텍스트들, 더 많은 가능성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읽어내야 할 진정한 텍스트는, 바로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비평이란 결국 주류서사/지배서사로 점철된 역사와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평은 필연적으로 ‘역사화’ 작업일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제가 염두에 두는 비평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지면의 한계상 여기서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 작업을 가장 치열하게 수행하는 최신의 비평집은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입니다. 《남성성의 각본들》×《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의 케미는 또 어떻고요...)

 

역사를 초과하는 역사’: 뺄셈의 역설

사실 《비교의 항해술》과 《남성성의 각본들》의 매력은 책 제목만큼이나 서로 참 다릅니다. 두 책 모두 일종의 비평서이긴 하지만, 《비교의 항해술》이 마르크스주의 비평 이론들을 밀도 높게 체화해 영화와 정치경제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영역을 연결한다면, 《남성성의 각본들》은 젠더비평을 통해 성별이분법으로 직조된 세계를 면밀히 탐구하죠. 언뜻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두 책이건만, 저에게는 둘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제법 선명히 보입니다. 그건 바로, 두 책 모두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겁니다. 이때의 역사란, 국가가 승인하는 공식 역사, 즉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연대기로서의 역사를 말합니다.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승리자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현재/지금이 과거보다 더 진보했음을 전제하는 발전주의적 서사 말이지요.

이러한 역사는 곧 무수한 편집과 배제의 원리에 따라 실행되는 권력의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지배체제의 관점에 충실한 역사를 거부하고, 새로운 판본의 역사 쓰기를 시도하는 《비교의 항해술》과 《남성성의 각본들》 같은 작업들이 너무나 반가운 이유입니다. 저는 이 두 책이 역사와 맺으려 하는 그 새로운 관계성을 ‘역사를 초과하는 역사’라는 말로 요약하고픈 충동을 느낍니다. 지배자들의 공식 역사가 누락했던 것들을 역사화함으로써 역사의 개념을 바꾸어내고 마는 그런 역사 말이죠. 무언가를 억압하거나 배제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지닌 힘이 너무나 강력하고 위험하다는 걸 인정하는 행위 아닐까요?

《비교의 항해술》이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부대끼며 빚어내는 충격, 긴장, 갈등, 모순 같은 것들을 영화가 어떻게 기입하고 번역하는지에 주목하며 한국영화사를 새로 써내려간다면, 《남성성의 각본들》은 해방 이후~1970년대에 이르는 문학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남성성’의 각본들을 들여다보며 젠더화된 문학사를 비판하고, 한국문학사를 새로 씁니다. 한국/남한이라는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구축된 ‘한국 남자’라는 보편의 각본을 해체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 두 책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지던 초기 과정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 나아가 그 국가 자체가 외부세력(미국, 소련을 포함한 강대국)과 자본주의적 세계체계의 영향 속에서 끝없이 분열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한 결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국이라는 국가/사회를 질문하다: 보편의 각본을 넘어

그럼 지금부터 두 책을 이어줄 징검다리들을 하나하나 건너가보겠습니다. 두 책은 문학 혹은 영화라는 텍스트를 치밀히 독해하며 국가 그리고 민족(네이션)에 대한 사유를 벼려냅니다. 즉 《비교의 항해술》과 《남성성의 각본들》 모두 남한이라는 민족-국가/국민-국가가 막 구성되던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냉전기)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러한 민족-국가 형성 과정에 존재하는 공백과 균열입니다. 특히 《비교의 항해술》은 ‘민족’과 ‘국가’ 사이에 놓인 하이픈(-)의 의미를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하이픈이 민족-국가라는 단일 범주에 대한 상상이 매우 “임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임을, 즉 네이션(민족)이 반드시 국가로 환원되는 단위가 아님”을 드러낸다는 것이죠.

이런 지적은 우리로 하여금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이질적인 존재들과 공동체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이끕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국가의) 상상력의 한계치를 가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성성의 각본들》은 국가권력 혹은 지배체제가 소환하는 보편의 남성성 각본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비판으로 그 질문을 힘껏 밀고 나갑니다.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강조된 가부장의 강력한 힘을 근거로 한 지배적 남성성이 하나의 거대한 허구일 뿐 아니라, 여성(특히 기지촌 여성이나 ‘위안부’ 여성)을 비롯해 젠더를 바꾸는 행위(트랜스젠더)를 수행했던 여장남자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주변부 존재들에 대한 혐오와 억압에 기초하고 있다는 통찰을 선보이죠. 공론장은 물론 당대의 수많은 문학 텍스트들이 이들을 외면하거나 비난했던 방식을 《남성성의 각본들》은 상세히 짚어냅니다. ‘남성 지식인들’의 손에서 탄생해 주로 ‘남성 독자들’에 의해 소비된 문학/문화 텍스트뿐 아니라, 여성 작가가 쓴 다수의 작품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다른 한편, 《비교의 항해술》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비동맹 중립국들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남한의 지리적 상상력을 포착합니다. 당시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아시아-태평양의 지리적 커넥션(미국과 맺은 반공 동맹을 상징)을 구축했던 남한은 공산주의에 명확한 반대를 표하지 않았던 신생 독립국들이 ‘비동맹’과 ‘중립국’의 기치를 내거는 것에 적의를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비교의 항해술》은 민족-국가로서 남한이 독립적인 지위를 구가하기는커녕 미국 헤게모니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남한이 외친 ‘조국 근대화’의 구호는 곧 미국 헤게모니의 욕망이었던 것이죠.

 

초국적 시대에 국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 우리에게는 새로운 계보가 필요하다

요즘 같은 초국적 시대에 국가에 대해 탐구하는 시도를 두고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자본이 국민국가들의 경계를 허무는 트랜스내셔널 시대에 국가를 사유하는 것이 왜 필요하느냐고요. 실제로 최근 《비교의 항해술》을 읽은 한 독자분께서 비슷한 질문을 제기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하고 적확하며, 나아가 우리가 《비교의 항해술》이나 《남성성의 각본들》 같이 기존의 역사를 새로고침 하는 책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비교의 항해술》은 마치 누군가 그 질문을 던질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런 구절들을 써내려갑니다. “초국적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네이션적인 것을 주장하는 것은 심지어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변화한 환경에 맞추기 위해 새로운 틀을 내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 ‘시대착오의 감각’과 비시의적인 태도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저는 《비교의 항해술》의 이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의 특징 중 하나로 꼽았다던 저 ‘시대착오의 감각’과 ‘비시의성’을 저는 왠지 ‘새로운 계보를 향한 욕망’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어집니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토대와 성립 과정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를 탐구하는 급진적인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요? 지금-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순과 억압에 대해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과거를 새로운 계보 속에서 다시금 소환하는 시도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자명해진 한국이라는 단일 국가 범주 내에 복잡다단한 갈등과 충돌이 존재했고, 그 문제를 말소하기 위해 국가가 줄곧 폭력을 동원해왔다는 사실을 두 책은 정면으로 겨눕니다. 그러고는 지배자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승리’의 계보를 ‘실패’의 계보로 새로 써내죠. 역사의 길목에 켜켜이 쌓여 있을 실패의 순간들을 직시할 때, 지금-여기에 끊이지 않는 여러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남성성의 각본들》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굳건한 가부장 모델, 즉 남성을 ‘일등 시민’의 표준값으로 설정하는 그 체제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의 뿌리 자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는 한국사회 안에서도 꽤 오랜 기원을 갖습니다. 《남성성의 각본들》이 젠더적 차원에서 기존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면, 《비교의 항해술》은 책 전반에 자본주의와의 관계성을 도입하며 한국영화가 민주화 사회에 힘입어 새로운 흐름을 선보이며 진화해왔다는 목적론적, 발전론적 역사 서술과 단절합니다. 말하자면 천만 관객 동원이나 감독/배우들의 해외 진출 및 국제영화제 수상 등 표면적인 성적들에 근거해 한국영화의 발전 정도나 급진성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죠. 어떤 영화의 급진성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런 식의 지표 대신, 경험적 역사가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 내부의 근본적인 균열과 공백을 제시하는 영화의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비교의 항해술》의 관점입니다.

 

소수자를 둘러싼 재현들: 수사학 혹은 스펙터클

물론 ‘균열’ ‘공백’ 같은 표현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거든요. 그렇지만 이것을 최대한 삶의 언어로 풀어보자면, ‘소수적 경험’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국가/민족/사회라는 보편의 범주로 흡수될 수 없는 무수한 소수적 경험들과 다종다양한 이질성들이야말로 이 사회가 일종의 거대한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언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겐 그 공백을 적극적으로 탐구할 권리가 있다는 걸, 《비교의 항해술》과 《남성성의 각본들》은 일깨워줍니다.

문학과 영화 같은 예술의 형식이 존재하는 이유 역시 그와 맞닿아 있을지 모릅니다. 공식 언어/지배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그 경험들을 풀어내기 가장 좋은 장소가 어찌 보면 텍스트일 테니까요. 두 책이 각기 영화와 문학이라는 텍스트 내부의 세계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전략을 택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모든 텍스트가 소수적 삶과 경험을 동일한 밀도로 담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두 책의 상세한 텍스트 분석들을 마주할 때면, 소수성에 대한 사유가 단지 표면적인 내러티브/소재의 차원을 넘어 텍스트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저런 소수적 존재들을 그저 등장시킨다는/다룬다는 사실 자체가 소수성에 대한 사유를 담보할 수는 없으니까요. 소수적 존재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소수적 삶의 역동을 풍부하게 담아낸다는 건 참으로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책이라는 형식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요. 사실 이건 지금 이 지면에서 다루기는 너무나 어렵고 까다로운 논제이므로, 두 책이 강도 높게 비판하는 재현의 양식들을 간략히 살펴보는 정도로 방향전환을 해볼까 합니다.

《남성성의 각본들》이 주목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이 말하거나,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양극단의 방식입니다. 서로 전혀 다른 듯 보이는 이 수사는 기묘하게도 공론장에서 소수자를 배제하고, 그들의 삶을 납작하게 축소해버리는 동일한 효과를 냅니다. 다변 혹은 침묵의 수사학에는 태도와 형식에 대한 고민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습니다. 특히 《남성성의 각본들》은 기지촌 여성과 ‘위안부’ 여성을 둘러싼 이 양극단의 논의/재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춥니다. 기지촌 여성을 향한 수많은 혐오 발언을 생산한 한국사회가 정작 일본군 ‘위안부’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현상을 꼬집는 것이죠. 기지촌 여성에 대한 혐오가 남한-미군의 남성 연대를 교묘히 가리는 데 동원되었던 그때, ‘위안부’의 문제는 공론장에 부상하지조차 못했습니다. 이 역시 미군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미군은 ‘위안부’ 여성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아시아의 공업 생산력 향상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냉전 질서의 유지를 위해 직접 특수 위안시설을 운영했습니다. 다변 혹은 침묵의 수사학은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죠. 이처럼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냉전체제하에서 통치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남성성의 각본들》이 냉전기를 중심으로 다변과 침묵 사이에 놓인 긴장을 탐구한다면, 《비교의 항해술》은 현대 한국사회의 넘쳐나는 공포/고통의 스펙터클에 집중합니다.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 이후의 재난영화들을 중심으로 왜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피해에 속수무책인 ‘무력한 인민’을 재현하는 데 열중하는지 질문하죠. 특히 《비교의 항해술》은 피해자/소수자의 고통을 끔찍한 공포의 스펙터클로 전시하거나, 참사가 벌어진 현장(혹은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 간의 일정한 거리/경계를 상정하는 숭고 이미지를 통해 재난을 시각화하는 경향들을 집중적으로 문제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들은 부차적인 흐름이라기보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이미지의 핵심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스펙터클은 실상 우리가 방송 매체와 뉴스 보도를 통해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사실성factness과 사물성thingness에 대한 강박적 집착과 열망이야말로 우리 시대 스펙터클의 핵심이 아니던가?”

 

항해를 마치며: 남겨두고 싶은 차이들

이제 《비교의 항해술》 《남성성의 각본들》과 함께하는 항해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네요. 두 책과 마음껏 길을 잃어보니, 어쩐지 새로운 길이 조금씩 보이는 듯도 합니다. 지금껏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닌 두 책이 어떤 지점에서 교차하며 시너지를 뿜어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왔다면, 마지막으로는 그럼에도 남겨두고 싶은 두 책의 차이를 간단히 언급하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비교의 항해술》이 강조하듯, 비교라는 것은 공통의 척도를 마련해 이질적인 대상들을 견주면서도, 공통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와 이질성을 놓치지 않는 작업이니까요.

두 책이 텍스트와 관계 맺는 각기 다른 방식이 저에게는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각자만의 그 고유한 방식이 두 책의 역사화 작업을 서로 다른 독특한 무엇으로 만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교의 항해술》이 역사적 모순이 응축되고, 자본과 국가의 폭력이 극으로 치닫는 사회적 상황에 ‘부인’이나 ‘침묵’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텍스트 내부에서 역설적으로 역사적 조건에 관한 흔적들을 추출해내는 데 집중한다면, 《남성성의 각본들》의 역량은 무엇보다 국가와 지배체제가 강제하는 젠더규범에서 이탈해 ‘이성애 각본’을 비틀고 교란한 주변적 남성성을 조명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목에서 폭발하는 듯합니다.

물론, 우리가 손쉽게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텍스트를 더욱 치밀하고 정교하게 해체하는 《비교의 항해술》의 방식과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을 불어넣어주는 《남성성의 각본들》의 역량 모두 포기할 수 없는 항해술이겠지만요. 완벽해 보이는 구성물의 틈을 발견하는 일과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직조하는 일, 그 어떤 것도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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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구성할 권리』

김순남 지음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유대를 상상할 수 있을까? 가족상황 차별을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김순남이 저항의 언어로 가족을 다시 보자고 요청한다.

국가는 여전히 ‘시민’의 삶을 취업-연애-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단일한 생애주기의 ‘정상성’ 안에 놓인 가족 안의 것으로 상정하지만, 여러 통계나 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듯 생애주기의 ‘정상성’은 허구에 가깝다. 한때는 정상성 ‘안’에 존재할지 몰라도, 다른 한때는 정상성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오늘날 너무나 흔한 시민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질문의 방향을 가족이 아닌 사회로 돌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무엇이 가족인가’가 아니라, ‘어떠한 사회가 시민적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가’로 말이다.

서로 돌보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 모든 관계가 차별받지 않을 권리,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권리, 가족구성권의 실현은 행복한 실존을 꿈꾸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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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과 특수, 독특성과 종별성, 자본주의와 영화, 한 편의 영화와 또 다른 영화를 연결짓는 '비교'의 항해술. 그 항해를 통해 다다르게 될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비교의 항해술> 저자 하승우 선생님과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의 저자이신 영화평론가 유운성 선생님께서 함께해주십니다.

→ 책 내용이 궁금하신 분
→ 영화비평에 관심있는 분
→ 어떤 영화들을 무엇으로 '비교'하는지 궁금하신 분
→ 다양한 이론들이 영화비평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 궁금하신 분
→ 이곳저곳에 계신 시네필 선생님들

<비교의 항해술> 북토크에서 만나요!

일시 9월 27일(화) 오후 6시~8시
장소 경의선책거리 '공간산책' 2층 다목적실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37길 35)
참가비 5,000원
참가 신청 입금 후 오른쪽 신청 버튼 클릭, 구글폼 작성! → [신청]
입금 계좌 국민은행 657401-04-012406(박재영 오월의봄)

✱현장에서 책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현금/계좌이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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