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에서 경북 문경으로 보냅니다 (vol. 05)
그해 여름

  작가님, 입추의 아침입니다. 가을로 접어드는 절기라는 설명과 달리 매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지요. 이제는 압니다. 다음 절기인 처서쯤은 되어야 가을바람이 분다는 것을요. 입추가 점점 더 무더워지는 게 한두 해 사이의 일은 아니지만, 올해는 여름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여름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 같은 폭염이에요.


요즘 제게는 새로운 아침 루틴이 생겼습니다. 눈을 뜨면 그날의 최고 기온과 시간대별 기온을 확인하고 외부일정을 다시 조정하는 것인데요. 한낮에 텃밭을 돌보다 가벼운 온열질환을 앓은 후 추가한 루틴입니다. 확인해 보니 오늘 금산의 최고 기온은 35도이고, 일출과 일몰 사이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 시간은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고작 세 시간이더라고요. 작가님이 계신 문경의 날씨도 함께 확인했는데, 이곳 금산과 비슷하네요. 보내주신 편지를 꺼내 읽으며, 작가님과 함께 똥땅똥땅 산책길을 거닐 귀여운 마루의 엉덩이를 상상했는데요. 폭염에 산책 나서는 걸음을 다시 붙들리진 않았을까 걱정되네요.

 


올해의 기록적 폭염은 지구 곳곳을 뜨겁게 할퀴는 채찍 같습니다. 중동에 위치한 이란엔 연일 5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유럽의 나라들은 야외 작업이나 배송 근로를 금지하거나 단축시켰고, 임시 공휴일이 선포하기도 했다더군요. 농사를 생업을 하시는 마을 어르신들은 자라는 작물을 두고 쉬실 수가 없으시니, 기상시간을 더 당기는 방법을 택하셨더라고요. 새벽 4시,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에 논밭으로 향하실 어르신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편지를 씁니다.

 

  어르신들과 달리 저는 오늘도 (또…) 늦잠을 잤습니다. 9시가 다 되어 일어났어요. 이미 기온이 30도가 넘은 뒤였습니다. 이글거리는 문 밖의 열기를 바라보며 아무래도 ‘오늘 밭일을 힘들겠네. 무성한 저 잡초들은 어쩐다? 담장에 오일 스테인도 새로 칠해야 하고, 현관문 옆에 벌집도 제거해야 하는데……’ 생각할 뿐입니다.

이번 여름은 수풀집에서 보낸 네 번째 여름이고, 제가 새벽 기상을 하는 부지런한 농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첫 해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아요. 그래도 작년까진 여름의 텃밭과 마당을 건사하며 지내왔는데 말이에요. 달라진 건 제가 아니라 여름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작년 여름의 한 장면을 이야기해 봅니다.

 

“젊은 사람은 뭐, 목숨이 여러 개여? 왜 땡볕에서 일을 하고 그랴. 쓰러져. 일어나믄 다음 생이여.”

하필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간에 텃밭에 쭈그려 앉은 저를 본 이웃 어르신의 농담입니다. 저는 어르신의 개그가 참 제 스타일이다 생각하며 대답해요.

“아, 모르셨어요? 요즘은 태어날 때 목숨 하나씩 더 주는데요?”

담장을 사이에 둔 채로 어르신과 저는 한참을 같이 웃곤 해요. 그러다 저는 사실 좀 전에 막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누가 봐도 방금 막 일어난 행색이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셨을 테지만요. 게다가 마을의 다른 어르신들도 제가 늦잠을 잤다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작가님도 아시지요? 시골 마을에선 대문을 여는 것으로 집주인의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잖아요. 저희 집은 마을에서 가장 늦게 대문이 열리는 집입니다.


“이따 대여섯 시 넘어서 햐. 해 넘어가믄 아무래도 낫지!”

“아니에요. 저녁 때는 막걸리 마시고 놀아야 돼서 지금 하는 거예요. 오늘 친구들이 온다 그래서요.”

어르신은 허허 웃으며 지나가시고, 저는 목을 빼고 곧 도착할 친구들을 기다려요. 색색의 밭일 모자를 쓰고, 명품 st 패턴을 적용한 밭일 방석을 가랑이에 끼운 채 잡초가 창궐한 텃밭을 함께 정리해 줄, 오늘의 일꾼들이지요. 그리고 대문 밖에 차 소리가 들리면 대문 앞으로 뛰어나가 그들을 반깁니다.


잡초와 작물들의 잔 가지들이 무성했던 텃밭이 단정해질 때쯤, 일꾼들의 땀방울이 쏟아지다 못해 옷을 흠뻑 적실 때쯤, 저는 시원한 수박과 막걸리를 내어오죠.

‘새참이요!’ 외치며 그늘 아래 자리 잡고 수박을 쩍 가르고, 막걸리를 꼴꼴꼴 따릅니다. 수박 한 입, 막걸리 한 모금을 마신 일꾼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더럽게 힘든데, 나 왜 좋아?

“우리 농사꾼 체질인가.”

“그냥 술꾼 체질 같은데?”

 

제가 기억하는 여름의 장면은 이렇습니다. 한낮의 더위가 매서워도 작은 그늘과 시원한 새참이 있다면 견딜만했어요. 이웃과 농담을 나누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여력이 있었어요. 그런데 올해 여름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작가님. 오늘은 폭염에 따른 국내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가 전년 대비 3배나 증가했다는 가슴 아픈 뉴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처음 지구 온난화에 대해 배웠을 때, 교과서에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요. 그런데 기후 위기는 벌써 우리 세대 속에 와 있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폭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영영 떠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지구 온난화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하더군요. 지구 온난화의 시대가 끝나고 지구 열대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요.

 

수풀집 텃밭엔 지구 열대화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작물들이 고전하고 있습니다. 상추들은 모두 녹아버렸고, 토마토는 덜 여문 열매를 매단 채로 말라죽었습니다. 이 맘 때면 보랏빛 열매를 끊임없이 내어 주며, 밥상을 점령해 버리곤 하던 가지도 잠잠합니다. 가지밥, 가지무침, 가지전, 가지그라탕, 가지덮밥…… 아직 해 먹어야 할 메뉴가 가득한데, 지난달 수확했던 2개의 가지가 마지막이었나 봐요.

 

저는 평일에는 물을 주지 못하는 주말농부이다 보니, 제 텃밭의 작물들은 날씨와 땅이 키우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때마다 적당한 비가 내리고 그치면, 제가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자랐으니까요. 비가 그치면 우리 눈엔 물기가 모두 사라진 것 같지만 흙 속에는 수분(토양유효수분)이 남아있고, 작물들은 흙에 남아 있는 수분을 꺼내 쓰며 지낸대요. 그렇게 주말이 되어 제가 물을 줄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올해는 내내 폭우가 계속되다 이번엔 폭염이 시작되니 견디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아쉽지만 이렇게 여름 텃밭과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작가님 텃밭 작물들은 안녕한지 궁금합니다. 작가님 마음을 조금 버겁게 하던 토마토, 고추, 가지 삼총사는 무탈한지, 폭염을 잘 견뎌주고 있는지요. 여전히 작가님이 계신 집업실 ‘그리고다’의 밥상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참, 지난 편지에 워라밸을 지키는 저만의 팁이 있냐고 물으셨지요? 이런 것도 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밥상을 차려요. 그리고다의 삼총사와 가지 요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네요.


정신없이 일의 세계를 유영하다 보면 가끔은 수면 위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잊기도 하잖아요. 대충 라면이나 끓여 먹자 싶은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떨치고 텃밭으로 나가는 것이 포인트이자 결정적 고비입니다. 먼저 텃밭에 무엇이 열렸는지 보고 그 채소로 할 수 있는 간단한 레시피를 검색해요. 인터넷에 계신 여러 요리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채소를 씻고, 다듬고, 조리합니다.


그러면서 조록조록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싱그러운 채소의 향을 맡고, 나무 도마에 칼이 탁탁탁 부딪히는 감촉을 느끼고, 오묘하게 바뀌는 요리의 색깔들을 봅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밖에 양떼구름을 확인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잠시 멀어졌던 삶의 영역으로 차분히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요리가 완성되면 좋아하는 그릇에 담고, 테이블매트를 꺼내 정갈하게 밥상을 차립니다. 귀한 손님을 모시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한 끼를 먹고 나면 일의 파도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과 속도로 보다 자유롭게 헤엄칠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게 바로 밥심이 아닐까요?


  지난달엔 작가님의 두 번째 책 <귀찮지만 매일 씁니다>가 출간되었지요. 다시 한번 출간을 축하드려요. 작가님은 출간 이후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하셨지만, 덕분에 저는 무척이나 신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365일 동안 매일 쓰고 그린 기록을 읽는 행복이라니요. 제 귀찮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나날들입니다. 쨍한 주황빛으로 몸을 감싼 도톰한 책에 푹 빠진 나머지, 거리에서 주황 비슷한 걸 보면 속으로 ‘어? 귀찮 작가님 책 같네!’를 외쳤습니다. 그러다 주황 간판을 사진 찍어 작가님께 보내기도 했었고요(그것은 모든 게 다 너로 보인다 모먼트 같은 것입니다!).


작가님의 주황책은 저를 웃게 하기도, 울게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네 어귀의 축사에서 겨울에 태어나 봄이 지나기도 전에 팔려 간 아기 소의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제 마음을 뻐근하게 만들었어요. 아기 소를 보낸 뒤 밤새 울고도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어미 소의 마음과, 그 얼굴을 마주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작가님의 마음을 더듬으며 눈물짓게 되더라고요.


지구 곳곳에 기록적인 폭우와 폭염이 계속되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 하나는 인류의 과도한 육식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과 그에 수반되는 환경 피해라고 하지요. 채식은 기후 위기에 개인이 할 수 있는 효과적인 해결방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오늘도 채식으로 식사를 준비합니다. 훗날 제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작가님과 이런 편지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윤수, 그 해 여름 기억나? 나는 봄에는 봄이, 여름에는 여름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 해만큼은 여름이 너무 힘들더라고. 폭우랑 폭염이 돌아가면서 난리였지.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아프고, 죽었잖아. 그래도 그 해 여름 지나고부터 점점 좋아졌지. 다들 너무 늦었다고 그랬는데, 아주 조금씩이라도 매년 나아졌어. 이제 와서 보니 그래. 

그때 인류학자 제인 구달이 한 말이 아직도 생각 나. 어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아직 시간이 있다고. 근데 벌써 우리가 그때 제인 구달만큼 나이를 먹었네.”



추신. 그땐 저희가 서로 평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요?



2023년 8월 8일

김 알토란 미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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