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이사 날짜가 잡혔습니다.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했던 일이지만 문제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결혼 반년 전인 2014년 가을, 미리 구했던 지금의 집으로 서른다섯 개의 책 상자를 들고 왔거든요.

언젠가는 정리하겠지...베란다에 잔뜩 쌓인 상자를 볼 때마다 내일의 나에게 미루다가 9년이 흘렀습니다. 두어 번 제습제와 좀벌레 약을 밀어 넣긴 했지만, 결로로 인해 곰팡이가 심한 베란다에서 망가졌을 책을 상상하면 상자를 열기가 점점 더 두려워졌어요. 몇 달 전 북 티슈와 정리용 리빙박스를 사 놓고도 손대지 못한 건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더는 미룰 시간이 없었습니다. 버릴 책과 남길 책을 당장 골라내지 않으면 또 서른다섯 개의 썩어가는 종이무더기와 함께 이사해야 할 테니까요.

마스크와 목장갑을 끼고, 거실에 신문지를 펼친 다음 먼지와 곰팡이로 뒤덮인 상자를 올려놓았습니다. 한 권씩 꺼내 버릴 책과 팔 책, 남길 책으로 분류했어요. 버릴 책은 분리수거용 장바구니에, 팔 책과 남길 책은 북 티슈로 표지를 닦은 다음 마른걸레로 다시 닦아 각각 택배용 종이상자와 리빙박스에 넣다 보니 금세 땀투성이가 되더라고요. 처음에 세 개였던 리빙박스는 계속 추가 주문하다 보니 열다섯 개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책 정리를 방해하는 건 역시 오랜만에 찾은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이 책을 갖고 있었나? 아, 이거 진짜 재밌었지. 이 책 어딨는지 몰라서 전자책 샀는데! 하면서 반가워하다 보면 왠지 앉은 자리에서 다시 읽고 있거든요. 그중 저를 가장 기쁘게 한 건 한국 순정만화 단행본들입니다. 이 책과 저 책, 그리고 요 책도 샀다니 과거의 나야, 장하다!

저는 90년대 순정만화 황금기의 수혜자입니다. <르네상스>, <윙크>, <댕기> 같은 만화 잡지가 최고의 보물이었고, <별빛 속에>나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같은 고전은 만화방에서 정신없이 탐독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여성 만화가들은 무척 젊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데뷔해 이십 대에 대작을 내놓은 분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김진,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같은 작가들이 펼쳐놓았던 이야기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떠올릴 때마다 경이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 방대한 텍스트와 시각자료를 얻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탄탄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십대 시절 삶의 반경이 집, 학교, 학원,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시장까지였던 저에게 만화는 그 너머의 세상을 알려주고 어른의 세계를 보여주는 매체였습니다. 역사적 사건, 장르의 매력, 가치관의 충돌, 새로운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등 만화는 거의 모든 문화적 자극의 원천이었거든요.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본 건 김은희 작가의 <M&M>에서였어요. 음악을 잘 모르는 주인공 중 한 명이 정장 차림으로 추모공연에 입장했다가 펑크족에게 “프레디의 열렬한 추종자인가 봐. 상복까지 입고 온 걸 보니.”라고 놀림 받는 장면이 있는데, 후에 제가 프레디 머큐리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나니 이 장면의 맥락과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더라고요. 이 작품에는 프린스, 데이빗 보위, 지미 헨드릭스 같은 아티스트가 종종 언급되거나 단역으로 등장하는데, 그걸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창작자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독자와 나누는 것이고, 독자는 그가 보여주는 세계를 통해 자신의 세상을 조금씩 넓혀간다고.

강경옥 작가의 <라비헴 폴리스>는 저에게 SF적 상상력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준 작품이에요. 우주의 어느 도시에서 경찰로 일하는 두 주인공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거든요. 박희정 작가의 <호텔 아프리카>는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을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갈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마다 한 편의 현대소설 같거든요. 고등학교 시절 독서실에서 이 만화를 읽으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벅차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길 때마다 만화책을 샀어요. 새 책은 물론 헌책방을 지날 때마다 눈에 띄는 대로 사오기도 했지요. 모든 이야기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그것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열왕대전기> 같은 작품은 초판과 개정판을 다 갖게 됐는데 둘 중 어느 쪽도 버리고 싶지 않으니 열악한 부동산 상황을 한탄하며 이사할 집 베란다에 리빙박스를 몇 개까지 쌓을 수 있을까 계산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자와 냉장고 옆에 쌓아둔 책탑, 벽을 온통 메운 책꽂이의 책들이 남아있는데도요.

아직도 가끔 궁금합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열광하며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푸르매’로 짓겠다던 친구들 가운데 그것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있는지. 고등학교에 가면 <점프트리에이플러스> 같은 생활이 펼쳐지길 기대했던 친구들은 모두 저처럼 실망했는지. 대신 <걸스> 같은 추억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에스할름 이야기>를 좋아했던 친구들은 요즘 어떤 로판을 재밌게 읽는지.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일 모양입니다.

가을옷을 꺼낼 때가 되었어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