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에서 충남 금산으로 보냅니다 (vol. 18)

부러 모른 체 하는 일

그리고다에서 모처럼 늦잠 잔 날이었어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블라인드 사이로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 보였습니다. 눈을 비비고 엉거주춤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자 일년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 눈 앞에 와 있었습니다.

함박눈 내린 날이요. 밤새 내린 무거운 눈으로 온 산과 들, 작은 집들의 지붕 지붕 마다 흰옷을 덮고 있더라고요. 아주 추운 날 내리는 가벼운 눈이었으면 매서운 바람에 쓸려 가는 통에 쌓이지 않았을텐데, 수분을 머금고 내린 눈은 두텁게 쌓여 마을을 설국으로, 풍경을 수묵화로 만들었어요.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을 정말 좋아해요. 이 상태로 고립될 수 있어서요. 쌓인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나가질 못하니 일정을 미루고 약속을 취소할 수 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생겨서 좋고, 사람 만날 일도 없으니 씻지도 않고 잠옷 차림으로 창박을 내다보며 잔잔히 내리는 눈을 볼 수 있어 좋아요. 할 건 많지만 "에라 모르겠다" 난로에 어묵탕이나 끓여 먹고 눈 그치면 종종 걸어다닐 길만 빗자루로 살살 쓸고, 심심하면 눈사람이나 만들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 말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시골의 낭만이 있지만, 그 중 최고는 이렇게 눈이 올 때가 아닐까 싶어요.

 

참고로 그거 아세요? 저희집 툇마루 빗자루는 작가님의 첫 책인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의 굿즈인 미니 싸리빗입니다. 문과 가까운 곳에 걸어 두고 눈이 왔을 때마다 이 싸리빗으로 왔다 갔다 할 자리만 살살 털고 창고에 가서 큰 빗자루를 꺼내 마당을 쓸어요. 유용한데다 걸어 두면 예쁘기까지 해서 제가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눈이 하루종일 내려 마당을 쓸지 않고 집에서 그치길 기다리다 결국 책상 앞으로 갔어요. 이 낭만에도 마쳐야 할 일이 좀 있었거든요.

 

일하기 전에 책상 밑에서 마루와 티타임을 가졌습니다. 발 시리지 않게 작업 하려면 책상 밑 온도를 전기 난로로 좀 높여줘야 하거든요. 시내에서 사온 호빵 두개를 데우고, 디카페인 커피를 내려 책상 밑에 앉았습니다. 마루가 앉을 방석과 간식도 준비하고요. 가져온 간식은 날름 먹고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는 마루에게 "마루 앉아~, 기다려!, 코!, 손!, 돌아! 감사합니다" 등 온갖 재롱을 다 시킨 뒤  못 이기는 척 호빵 끄트머리를 살짝 떼어주기도 했어요. 이런 순간이 집안의 온기가 채워지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면서요. 작가님이 소망이를 무릎에 앉히고 폭풍 칭찬하며 스다듬어주는 순간처럼 말이죠. 덕분에 따스해진 책상 밑에서 마루는 낮잠을 청하고, 저는 책상에 앉아 정국이의 노래를 노동요 삼아 밀린 일을 했습니다. (자이언티의 눈을 기대하셨다면 미안해요. 모름지기 노동요는 신나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잠깐 소강해진 틈에 마루와 마루의 발바닥이 폭 젖도록 산책도 했어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줄 없이 자유롭게 산책하던 마루는 녹아가는 눈 냄새 덕분에 평소보다 더 신나보였습니다. 즐거운 산책 후 집으로 돌아오던 길, 어디선가 파드득 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흠칫 보고는 개구리나 두꺼비가 벌써 일어난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물에 걸린 손바닥만한 작은 새 였어요. 노루나 고라니가 농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가장자리를 따라 막아둔 초록색 울타리망 아시죠? 그 망을 두겹으로 덧대어 울타리를 세운 바람에 작은 새가 무심코 들어갔다 이리 묶이고 저리 묶여 못나오고 있더라고요. 파드득 파드득! 한번 하고 나면 한참을 숨만 쉬었다가 다시 파드득 파드득 거렸어요. 이미 망에 걸린지 오래 되어 지칠대로 지친 느낌이었지요.

 

지난 번 편지에서 새가 집안에 들어왔을 땐 너무 놀라서 만지지도 못했다고 적었었죠? 그런데 작가님과 메일 한번 주고 받았다고 좀 친해졌나봐요. 갑자기 그 친구를 구할 용기가 났습니다. 처음엔 울타리망 사이를 살짝 벌려주면 나가겠거니 했는데 아무리 벌려도 새가 나가지 못하길래 가까이 보니 새의 발톱에 아주 얇은 섬유가 촘촘하게 끼어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발톱에 있는 섬유들을 떼어 줬는데 문제는 발목이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칭칭 감켰는지 가뜩이나 얇은 발목이 샤프심처럼 얇아져 있었고 그 위로는 퉁퉁 부었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꽉 조이는 것 같아 그냥 피가 통하기라도 하라고 섬유를 오므려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새나 제 손이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조여드는 탓에 발목이 이리저리로 막 휘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부러지거나 끊어질 것 같아 아무래도 발목의 섬유를 풀긴 포기하고 집에가서 칼이나 가위를 가져와 발목 주변의 섬유를 잘라내야겠다 싶었죠.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작은 새는 날아갔습니다.

 

얼떨결에 작은 새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저 조차 포기한 순간, 파드득하고 빠져나갔어요. 몇 초 정도 멍하니 망을 쥐고 있다 보니 순간 마루가 생각나더라고요! 목줄이 없었단 아득한 사실도 같이요.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봐도 아무데도 없어 심장이 덜컥하던 순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마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도 찾아보세요!)

 

다행히 옆에서 얌전히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귀엽고 기특한 아기 마루를 안고 집으로 들어와 흙투성이가 된 발을 씻기고 밥을 챙겨준 후 메모장에 편지에 담을 조각 글을 마구 썼어요. 저 오늘 엄청 큰 일을 했다고, 작은 생명 하나를 구했다고 자랑하려고요. 사진이라도 찍었음 어떤 새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텐데 그럴 겨를이 없었어서 아쉬웠어요. 동시에 그래도 이 일을 누구보다 기뻐할 것 같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 기뻤고요.

 

이렇게 적고 보니 낭만이 가득 담긴 2월의 일상같지만, 사실 이건 일상이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2월에 시골집에 머문 날이 손에 꼽았거든요. 눈이 왔던 이틀을 제외하면 도시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여러가지 일로 내내 밖에서 지냈어요.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보살피느라 며칠은 병원에서, 또 며칠은 할머니댁에서 보내기도 했고요. 검진 받는 친구 따라간 서울의 모 산부인과에서 몇 년 동안 요지부동이었던 자궁근종이 갑자기 세 배나 커지고 작은 난소 난종까지 생겼단 소식을 듣게 되면서 이리저리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느라 시골집에서 지낼 틈이 없었습니다. 수풀집에서 지내지 못해 편지 쓸 소재 주머니가 동났단 말이 이번 편지 쓸 때처럼 와 닿을 때가 없었습니다. 어디든 노트북만 켜면 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저 역시 예전 이야기를 꺼내어 쓸 수 있겠지만 가짜 글을 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꼭 이 자리에 있어야만 제대로 써지는 게 있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눈오는 날 쓰기 시작한 이번 편지를 월 말인 오늘 그리고다로 들어오고 나서야 매듭 짓고 있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작가님도 참 힘든 2월이었구나 싶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퇴고의 늪에서, 정확히는 쓰면 쓸수록 깊어지는 자기 혐오와 자존감 추락의 늪에서 빠져나오신 걸 축하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저는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한동안 무기력해지는 시간이 오는데 작가님은 어떠실런지 모르겠어요. 전 조금 무기력한 상태였거든요. 병원을 들락날락 거린 것 자체가 큰 프로젝트였기에 여러모로 지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만나면 수렁 같았던 2월을 견대낸 우리에게 술 한잔 사는 건 어떨까요?

 

혹여 걱정하실까 덧붙이자면 자궁근종과 난소낭종은 위험한 병도, 죽을 병도 아니에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기까지 며칠 많이 울었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난소낭종은 생리 전에 잠시 나타났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도 있고, 근종은 여성에게 흔히 생기는 친구들이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너무 커지거나 복통이나 하혈 같은 증상이 동반 되면 개복이나 복강경 수술을 통해서 떼어내야 하고 그 지점에서 무척 암울했지만 제가 자궁근종이 커져서 고민하는 만화를 인스타에 올렸을 때 정말 많은 독자님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궁근종은 여성의 친구라고, 커지지 않게 잘 관리하고, 너무 커지면 수술하면 되는 거라고 씩씩하게 말해주셔서 하루 종일 근종만 생각하면서 진지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었어요. (혹시 이 글을 읽고 자궁근종이 걱정되는 분들이 있다면 인스타에서 #자궁근종만화 해시태그로 검색하셔서 제 자궁근종 만화에 달린 댓글 일독을 권유합니다. 위로와 정보, 용기를 얻게 되어요! 이 시대의 여성들이 얼마나 씩씩한지도요!) 마치 질염을 감기에 비유하듯 자궁근종도 흔히 생길 수 있는 거라고 하니까 근종 때문에 밤새 펑펑 울던게 머쓱해질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술과 카페인, 환경 호르몬이 근종을 키운다고 해서 되도록 플라스틱 용기는 반찬통으로도 피하고, 커피는 디카페인으로 마시고 있어요. 술까지 완벽히 줄이려다 오히려 더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술은 주 1회로 줄였습니다. 스트레스 잔뜩 받은 날이나 속 답답한 날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 조차 참고 살면 무슨 낙으로 살겠어요? 또 비타민D가 자궁건강에 좋대서 편지를 마무리 짓고 나면 비타민D 합성을 위해 오늘도 마루와 햇볕을 쐬러 갈 예정입니다.

 

오늘은 늘 챙기던 동네 강아지 간식 말고도 봉지와 목장갑도 챙겨 가려고요. 원래는 주워도 주워도 계속 나오는 농약 빈 병과 비료 포대, 새참으로 마시고 버린 막걸리 통, 여름에 잘 쓰고 겨울엔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땅에 버려 버린 멀칭 비닐을 보며, 심지어 이듬해 멀칭한 비닐을 걷어내지도 않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부어 농사 짓는 모습을 보며 저주를 퍼붓고 비관하며 포기했는데, 새를 구한 날부터 플로깅을 다시 시작했어요. 새를 구하고 나니 다른 것도 구하고 싶어져서요. 무언갈 해서 돌아오는 결과 보다 그 일을 함으로써 느끼는 자기효능감 쪽을 더 크게 바라보게 되었달까요. 그렇게 어제는 개천에 쓸려온 스티로폼 박스를 줍고, 막걸리 병 무더기를 줍고, 라이터를 주웠습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줍는 것도 이 계절에만 할 수 있는 특권이에요. 날이 따스해지면 동물들이 깨어날 테고, 제가 사는 문경엔 뱀이, 특히 아주 위험한 독을 가진 까치살무사가 정말 많거든요. 그땐 물기가 있는 곳은 얼씬도 못할 거예요. 특히 마루와의 산책 시간엔요. 바짝 마른 곳을 골라 집게를 들고 플로깅 해야겠죠.

 

앞서 저주했다는 표현을 쓰고 보니 혹여 이 서간문을 마을 어르신들이 보고 서운해하시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마을 행사엔 코빼기도 안보이는 처자가 차라리 와서 말로 하지, 이렇게 사람들 다 보는 서간문에 대문짝만하게 적어 마을의 수치를 만들었다 생각하시면 어쩌지 하는 상상도 되고요. 나름의 시선이라는 필터를 만들어 통과시키고, 제멋대로 편집한 후 세상에 내보이고 있다는 작가님의 말처럼 오늘 제가 쓴 글도 편협한 시선에서 쓴 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편협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러 떨어져 있고 싶습니다.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 수록 이해 관계가 생겨 아무 말도 쓰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어쩌면 작가는 이기적이란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직업 아닐까 싶어요. 눈치를 무릎 쓰고 나와 내 주변의 것을 표현하는 업이니까요.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단 걸 알 정도로 예민한 사람들이라 속으로 끙끙 앓고서도 모른 체 하며 뚜벅 뚜벅 써내려가는 우리의 일을 응원해봅니다. 때로는 목화솜 같은 말에도 상처받는 게 사람인데 세상에 아무도 상처주지 않을 안전한 글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에도 용길 내어 책을 완성하신 작가님 정말 수고 하셨어요. 만나면 찐하게 술잔을 기울여요!

 

2024년 2월 29일

덜 떨어진 애송이 달에게 제대로 당한 귀찮 드림.

추신. 그리기를 쓰기처럼 편하게 해보자는 뜻에서 Emotion Drawing Club이 아닌 Emotion Writing Club이라고 지었어요. 누구나 환영입니다! 하지만 애송이 달에게 습격 당해 지난 편지를 보낸 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해서.. 3월이 되어야 시작할 것 같아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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