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까 또 한달만에 보내는 레터 되어버린 것 실화냐구~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답니다. 먹진심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이번에는 독일에서 포도를 딴 이야기를 할 예정이라고 공개한 바 있었는데, 일단 제가 있던 곳이 인터넷이 너무 느려가지고....* 도대체 레터를 쓸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에 딱 돌아왔더니!! 힘들어....생각보다 독일에서 많은 일을 해가지고 약간 쓰러져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쵸, 왜 독일에 갔느냐, 그것도 포도를 따러. 그것부터 설명을 해야겠죠. 뭔가 거창한 사유가 있을 것 같지만은! 사실 제가 늘 그렇듯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작년 2월에 국내에서 살롱오(Salon O)라는 내추럴와인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아는 수입사의 통역 알바를 했었거든요. 그때 만난 내추럴와인 생산자에게 농담처럼 "언젠가 수확철에 놀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했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거에요. 

아니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뺄 수가 있나요? 사람이! 가오가 있지! 그래서 일단 뭐 "그래!" 하고 그자리에서 비행기표를 사버린 것입니다. 맨정신이었냐고요? 그럴리가요......와인을 이미 좀 마신 저는 참 생각없고 용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제가 한참 와이너리를 배경으로 하는 웹툰 키미앤조이를 보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포도 수확철과 와이너리에 대한 로망이 조금 샘솟고 있을 때였단 말이에요. 그리고 8달이 지난 지난 10월 2일, 저는 정말로 독일에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와이너리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디서 묵을지도 모른 채로 겁도 없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출발했어요.

도착해서 1시간 정도를 더 달려 도착한 곳은 플로어스하임-달스하임 지역에 위치한 와이너리였습니다. 비앙카 앤 다니엘 슈미트 와이너리(Weingut Bianka und Daniel Schmitt)인데요, 한국에서도 제가 이 생산자 와인을 좋아했어요. 맛이나 향이 어렵지 않고, 누구와 마셔도 좋을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다음날 바로 수확에 나섰습니다. 보통은 10월 중순까지 수확을 하는데, 올해는 기온이 높아서 수확이 조금 일찍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했어요. 와이너리 바로 옆에 포도밭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은 와이너리와 밭이 조금 떨어져있더라고요. 그날그날 양조 계획을 세우고, 어떤 밭에서 어떤 품종의 포도를 딸 지 정해지고 나면 신발을 갈아신고 수확용 가위를 챙겨들고 밭으로 갑니다.

아 그런데 저는 와이너리에 보통 거대한 하나의 포도밭이 있는건줄 알았거든요. 근데 보통은 그렇지가 않대요. 이쪽에 조금, 저쪽에 조금 이런 식으로 포도밭을 조각조각 사기 때문에 온동네에 조금씩 밭이 있대요. 그걸 다 합하면 한 20헥타르 정도....솔직히 아직도 헥타르 단위가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헥타르...? 책에서나 보는 단위일 줄 알았는데 제 일상속으로 들어오다니 인생 오래살고 볼 일이에요.

제가 이번에 수확한 품종은 총 여섯가지에요. 독일의 오래된 청포도 품종인 바이스브르군더(Weißburgunder), 또 다른 독일의 적포도 품종인 카베르네 미토스(Cabernet Mitos), 산미가 좋은 청포도 품종인 리즐링(Riesling), 송이가 크고 껍질이 얇고 달콤한 적포도 메를로(Merlot), 그리고 아로마가 좋은 적포도 렘베르그(Lemberger), 그리고 부드러운 타닌감이 특징인 적포도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이에요.

수확은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이어지는데요, 포도를 열심히 따서 거대한 박스에 넣다 보면 시간가는줄 모르겠더라고요. 와인용 포도나무는 키가 낮은 편이라 포도를 따려면 허리를 꽤나 많이 숙여야 해서 포도 수확을 한참 하고 나면 "아이고"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저희가 하루에 포도를 1톤에서 2.5톤정도 땄다고 하더라고요. 스스로도 입이 떡벌어지는 양....끝없는 포도의 산.....사람만한 박스를 네다섯개씩 채우던 날이 이어졌죠.....전생의 일 같네요. 쉽지 않았어....

수확된 와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양조가 되는데요, 첫 번째는 즙만 내서 양조를 하는 방식입니다. 일단 즙을 내기 위해서는 디스테머(Destemmer)라는 기계를 사용해서 포도알만 털어내요. 그런 다음에 착즙기계를 통해 주스를 뽑아내요. 착즙 기계는 아주 낮은 압력으로 천천히 즙을 뽑아내는데, 포도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해요. 이때 갓 짜낸 리즐링 주스를 먹어볼 수 있었는데, 진짜 너무나 감동하고 만 것입니다....아니...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고....? 제가 살면서 마셔본 과일즙 중에 가장 맛있고, 가장 향긋하고, 가장 아름다웠어요. 아직도 그 생각을 하니 입에 침이 고입니다. 

또 하나는 스킨컨택(Skin Contact)인데요, 가지를 털어낸 포도알을 즙을 내지 않고 껍질째 발효시키는 방식이에요. 스킨컨택으로 만들어진 화이트와인들은 독특한 산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일반 화이트와인보다 색도 짙고, 바디감도 조금 더 있는 편이라고 해요. 커다란 욕조같은 발효조에 포도를 넣은 다음에 5~10일간 자연발효를 시킵니다. 당도를 체크해 발효가 끝나면 즙을 짠 다음에 다시 발효조에서 숙성을 하는 과정을 거쳐요. 

제가 있는 3주동안 이 스킨컨택 와인들을 관리하는 것이 저의 주요 업무 중에 하나였거든요. 발효가 되고 있는 포도들은 위로 떠오르기 때문에 매일 손으로 눌러서 섞어주어야 했는데, 한참 발효가 진행되는 초반에 손을 넣어보면 정말 뜨끈뜨끈해요. 빵 발효할 때 처럼요. 별도의 효모를 넣지 않았는데도 자연발효만으로 이렇게 될 수 있다니? 매번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수확 마지막 날, 제가 수확을 시작한지 8일째였는데, 마지막 포도를 다 따고 정말 끝이야?! 하면서 신나게 기뻐했습니다. 저는 겨우 8일 했는데도 끝이 났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쁜데, 6주째 수확중이었던 와이너리 사람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어린 카베르네 프랑이 자라고 있던 마지막 밭을 떠나 와이너리로 돌아오는 길에 매니저 중 차를 이렇게 포도나무 가지를 앞유리에 꽂았습니다. 귀엽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사실 이게 그 지역의 전통이래요. 수확이 끝난 와이너리에서는 트랙터나 차를 포도나무 가지로 장식해서 수확이 끝난 걸 알리는 겸 기념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길에서 포도나무 가지로 장식한 차를 마주치면 축하를 해주기도 한대요. 

독일에 와서 이렇게 함께 포도를 따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었을까요? 저를 그냥 잠깐 왔다가는 방문객이 아니라 와이너리의 팀원으로 대해준 와이너리의 두 생산자에게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포도 수확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주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어요. 저희는 매일 아침 6:30부터 수확을 시작했거든요. 그 시간에 밭에 나가면 아직 하늘에 달이 떠있어요. 어스름한 새벽빛과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공기 사이에서 포도를 따다 보면 해가 뜹니다. 신새벽의 첫 빛이 단풍이 들고 있는 포도나무 잎에 닿는 그 순간에 혼자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몰라요. 그때 저희는 리즐링이라는 청포도 품종을 따고 있었는데, 그 포도는 알이 아주 투명하거든요. 햇빛 사이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기 어린 리즐링을 따서 박스에 넣으며 이 순간은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 와이너리는 지금 새로운 챕터를 앞두고 있습니다. 와인 생산자는 둘째를 임신했고, 조부모님 세대부터 대대로 와인을 만들어왔던 건물에서 나와 독립된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어요. 제가 도착했을 때 이제 막 전기 공사가 끝나서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내년 여름 전에는 건물이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독일 라인헤센 지역의 내추럴와인 페스티벌을 주최하는게 꿈이래요. 아름다운 와인바도 만들고요. 건물 곳곳에 대해 설명해주며 내년 여름의 청사진을 그리는 두 생산자 다니엘과 비앙카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독일에서 제가 포도만 배웠겠습니까!! 그럴리가요! 맛있는거 뭐라도 배워와야지! 라고 하지만 진짜 독일은....엄청난 동네였어요. 구운 고기와 감자(찌거나 vs 튀기거나 vs 으깨거나) 만 먹어서 굉장히 식생활이 힘들었던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진흙 속의 진주(까진 아닌 것 같긴 한데)가 있었어요. 바로 와인샬러(Weinschorle)라고 부르는 리즐링 칵테일이에요. 어떻게 만드냐고요? 정말 단순하게 리즐링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을 1:1로 섞어줍니다!

제가 갔던 지역은 독일에서도 와인 최대 산지라고 불리는 라인헤센(Rheinhessen) 지역인데요, 서늘한 기후 때문에 리즐링을 기르기에 적합하대요. 리즐링 품종의 포도는 여름이 너무 더우면 산미가 날아가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잘 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리즐링 와인은 약간의 잔당감과 함께 기분좋은 산미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에 탄산수를 넣으면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아주 기분좋은 맛이 되어요. 독일에서는 여름 내내 맥주만큼이나 많이 마시는 음료래요. 저도 주말에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이 와인샬러를 마셨는데, 청량함에 정신을 못차릴 뻔 했답니다. 

독일의 가을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의 가을도 못지 않게 아름답네요. 가을이 너무 짧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가을을 맞아 맛있는 음식들이 한가득인데, 구독자님 식탁에는 무엇이 오르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저는 11월에 맛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돌아올게요. 그럼 이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