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잘 지내셨나요....? 저는 잘 지내지 못했어요.....아니 언제 시원해지냐고요 도대체!!! 주말에 비오고 나면 시원해지는거 맞는거냐고!! 😭 저는 사실 땀을 아주 많이 흘리는 편이 아니었는데,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체질이 변했나 세상 땀투성이 인간이 되어가지고 말이에요, 여름이 아주 고난하답니다. 

저번에 잠깐, 아주 잠깐 19~21도일때, 드디어 가을이다!!! 가을이 왔다!!! 손만 스쳐도 사랑이 시작되는 아주 위험한 계절이 온다!! 했는데 사랑은 무슨 더위가 다시 돌아왔어요 각설이도 아니고 왜이렇게 돌아와 진짜 여름 너 이제 좀 퇴근해 퇴근하라고 ㅠㅠ 힘들지도 않나. 처서매직은 어디갔니, 처서 왜 일 안하구 도망갔니 ㅎㅏ

마지막 가는 길에 뭐라도 남기고 가고 싶은지, 그래도 요 몇 주 하늘이 아주 예쁘고, 무지개가 많이 뜨기는 했죠.....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보며 핸드폰을 드는 장면은 늘 좋습니다. 지쳤던 사람들의 눈과 입에 맑은 빛이 어리는 그 짧은 순간. 그 순간을 위해 결국 우리는 살아가는 것인지도요. 

하지만 이번 주말이 지나면 정말로 가을하늘이 찾아와주면 좋겠습니다. 맑고, 청명하고 짙은 파랑이 구름 몇 점을 걸고 머리 위를 가득 채워주기를 바래요. 근데 더위가 저만의 문제는 아니고요, 채소가 너무 비싸요.....과일은 비가 너무 와서 맛이 없고.....아니 사과가 어떻게 이렇게 비싼지. 홈플러스에서 6개에 만오천원이 넘더라고요. 아주 맛있거나 좋은 사과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주문해둔 무화과도 비때문에 수확이 더뎌 받을 일정이 요원합니다. 이래저래 입맛도 세상 떨어지구, 해서 사실 이번주 레터에 무슨 내용을 써야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그렇습니다. 패션계에 OOTD가 있다면! 먹진심에는 "이번주에 먹는 일에는 진심인 사람이 먹은 것!"이 있다! (느낌있는 줄임말 만들어보고싶었으나 매우 실패함) 

일단 이번주의 EAT 아이템 1번은 포도에요. 포도가 대표적인 여름 과일이긴 한데, 워낙 벌레도 잘 꼬이고 하다 보니 잘 사먹는 과일은 아니었어요. 샤인머스캣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고요. 뭔가 사각사각한 식감이 땡길 때 청포도 정도만 가끔 사먹었달까요. 하지만 어릴땐 포도를 참 좋아했어요. 제가 살던 제천에 포도농장이 하나 있었는데, 어쩐지 여름마다 거기서 포도와 포도즙을 사다 먹었거든요. 생각해보면 포도보다는 포도즙이 메인이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 

오늘 어쩌다보니 강화도의 포도농장에 체험을 다녀왔는데, 어린시절의 생각이 나더라고요. 엄마가 그 포도원에 갈때 따라가기도 했거든요. 포도를 따보거나 한 기억은 없는데, 제 키보다는 컸던 포도나무와, 아주 진한 초록색의 잎들, 그 사이로 흰 봉지가 매달려있던 풍경만큼은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아주 오랜만에 가본 포도농장의 포도나무들은 제 키보다 작고, 제 기억보다 얇았답니다. "이렇게 작았었구나." 나직이 읊조리면서 포도밭 사이를 걸었습니다. 그냥 어쩐지, 알 수 없이 아련한 느낌이 들었어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가 그리운 듯한, 아주 엷게 아련한 그런 느낌이었네요. 

생전 포도를 사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이번주에는 아는 분이랑 포도를 공동구매(?)하기도 하고, 포도를 따기도 하고 하는 바람에 집에 포도가 아주 풍년입니다. 저녁에 집에서 혼자 있다가, 포도를 씻어서 그릇째 들고 침대에 기대 누워서 먹었는데요, 포도가 참 달더라고요. 벌써 다음주면 끝이래요 강화도 포도는. 좋은 것은 왜 꼭 늦게 알게 될까요? 있을 때, 제 철일 때 열심히 먹어야 하는 법이에요 역시. 

아, 올해는 귀인 덕분에 새로운 품종의 포도를 맛보기도 했는데요! 너무 신기했어요. 와인 양조에 쓰이는 지중해 품종의 포도들이라는데, 포도에서 단맛과 신맛이 아니라 다른 맛이 나다니?! 와인 양조용 포도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살짝 엿본 느낌이랄까요. 이래서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구나 싶더라고요. 와인에서 나는 맛들이 포도에서 모두 나는데, 한 입 먹고 나서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포도를 도로 봉지에 넣어서 다음날 친한 셰프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지고 갔습니다. 너무 신기하고 맛있는건, 혼자 먹으면 안될 것 같아요. 특히 좋은 건 다 주변 셰프들이랑 나눠먹고 싶더라고요.

저는 그냥 맛있다!하고 먹지만, 셰프들이 먹으면 더 멋진 결과물이 나오잖아요. 언젠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아주 맛있는걸 만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이랄까요. 친구들도 먹고 다들 눈을 반짝 하고 빛내줘서 기뻤습니다. 그치? 맛있지! 새로운 맛이지! 좋아할 줄 알았어! 사실 그리고 저는 10월에 독일로 포도를 따러 가요! 제가 좋아하는 와이너리의 수확을 돕기로 했거든요. 독일에 가면 어떤 맛의 포도들을 만나게 될지 벌써 두근거립니다. 친한 셰프들에게 소개하고싶을 정도로 좋은 맛들을, 이야기들을 또 한가득 가지고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래요.

하지만 저는 몇 년 전 알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생땅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을 껍질채 삶아서 살살 까먹기도 한다는 것을! 그럼 세상에 부드러우면서도 아삭아삭한, '살캉하다'라는 말 말고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그런 식감이된답니다. 이 식감이 진짜 너무너무 좋거든요. 볶음땅콩의 고소함도 좋지만, 저는 이 생땅콩의 살캉한 식감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이따금 지방에 놀러갔을 때 생땅콩조림이 반찬으로 나오면 아주 신나게 먹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본가에 갔는데, 생땅콩 삶은 것이 있지 않겠어요? 정말 오며가며 얼마나 주워먹었는지. 오랜만에 보니까 더 반갑고 좋더라고요. 그러고 있는 저를 보더니 엄마가 "컬리에서 생땅콩 사서 삶아먹어~"라고 말해서 바로 생땅콩을 주문했습니다. 

껍질째 삶는 건줄 알았는데, 그냥 겉껍질 벗긴 채로 삶아도 되나봐요. 넉넉하게 물을 잡고, 소금 한 큰 술이랑 생땅콩을 넣고 끓였습니다. 15분 정도 보글보글 끓여줬는데요, 생땅콩을 집에서 삶아본건 처음입니다. 30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처음인 일이 많다니. 요즘 특히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하면서 많은 처음들에 둘러싸여 지내고 있는데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릴때 언니 오빠들에게 사는게 지겹지 않냐고 했는데, 다들 30대 되면 더 재밌고 좋다고 했었거든요. '나는 20대도 지겨워 죽겠는데 도대체 뭐가 좋다는거야'라고 생각했는데, 30대가 되니까 정말 그렇네요. 어떤 면은 여전히 지겹지만, 아직도 처음은 이렇게 많이 남아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30대가 된 나'가 새로워요. 20대 때와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다른 것을 좋아하게 된, 그런 저 자신을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 새롭고 즐겁습니다.

분명 땅콩을 삶고 있는데, 어쩐지 냄비에서는 아주 진한 라면국물 향기가 났습니다....묘하게 강렬한 향기였어요. 땅콩 특유의 감칠맛과 지방질이 소금이랑 만나 시너지가 난걸까요? 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 냄비에 라면을 끓였었나....? 🤷‍♀️ 설거지 잘 했을텐데....?!🧐 한 알을 꺼내 씹어보니 살캉살캉한 딱 제가 좋아하는 그 맛입니다. 소금을 좀 넉넉히 넣었더니 간도 딱 맞았고.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체에 걸러서 찬물로 잘 식혀냈습니다. 

작업할 때는 먹을 것을 앞에 두지 않는다는 저만의 룰이 있지만, 오늘은 살짝 어겨보았어요. 딱 앞에 두고, 레터를 쓰고 있는데요, 있었는데요, 좀....너무 먹나? 싶어서 살짝 옆으로 치웠다가, 야금야금 반절이 넘게 먹어버려서 놀라서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상태가 되기 전에 뚜껑을 덮어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간간하고 살캉하고 부드럽고 고소하고 그런 마성의 삶은 땅콩....참을 수 없었어....

오랜만에 먹으니까 더 좋네요. 술안주로도 좋겠어요. 맥주보다는 소주나 위스키? 단 향이 있는 술이랑 먹으면 단짠단짠 느낌일 것 같기도 해요. 구독자님, 생땅콩의 계절은 딱 지금이 시작이에요. 혹시 오뎅탕속의 잘 익은 무를 좋아하신다면 삶은 땅콩에도 도전해보시길 바라요! 아!!!! 볶은 땅콩은 삶지 마시구요!! 꼭 생땅콩 사서 삶기에요. 왜냐고요? 제가 해봤는데, 안되더라고요!!!! 하하하하하ㅏㅏㅏ 😇

이번주에는 레시피랄 것이 없는 간단한 것들만 가지고도 레터를 써보았네요. 이제 9월 말에는 추석이 있잖아요. 다들 명절 계획은 잘 짜셨는지 궁금해집니다. 말도 살찌는 계절에 인간이 살찌지 않아서야 쓰나요. 가족들과 함께이든, 친구들과 함께이든, 혼자이든 맛있는거 많이 드시고,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며 보내는 즐거운 명절 되세요. 저는 명절이 지나고 10월에 돌아올게요. 

기상예보를 보니까 말이죠, 정말 손끝만 스쳐도 사랑에 빠지는 위험한 계절이 다음주에 시작되는 모양인데, 트렌치코트와 가죽자켓을 입을 수 있는 짧고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하시길 바라요. 저도 그럴게요. 10월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