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남편은 새로운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희동에서 거리가 꽤 멀어 지난 주말부터 우리 부부는 아침형으로 생활 패턴을 바꾸고 있습니다. 11시 취침, 5시 기상. 주중에도 가끔 저녁 식사 후에 위스키를 한 잔씩 마시고 12시가 넘어야 잠들었던 우리 부부는 새해부터 그 습관이 바뀐 것입니다. 남편을 위한 간단한 아침 샌드위치나 구운 고구마, 드립 커피 등을 챙겨주고 출근시키면 저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노트북을 켭니다. 글을 쓰고 레시피를 정리하면 오전 9시. 수업이 있으면 1층 스튜디오로, 수업이 없다면 그간 미뤄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고 집안일을 하니 요즘은 하루가 더 길어진 것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다니는 한의원의 원장님은 "밤 10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만 잠든다면 아무리 수면시간이 짧아도 병 안 걸려요”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요 며칠 저의 컨디션이 좋습니다. 새해 들어 얻은 아침형 생활 패턴이 꽤 맘에 들고 도움이 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1월은 '나의 생활 패턴'에 대해 돌아보기 좋은 시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점검해 보시면 어떨까요?


눈이 내리기 시작한 아침에 연희동에서 히데코 올림


  오래간만에 요리교실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정규반은 아니고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모여 4년째 다니고 있는 팀이에요.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이것저것 만들어가며 같이 식사하는 모습이 계속 해외에 사는 저로서는 참 부럽습니다. 이 멤버들에게는 한 테마로 요리 수업을 진행하기보다는 때마다 메뉴를 달리 구성합니다. 이번 주에는 일본식 중화요리를 만들었어요. 평소 배달시키거나 방문하는 중국식 레스토랑의 음식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맛이에요.


  베이징식 전병(肉饼=rou bing)을 만들기 위해 반죽부터 했습니다. 로빙 만드는 모습을 중국인들이 본다면 웃을 것 같은데 어쨌든 비슷하고 맛있게 만들었어요. 팀 구성원들 모두 10대 자녀의 엄마들이라 “집에서 꼭 해봐야겠다”라며 열심히 함께 만들었습니다. 곁들인 요리는 팔보채, 양고기와 대파 볶음, 토마토와 달걀 볶음. 뼈가 아닌 안심을 다져서 맑게 닭육수를 내는 법, 팔보채를 위한 채소들은 바로 볶지 않고 국물에 데친 후 볶는 법 등의 팁들을 알려주면서 함께 만들었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일본식 중화요리를 먹어본 셈이죠. 미대 오빠인 작은아들이 수업 준비를 도우며 그날따라 “팔보채 먹어볼래!”라고 했는데, 멤버분들이 싹 다 포장해 가신 덕분에 아예 다시 새로 만들어주었답니다. 우리 멤버분들도 약속대로 자녀들을 위해 그날 배운 요리들로 풍성한 식탁을 만드시길 바라요!

(히데코 요리교실의 수강생분들이 찍어주신 사진들입니다)

  대학생 무렵부터 멋진 안경을 쓴 사람이 퍽 부러웠다. ‘원시(遠視) 기미를 보이는 것’이 자랑이라고 할 때마다 엄마와 친구들은 "눈 좋은 애가 별소리를 다 한다"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곤 했다. 언젠가 눈이 나빠지면 안경이 어울리는 어른이 될 거라는 자그마한 꿈. 어린 시절부터 근시로 고생하며 어떻게 하면 안경과 작별할까만 바라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 꿈은, 40대가 되어서야 이뤄졌다. 원시는 노안이 일찍 찾아온다고 하는데, 30대 후반부터 흰머리가 하나둘 눈에 띄더니 마흔 살 생일을 기점으로 신문이나 책의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흔에 흰머리와 노안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꽤 충격을 받아 드러누웠겠지만, 노안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니 바라고 바라던 안경을 장만하는 일만 생각했다.


  사실 그동안 근시가 매우 심한 남편에게 ‘중년 남자라면 손목시계랑 안경에 돈을 써야지!’라며 안경에 투자하도록 부추기곤 했다. 내가 이루지 못한 ‘안경 쓴 멋진 중년의 모습’을 남편에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남편에게는 단골 안경점이 생겼는데, 안경을 새로 맞추거나 수리할 때면 함께 따라가서 프랑스, 벨기에 브랜드의 이런저런 안경테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언젠가 안경을 맞추면 여기서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눈이 나빠지기도 전부터 안경을 맞출 곳은 미리 정해두고 노안을 기다렸던 셈이다. 드디어 안경이다!

  내 생에 첫 번째 안경이라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안과에서 ‘노안 경향이 있다’라는 진단을 받아냈다. 그리고, 홀로, 그 안경점으로 향했다. 남편과 같이 가면 ‘끽해야 노안인데 왜 그렇게 비싼 테를 사느냐’라며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하니까. 그런데 한껏 기대에 부푼 내게 안경점 사장님은 ‘노안 기미’가 있으면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볼 때만 쓰는, 이른바 노안경(돋보기안경)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결국 쇼케이스에 진열된 프랑스 브랜드 안경을 못 본 체하며 흔해빠진 저렴한 테에 도수가 낮은 노안용 렌즈를 넣은 안경이 첫 안경이 되어버렸다.


  어찌 됐든 난생처음 갖게 된 안경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눈썹을 다듬거나 립스틱을 쓱 바를 때밖에 보지 않는 거울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얼굴에 커다란 물체가 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주로 활자를 읽을 때만 썼는데,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노안경 쓴 모습은 그동안 상상했던 ‘안경이 어울리는 멋진 40대 중년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얼굴에는 안경이 안 어울리나? 아니, 그렇지 않아. 안경이 어울리는 중년 여성이 되겠다는 나의 꿈은, 어떻게 되는 거지?’ 덧없이 사라져가는 꿈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얼마간 첫 번째 노안경은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환경에서 책이나 컴퓨터를 볼 때만 쓰다가 이대로 꿈을 버릴 수 없다며 결국, 그 안경점으로 달려갔다. 크림색 안경테가 마음에 들어 ‘가네코 안경’을 골랐다. 모처럼 근사한 안경을 골랐으니 평상시에 계속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 안경점 사장님 권유로 다초점 렌즈를 넣게 되었다. 두 번째 노안경은 결국 비싸졌다. 나에게는 안경을 사는 일이 마치 보석을 사는 듯한 느낌이었다. (네, 보석만큼 비싸서 아마도 6개월 카드 할부로 결제했던 거 같아요). 다초점 렌즈니 계속 쓰고 있을 수 있겠다는 바람과는 다르게 다초점 렌즈에 적응을 못 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했다. 아무 데나 두고 다녀서, 식은땀을 흘리며 찾은 적도 여러 번이다. (네, 마치 보석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기분이었던 거 같아요)


  요즘은 그때그때 TPO에 맞춰 안경 색을 바꾼다. 오늘 의상은 전체적으로 블랙 톤이니까 검은색 테로, 오늘 밤은 흰 스웨터니까 안경도 크림색 테로. 그래서인지 사람들 만나는 즐거움 또한 커졌다. 10년이 흐른 지금, 책상 한편의 안경 케이스에 놓여 있는 노안경을 세어보니 여덟 개. 히데코의 안경 컬렉션은 더욱더 충실해져간다.

  1997년 5월 나는 당시 다녔던 글로벌 IT기업에서 큰 상을 받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상자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부부동반으로 럭셔리한 일주일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당시 혼자였던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갔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커플 중 어머니를 모시고 온 건 나뿐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일주일간의 휴가는 오랜만에 효자 노릇도 좀 하면서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는 어머니는 비행기도 처음 타보셔서 효자 코스프레 한번 하는 김에 확실히, 그동안 모은 마일리지를 써서 회사에서 나온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을 퍼스트 클래스로 업그레이드까지 해서 모시고 갔다. 그래서 어머니는 비행기를 타면 늘 기장이 인사하러 오는지 알고 계신다.


  생전 처음 요란하게 어머니와 즐거운 일주일을 보냈고, 나파밸리 와이너리의 파티, 메이저리그 야구 관람, 금문교 아래의 요트 같은 럭셔리한 체험보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회사에서 인정받고 상을 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나파밸리에서 즐거웠던 바비큐의 기억이 생생하고, 그 바비큐의 로망이 나를 10여 년 전 연희동 단독주택으로 오게 만들었다.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마당에서 바비큐를 즐기고 있다. 그때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물론이다.

(좌) 1997년 당시 케이블카, 트램 등을 이용할 수 있었던 티켓 두 장. 일정상 이용하지 못한 채 새것으로 아직 남아 있다.
(우) 2003년 4월 19~21일에 이용했던 티켓. "April"과 숫자 "19, 20, 21"이 긁혀 있고 1997의 티켓은 깨끗하다.

  여러 가지 일정으로 재미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시간을 보내면서, 당시 나와 사귀던 중에, 한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있던 히데코의 이야기를 어머니와 많이 하게 되었고, 어머니도 좋아하셨다. 나는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런데 내가 가진 히데코의 연락처는 도쿄의 친구 집 팩스번호 달랑 하나였다. 그땐 전화도 이메일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그 메모를 수첩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마침 리츠칼튼 샌프란시스코의 객실에는 팩스가 있었다. 큰 맘먹고 짧은 영어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Do you marry me?”라고 보냈다. 사실 Will you marry me? 가 맞지만 제대로 된 콩글리시를 구사하는 정통 한국인답게 멋진 문장으로 태평양을 가로지른 청혼 팩스를 날려 보냈다. 답이 올 거라 확신을 했지만 히데코의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림의 몇 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잠시 후 히데코답게 쿨한 무척 짧은 팩스가 리츠칼튼 객실의 팩스로 스르륵 올라왔다.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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