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도 너무 긴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해피 아워>는 무려 5시간 28분짜리입니다.  휴일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볼 수 없죠. 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우연과 상상>을 보고 좋아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들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었어요. 마침, 정지혜 영화평론가 님이 6월에 있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하마구치 감독을 소개하는 여러 기획에 참여하셨다기에 냉큼 각주* 구독자만을 위한 글을 부탁드렸어요. 6월의 버킷리스트 무주산골영화제 소식도 미리 전하니 끝까지 엄지손가락(스크롤)을 멈추지 마세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시면서 기꺼이 글을 보내주신 정지혜 영화평론가 님, 고맙습니다! (마티랑 계약한 영화를 쓰는 태도(가제)도 쓰고 계시죠?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긴긴’ 영화 3

이 정도의 시간은 할애되어야 한다

🔮 정지혜 영화평론가


❶ <해피 아>, 328분, 왓챠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기 연출의 핵심으로 대사와 그것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에 두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말해왔다. 그의 이런 관심이 집약되고 집대성한 영화가 <해피 아워>(2015)가 아닐까 싶다. 영화의 시작은 2013년 고베에서 하마구치가 직접 진행한 ‘즉흥연기 워크숍 인 고베’로 거슬러 간다. 워크숍 참가자들의 연령은 다양했고 절반 이상이 연기 경험이 전무했다. 5개월간 23차례 진행된 워크숍 끝에 참가자들 모두 <해피 아워>의 연기자가 됐다. 영화의 주요 인물이라면 30대의 네 친구 준, 사쿠라코, 아키라, 후미. 지금 그녀들은 각자의 삶에서 곤경과 변화를 겪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난제를 마주하고 변심과 결심의 순간을 맞을 것이다. 5시간 1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인물 하나하나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중심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그녀들에 관해 말하려면 이 정도의 시간은 할애돼야 한다. 하마구치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문제라 한다.


<우연과 상상>, 121분, 5월 4일 개봉!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미지와 개념의 영화 앞에서 간과되기 일쑤였던 배우와 이야기의 가능성에 깊이 매료돼 왔다. 그의 영화가 빚어내는 마법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이때 특히 그가 놓치고 싶지 않은 건 연기와 이야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 오직 그 순간에,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을 우연의 발생이다. <열정>(2008), <친밀함>(2012), <해피 아워>(2015)를 거치며 그는 배우가 연기할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타진해왔고 그 우연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우연과 상상>은 우연을 이야기의 중심 테마로 풀어낸 경우다. 영화는 ‘마법’, ‘문은 열어 둔 채로’, ‘한 번 더’라는 소제목의 세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각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우연한 만남, 작은 실수, 오해와 오인이 부른 파장과 예측 불허의 삶의 진행과 지속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하마구치가 생각하는 현실 속 비현실의 순간이며 영화적 환상이라 하겠다.


<드라이브 마이 카>, 179분, 왓챠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는 아내 오토와 사별했다. 그들은 섹스와 스토리텔링, 구술과 글쓰기를 둘러싸고 은밀하고 독특한 방식을 공유해왔지만, 결정적 순간에 서로를 정확히 마주하지 못했다. 아내를 잃은 지 2년 후, 가후쿠는 다양한 언어를 쓰는 배우들을 모아 연극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리려 한다. 그의 곁에는 15년간 함께해온 자동차가 있다. 그는 차를 운전하며 대본을 확인하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전속 운전사 미사키는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고 안정적으로 차를 몰며 가후쿠와 동행한다. 이때 자동차는 격렬한 스펙터클과 속도전의 기계 장치가 아니라 감정을 거둬낸 채 담담히 이야기와 인물의 세계와 만나는 상태, 그 자체다. 마치 하마구치가 지향하는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인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 자유와 책임, 삶과 예술을 둘러싼 여러 겹의 알레고리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고요히 움직여 나간다.

⤷ 🌱 죽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이 원작이더라고요. 하루키가 ‘고요한 장소’로 그려낸 자동차를 하마구치 감독이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해요. 영화에서 ‘차’라 함은 주로 광적인 속도감을 선사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많이 쓰여서인지 정적인 느낌이 상상이 잘 안 돼요. 소설은 짧아서 읽는 데 1시간 남짓 걸렸는데, 영화는 3시간이라니! 이 또한 재밌는 부분. 저는 어린이날 볼 영화, 이걸로 정했어요! 

우연의 영화, 영화적 우연을 만드는 사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 정지혜 영화평론가


전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이름, 하마구치 류스케. 그는 최근 <드라이브 마이 카>(2021)로 제94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국제장편영화상과 제74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우연과 상상>(2021)으로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를 향한 이 열렬한 환대는 꽤 오랫동안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일본 영화계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하다. 도쿄예술대학교 영화 및 뉴미디어 대학원에 입학해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를 만나게 된 건 특별하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실은 ‘파탄’에 가까운 일이라는 구로사와의 가르침은 지금도 그가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을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이 관건이다. 배우와 연기에 관한 그의 관심은 그때 이미 시작됐다. 2008년 졸업 작품 <열정>은 하나의 분기점이 돼줬다. 이전까지 그는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한 그대로 영화를 찍는데 몰두했다면, <열정>에서는 단 한 번밖에 벌어지지 않는 현장의 우연을 카메라로 포착하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후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이루는 핵심 개념이라 할 만한 ‘우연의 마주침’ 역시 그때 꿈틀거린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이라면 3‧11 동일본 대지진이다. 그는 센다이 미디어센터의 기획과 도쿄예대 대학원의 제안으로 시민들이 겪은 재해에 관한 아카이브 필름을 만든다. <파도의 소리>(2011), <파도의 목소리: 게센누마 편>(2013)*, <파도의 목소리: 신치마치 편>(2013), <노래하는 사람>(2013)까지 이른바 ‘도후쿠 기록영화 3부작’이다. (* 두 편의 <파도의 목소리>는 한 작품의 두 부분에 가깝다.) 이 작업은 이후 그의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재해와 지진이 일어난 장소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거나, 재해의 감각과 장면을 재현하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그가 영화를 통해 그리는 타인의 세계, 그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재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말을 듣는 일은 곧 ‘어떻게 타인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그때 듣는 자의 몸짓은 어떠한가’의 문제와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연기의 핵심과도 닿아 있다. 그것이 한데 모여 완성된 영화가 바로 <해피 아워>(2015)다. 비전문 배우들과의 작업은 <친밀함>(2012)에서도 시도됐지만, <해피 아워>를 준비하고 만들면서 ‘연기하는 몸’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에 이른다.


존 카사베츠, 에릭 로메르를 비롯한 수많은 시네아스트의 영향 아래 있는 엄청난 영화광 하마구치 류스케. 그는 전 세계를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본의 영화감독 미야케 쇼와 평론가 미우라 데쓰야와 함께 주기적으로 영화 공부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를 향한 열정, 사람을 향한 친밀함, 계속해 나아가려는 추동력까지. 그 사이 어디쯤 그가 만들어갈 또 다른 우연의 영화, 영화적 우연은 이미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무주산골영화제를 소개합니다 ❞
오늘 각주* 휴재 특집을 꾸며주신 정지혜 영화평론가는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예심 등을 진행했다.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공저, 2021), 『아가씨 아카입』(공저 및 책임 기획, 2017) 등에 참여했다. 올해 안에 마티에서 『영화를 쓰는 태도』(가제)를 낼 예정이다.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책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랐다면?
도서출판 마티
matibook@naver.com
서울시 마포구 잔다리로 127-1, 레이즈빌딩 8층 (03997) 
02-333-3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