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작업실을 얻기까지 내 인생은 저항 그 자체였다. 


가족과 살면서 온전히 내 시간을 위해 작은방에 딸린 베란다에 책상을 놓고 여름에는 더위와 사투를 벌이고 겨울에는 추위에 떨던 중학생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부터는 동생과 중간 방과 작은방을 두고 더 좋은 방을 차지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던 나는 동생보다 짐이 더 많았고 늘 더 큰 방을 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서울의 아파트 구조는 애매해서 침대와 책상만 놓아도 더 이상의 다른 구조를 모색할 수가 없었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며 중간 방과 작은방을 번갈아 쓰던 동생과 나는 그렇게 20대가 되었다. 


20대 초반까지는 괜찮았다. 학원이며 대학교며 밖에 나가는 일이 많았고 방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 방이 있어야 한다는 집착이 좀 덜했던 시기였다. 문제는 20대 중반에 생겼다. 회사도 관두고 학교도 졸업한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지 싶은 막연한 두려움과 이제는 정말로 작업을 해서 작업이 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시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백수로 지내던 중에 동네에서 공유 작업실을 쓰고 있던 그래픽 디자이너 선배의 제안을 받아 같은 공유 작업실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공유 작업실이 조금씩 생기던 때라 월 10만 원으로 저렴하게 쓸 수 있었다. 사람들과 불필요한 관계를 지양하는 나는 커다란 하나의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에 환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그곳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너무나 필요했던지라 집이 아닌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집에서 우울하게 지낼 수도 있었던 3년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성장하는 시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작업을 사람들과 소통한다고 해서 더 잘 나오는 것이 아니었고 나는 온전히 방해받지 않고 그림에 집중할 공간이 필요했다. 공유 작업실을 써보니 더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사람들과 방도 나눠쓰고 여러 공간을 움직이며 방법을 찾아보아도 작업은 꼭 혼자 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는 계기만 되었다. 그 즈음 같은 공간을 쓰던 친구와도 소원해지면서 공유 작업실을 나오는 게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3년을 썼던 공간을 야반도주하듯이 오전에 가족과 가서 짐을 아주 빠르게 집으로 옮겨왔다. 그렇게 집을 작업실 삼는 다른 시기가 왔다. 


공유 작업실을 사용하면서 운 좋게 정기적인 외주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 회사가 투자를 좀 더 받기 시작하면서 얼떨결에 잠시 정규직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작업실을 삼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은 집 거실뿐이었고 매일 오전에 컴퓨터 책상으로 출근하는 나와 아침을 먹고 회사를 가야 하는 가족들과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전에 화상회의라도 해야 하면 나의 예민함을 극으로 치달았다. 고양이 율무는 내가 화상 회의를 할 때마다 혼잣말을 하는 집사가 안쓰러워 함께 말을 하기 시작했고 오전에 일어나서 일을 하기 위해 거실의 책상으로 가는 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러다 2020년에 큰일이 터졌다. 동생은 대학원 논문, 아빠는 은퇴, 엄마는 주부, 나는 집. 이렇게 4명의 성인이 서울 어딘가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24시간 내내 벗어나지 않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똑같은 성격의 나와 아빠가 가장 심각하게 싸워 그 주에 집을 나와 연희동 쪽 자취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갑작스러운 나의 독립을 받아들이지 못해 우울증이 왔고 동생은 자신의 논문을 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즈음에 은퇴 후 다른 일을 하던 아빠의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다. 그렇게 나는 또 야반도주하듯이 금천구 모 오피스텔에서 자취인지 작업실 생활인지 알 수 없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입신고를 해서 나는 등기에서도 가족과 분리되었다. 어쩌다 보니 생애 첫 1인 가구가 된 것이다. 


다음 레터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