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의 본문 디자인 요소는 거의 불변입니다. 요소 자체는 그렇지만, 요소를 어떻게 표현할지는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선택지가 있는 것 같아요. 열려 있는 가능성들에서 최적의 글꼴과 글자 크기, 글자 색, 행장, 줄 간격, 여백을 결정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입니다. 편집자는 디자이너의 판단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독자가 이 책을 통해 시각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함께 고민합니다.

그중 마티 편집부가 좀 더 신경 쓰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주와 정렬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각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이자 독자에게 재미와 불편을 선사하기도 하는 두 요소에 대한 편집자의 고민을 풀어보았어요.

풋노터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본문 요소도 뽑았고, 지난 화요일에 소박하게 진행한바흐 교회 칸타타 청음회 전합니다. 

날카롭게 살겠다』 본문 일부. 낱말 간격이 일정하나 오른끝이 들쭉날쭉한 왼끝맞춤(위)과 자간과 낱말 간격이 흐트러질 때마다 디자이너가 손봐야 하는 양끝맞춤(아래).

왼끝맞춤을 좋아하시나요?

🌱 죽순


오늘 아침, 혼자 재미있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마티 기출간 도서가 (전부는 아니지만) 제법 꽂힌 책장 앞에 서서 왼끝맞춤 조판이 된 책을 골라내봤어요.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현재 유통되는 130여 종의 본문 조판 형태를 모두 기억하진 못하니 헷갈릴 것이라 짐작했죠. 그러나, 저는 왼끝맞춤 책만 쏙쏙 골라냈습니다! 

🌱죽순 천재만재 설을 주장하고 싶지만, 나름 그럴싸한 기준이 있었어요. 디자이너 그리고/또는 책의 성격. “이 디자이너는 왼끝맞춤 선수지!” 하는 판단은 없었지만, 단행본 조판의 유구한 규범인 양끝맞춤을 흔들었을 법한 디자이너의 작업을 골랐습니다. 거기에 ‘이 책은 왼끝맞춤 괜찮겠네’라고 생각하며 꺼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날카롭게 살겠다』 : 타자기를 사용했을 시기의 여성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 / 조정은 디자이너

마이너 필링스』 : 시인이 쓴 에세이, 변동폭이 크고 강렬한 차별 감정에 대한 글 / 김동신 디자이너

미래주의 요리책』 : 이보다 독특한 선언, 문학, 시나리오는 없음 / 오새날 디자이너

젊고 아픈 여자들』 : 『마이너 필링스』와 같은 앳 시리즈, 구어에 가까운 글쓰기 / 김동신 디자이너

재생산에 관하여』 : 심포지움 발표와 토론의 현장감 / 오새날 디자이너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 폐허가 된 체르노빌 탐방기, 일본 무크지 번역 / 신덕호 디자이너

학교에 페미니즘을』 : 초등학교 교사들이 쓴 업무일지의 이면 / 오새날 디자이너

함락된 도시의 여자』 : 전쟁 중 지하 방공호나 다락에서 손으로 쓴 일기 / 오새날 디자이너

확률가족』 : 아파트 키드 2030세대의 회고적인 글 / 홍은주.김형재 디자이너


솔직히 본문 시안이 왼끝맞춤으로 나오면, 편집자는 여러 가지를 세심히 따집니다. 책의 크기, 글줄의 길이, 한 면에 들어가는 글줄의 수, 전체 분량, 문장의 톤과 성격, 밀도, 독자가 취할 독서 방식(기본적으로 발췌독이냐 통독이냐), 학술서 여부 등. 양끝맞춤일 때도 마찬가지로 따져야 하는 요소들인데, 왼끝맞춤일 때 더 신경 쓰는 건 사실이에요. 왼끝맞춤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독자들이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디자이너와 출판사가 독자의 편의를 무시한 채 자기 취향을 내세우려고 왼끝맞춤을 선택하는 건 아닙니다. 왼끝맞춤을 하면 낱말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고, ❷ 글줄 끝 낱말이 온전한 덩어리를 유지하며, ❸ ‘자유’ 조판으로 불렸던 형식인 만큼 판면의 운동성, 리듬감을 전달한다는 디자인적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왼끝맞춤이 양끝맞춤에 비해 판독성과 가독성을 현저히 저해한다는 일관된 연구 결과는 없습니다. 다만, 단의 폭이 짧을 때 왼끝맞춤의 실효성이 더 크고, 행장이 길고 페이지가 연속될수록 그 매력이 크지 않다는 주장이 있어요. 왼끝맞춤과 양끝맞춤은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디자인 역사에서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독자가 출판사에 항의 전화를 할 만큼 왼끝맞춤은 여전히 낯섭니다. 그런데도 왼끝맞춤 조판을 디자이너와 출판사가 선택할 때에는 ‘책과 어울린다’라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어울린다’라는 판단 또한 주관적이므로 설왕설래가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마티는 에세이, 일기나 구어에 가까운 문장, 현장감 등을 왼끝맞춤의 리듬에 실어왔던 것 같아요. 왼끝맞춤의 역사(?)를 본다면 저항, 자유, 반문화 등의 주제어와도 어울릴 듯한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왼끝맞춤이면 좋았을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좀 더 공부와 경험이 필요한 부분 같아요.


우리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운문, 산문, 논문 등 다양한 형식과 단어를 익혀야 하듯 ‘시각적 문해력’을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경 지식 없이 어떤 형태의 좋고 나쁨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잠시 접어두고, 왼끝맞춤에 대해 디자이너들이 쓴 글을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요? 


이 글을 쓰고 왼쪽맞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글

우유니 디자이너, 미움받는 왼끝맞춤 대한 변호.

김동신 그래픽 디자이너,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출판문화 2021년 2월 호. 

로빈 킨로스, 왼끝 맞춘 글: 타이포그래피를 보는 관점』, 최성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얀 미덴도르프, 텍스트와 타이포그래피』, 김지현 옮김, 안그라픽스, 2015.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면

헤라르트 윙어르 지음, 당신이 읽는 동안: 글꼴,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최문경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3.

로빈 킨로스, 현대 타이포그래피: 비판적 역사 에세이』,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3.

요스트 호훌리,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김형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5.

더글러스 토머스, 푸투라는 쓰지 마세요』, 정은주 옮김, 마티, 2018.

얀 치홀트, 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에 관하여』, 안진수 옮김, 안그라픽스, 2022.


『바그너주의』(Wagnerism)의 본문과 후주 일부. 본문에는 주 번호가 없고(위), 미주에는 본문 문장 일부를 다시 적은 뒤 출전을 달았다(아래).

주 번호 없는 주, 요즘 스타일?

🔊 모베


주(註)는 책을 잇는 징검다리입니다. 기대고 의지하거나 논박하고 비판하는 다른 책들을 꼼꼼히 밝힌 주는 독자들이 다른 책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저자는 없으니, 주가 하나도 없는 책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글쓰기의 방법, 글의 종류, 예상 독자, 참조한 정보의 보편성 여부 등에 따라 얼마나 세세하게 드러내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만들고자 하는 책의 성격에 따라 주를 전혀 달지 않을 수도 있고, 거의 매 문장 주를 달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를 적절히 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주는 책이 어려워 보인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주가 달리지 않은 책을 어색하게 여기는 독자는 점차 사라지고, 주가 달린 책을 피하는 독자가 점점 늘어납니다. 꼼꼼하게 출전과 인용에 관한 주가 달려 있지만, 정작 그 주를 유용하게 이용할 가능성이 무척 낮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주렁주렁 주로 달린 접근 불가능한 고문헌들은 책의 엄밀성을 드러내주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정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몇 문장마다 달린 주 번호가 책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주 자체가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학술서가 아닌, 교양서에서 인용과 참조의 근거를 밝히는 일과 가독성을 높이는 일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 마티에서 한창 번역하고 있는 『바그너주의』도 주 번호가 하나도 없습니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많은 문헌을 모두 섭렵해 절묘하게 엮어낸 책인데도 말이죠. 이 책은 본문에 주 번호를 달지 않고 후주를 만드는 최근 영미권 교양서가 즐겨 이용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미주에서 주 번호를 달아야 할 문장의 첫 몇 단어로 인용 구절을 표시한 후 참고문헌을 적는 방식으로 페이지별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인용한 출전이 많으나 해당 출전을 매번 확인할 필요가 없는 책에서 자주 쓰입니다. 본문과 주를 쉽게 오갈 수 있는 전자책에서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어쩌면 전자책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방식을 채택하려면 편집 후반부에 노동력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특히 번역서일 경우 완전히 교정이 끝난 뒤에야 인용한 해당 구절을 찾아 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주 번호 없이 페이지 별로 정리되어 있으니 빠뜨릴 우려도 높습니다. 원서의 주 개수와 위치를 확인해가며 하나하나 대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실내형 인간』의 원서 미주도 이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판에서는 예전 방식으로 주를 달았습니다. 번역 시작할 때부터 주 번호를 달아두었거든요. 그런데 『바그너주의』는 번역자가 주 번호를 달지 않고 작업 중입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2,000개 정도의 문장만 찾아서 주를 달면 되거든요. 


❝ 인상적인 본문의 요소 ❞
🦈 조스바 -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의 도판설명
본문 중간중간 등장하는 각주나 도판설명은 독서에 도움을 주지만 때론 산만함을 주기도 합니다. 어려운 개념어가 자주 등장할 때엔 잘 읽히면서 바로 옆에 등장하는 것이 좋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눈에 덜 띄게 배치하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요.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은 도판설명을 사진 옆에 세로로 눕혀 배치했습니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도 떠올랐고요. 굉장히 어색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반복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눈과 머리는 규칙을 자연스레 익힙니다. 다양한 독서방식을 제안하는 것 같아 흥미로웠어요.

🔊 모베 - 번역된 문헌 찾기 달인

마티의 편집자들은 주에 달린 참고문헌이 외서인데 번역이 되어 있는 책일 경우, 번역된 책의 서지 정보와 해당 페이지를 병기하려고 노력합니다. 편집자가 해당 책이 번역되어 있는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문헌의 번역 여부를 하나하나 확인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이 작업을 가장 충실하게 하는 출판사는 단연 “난장”입니다. 난장 편집부는 귀신 같이 번역된 문헌의 서지 정보를 찾아냅니다. 수십 년 전에 나온 단행본은 물론이고, 잡지에 번역되어 수록된 논문까지 다 찾아내 해당 쪽수를 병기합니다.
존경심이 절로 듭니다!




🌱 죽순 - 서지정보도 번역한 책의 탄생』
번역서의 경우, 원서에서 밝힌 출전의 서지정보를 원어 그대로 각(미)주에 쓴 게 많습니다. 제목을 번역하면 한국어판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프랑스어나 독일어, 라틴어, 러시아어는 원어로만 쓰여 있으면 복장이 터지잖아요. 『책의 탄생』은 대부분 프랑스어인 출전 제목을 모두 한국어로 옮기고 원어를 병기했습니다. 적어도 저자가 이 문장에서 이런 키워드의 책을 봤구나 정도는 캐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옮긴이의 노력이 돋보이는 미주라고 생각합니다.
* 덧: 각주는 책 다리 부분에, 미주는 책 꼬리 부분에 넣는 주라고 알고 써왔는데요, 미주'는 표준어가 아닙니다. 후주가 표준어예요. 하지만 전문용어 가운데 표준어로 등록되지 않은 게 많아요.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수서, 배서 등도 표준국어대사전엔 올라 있지 않답니다. 그러니까 미주라고 쓰고 싶은 1인.

🧼 퐁퐁 -  백과사전 같은 주

국립예술자료원의 예술사 구술 총서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왼쪽 면에는 주, 오른쪽 면에는 구술문이 담겨 있어요. 주와 구술문이 나란히 흘러갑니다. 각주가 실린 면은 얼핏 백과사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박완서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 책, 그가 거쳐온 장소 등이 그만큼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어요. 
각주에 작가의 글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박완서 작가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바느질 품을 팔았던 일을 구술하면, 그 문장에 각주 기호가 달려 있고 『엄마의 말뚝』에서 엄마가 삯바느질하는 장면을 묘사한 문단을 보여주는 거죠. 작가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 글에 녹아들었는지 알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에 여학생들이 입었던 '몸뻬 바지', 일제의 식량 공출 때문에 '몸에 쌀을 숨겨 오는 일', '쌀가마니 괴담' 같은 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주, 지금은 사라진 동네나 신문·잡지, 교과서엔 실리지 않은 역사 속 사건에 대한 기록에 충실한 주를 보면 감탄하게 됩니다. 작가가 관통한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한 사람의 생이 얼마나 그 시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지 볼 수 있어요. 작가의 삶과 글과 역사가 교차하는 모습이 고집 센 수류산방의 디자인 덕분에 근사하게 다가옵니다.

❝ 바흐 칸타타 청음회 후기 ❞
🔊 모베

지난 화요일, 그러니까 2022년 2월 22일 저녁에 마티 사무실에서 “바흐 칸타타 청음회”가 있었습니다. 작년 12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출간 기념 강연과 작은 연주회에 이은 두 번째 행사였습니다. 뉴스레터 독자 몇 분과 함께 한 소박한 자리였습니다. BWV 82 “나는 만족합니다”와 BWV 144 “너희 품삯이니, 받아서 돌아가라” 두 곡을 각각 두 가지 버전의 연주로 감상했습니다.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목소리로 BWV 82의 두 버전을 비교했고, 24명의 합창단을 이끈 존 엘리엇 가디너의 음반과 4명의 성악가만 등장하는 지히스발트 카위컨의 음반으로 BWV 144를 들었습니다. 연주자들의 다른 해석이 풍성하게 만든 바흐 칸타타 세계를 살짝 구경했습니다. 칸타타 함께 듣기는 3월에도 계속됩니다. 칸타타 들으러 오세요.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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