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겪는 이상한 여름, 8월의 편지

한달 간 뭐했어?

저는 요즘 첫 평론집을 정리하는 작업 중이에요. 그래서 들어오는 청탁들은 모두 거절하고, 이미 완성한 글들을 다시 읽고 분류하고 서문을 쓰고 그런 일들을 하면서 한달을 보냈습니다. 아마 첫 평론집 이름은 "침투"가 될 것 같아요.

2016년 10월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을 때 『문학과사회』2017년 봄호에 발표했던 글이고, 저는 이 시기에 문학관이 다 바뀌어버렸거든요. 당시 참여한 좌담에서 실제로 "이 폭로들을 따라 읽으면서 저는 일주일 만에 문학관이 다 바뀌어 버렸어요.”라고 대답한 대목이 있었는데, 그것이 기사화(링크)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처음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그와 더불어 '현실에서 작용하는 비평적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침투"라는 제목은 이런 제 문제의식을 가장 잘 담아주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현재 서문을 거의 다 써가는데, 기분이 묘하고 그렇네요.
새 소식이 있어요.

지난 여름의 구름
독립문예지 베개 산문집

7월호(7월호를 다시 보시려면 이 링크를 눌러주세요)에서 미리 말씀드렸던 여름에 대해 쓴 산문이 실린 책이 드디어 발간되었습니다. 베개 3호에 「칠월」이라는 산문을 쓴 바 있고 이번 산문은 이 칠월의 연작입니다. 이번 제목은 「서른 여섯 번째 여름」이에요. 작년 여름에 처음 느꼈던 변화들을 기록해보았습니다. 굳이 제 글이 아니어도 함께 참여한 작가들의 산문들도 함께 있으니, 여름이라는 한 단어로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능한지, 휴식이 필요할 때 읽기 좋은 산문집이 될 것 같아요.
잡지-비평?
그런데, 첫 평론집에 싣지 않기로 한 몇 편의 글들이 있습니다. 책 전체의 흐름과 맞지 않고 만약 제가 두번째 책을 낼 수 있다면 이 글들은 두번째 책의 시작점이 되어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평론집에 싣지 않기로 했지만, 제게는 중요했던 몇 가지 작업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당시에는 평론가들이 대부분 편집위원 역할을 맡아 운영되어 왔는데요. 이런 잡지들의 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이때 처음 생겨났어요. 편집위원을 오로지 소설가들로 교체한 악스트(2015년 7월 창간)가 가장 먼저 창간되었고, 오래 운영되어 왔던 세계의문학이 폐지되고 릿터(2016년 8월 창간)가 새로 창간되었으며 문학과사회는 '하이픈'이라는 별호를 분권으로 나눠 혁신호를 감행했답니다. 그리고 창비에서는 평소 사회과학과 문학을 함께 다루는 창작과비평에 변화를 주는 대신, 문학을 중심으로 다루는 문학3(2017년 1월 창간)을 창간했죠. 그러니 지금 돌이켜보건대 2015~2017년은 바야흐로 문예지 쇄신의 해였습니다. 
새로 생겨나는 잡지들을 보면서 저는 '문학잡지'와 '문학'이라는 장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새로 창간된 많은 잡지들이 소설의 지면을 길게는 50매, 짧게는 30매로 대폭 줄였거든요. 비평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2015년 이전에 70매에서 100매를 쓰는 것이 예사였는데, 문예지 쇄신의 해를 거치면서 글을 쓰는 호흡이 그야말로 확! 줄어버렸고, 분량의 조절이란 사유의 호흡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했기 때문이죠. 즉, 문학이라는 장르는 그것을 실어나르는 매체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소설가들은 이제 70매 분량의 서사 단위가 아니라 50매짜리 호흡의 서사를,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키워드가 정해진 20~30매 내외의 짧은 서사들을 청탁 받기 시작합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어요. 비평이 발표되는 작품의 내용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작품의 길이와 호흡, 어쩌면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학잡지의 기획과 문학 장르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비평 역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문학작품'이 아니라 '문학잡지의 기획'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비평을 써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위의 글이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실린 글입니다. 글의 제목은 「설계-비평」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에 실렸어요)입니다. 저는 문학잡지 한권이 문학이라는 장르를 '설계'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그 설계의 구조를 분석해보려고 했습니다. 이 구조에는 잡지의 디자인, 코너 구성, 창간사와 같은 요소들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었어요. 또한 이전 잡지들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문학잡지에 일어난 변화들이 문학을 어떻게 서로 다르게 정의내리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했습니다. 
잡지-비평?
이 글을 쓰고 난 이후에 다른 분야의 비평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시청각,  크리틱-칼, 집단오찬, 옐로우 펜 클럽, 포럼A와 같은 미술 비평과 프리즘오브, 필로와 같은 영화 전문 잡지, 오큘로, 마테리알의 영상 비평 잡지, 사진 영역으로는 비평지는 아니지만 흥미로운 기획을 만들어나가는 보스토크도 살폈구요. 예술 분야는 아니지만 필로소피아도 독자로서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어떤 잡지들은 장르적 특수성의 전문성을 중심으로 비평계가 구축되어 있어 일반 독자로서 접근하기 힘들었지만 어떤 잡지들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주제, 즉 예술과 정치의 관계 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잡지가 있기도 했어요. 

저는 그 과정에서 미술잡지『포럼A』에서 초대하고 인터뷰를 진행한 '홍진훤'이라는 기획자이자 사진작가에 대해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분의 행보를 하나하나 검색해보면서 제가 추구하는 비평적 행위와 크게 맞닿아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설계-비평」이 현재 새로 창간된 문학잡지가 이전의 문학잡지와 어떻게 다르고, 새 잡지들이 구상하고 있는 문학의 다양성을 단순히 분석하는 글이었다면, "문학잡지란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글을 연달아 연작으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문학과사회』2019년 봄호에 발표된「현장-스코어-비평」가 그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문학잡지라는 매체가 어떠한 목표와 방법론을 가지고 문학이라는 장르에 개입해야 하는지, 제목에서 다루는 세 단어, '현장', '스코어', '비평'이라는 세 단어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제 나름의 비평관이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이제 사실 비평가와 기획자가 뒤섞인 글쓰기를 즐기고, 현재는 비평적 행위가 앞선 후에 그것을 기록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아카이빙으로서의 글쓰기를 비평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매체와 문학의 관계, 제도와 문학의 관계는 앞으로도 저의 중요한 비평적 관심사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두 편 정도의 가벼운 접근이었지만 앞으로는 이 글들을 기반으로 조금 더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인터뷰-비평?

이처럼 비평이라는 장르를, 어떤 특정한 작품에 대한 이해로 국한시키지 않고 어떤 장르의 구성에 무엇이 개입하는지 그 환경과 제도에 대해 제 관심사가 이동하면서 반드시 작가론이나 작품론에 천착하지 않는 다양한 형식의 비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비쥬얼 문예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있는 『모티프』라는 잡지로부터 청탁을 받았는데, 저는 이 분들이 하는 작업에 대한 비평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들에 대해 제가 아는 게 별로 없더라구요. 저는 잘 모르면 직접 물어보는 편이고, 그래서 모티프 팀에게 '인터뷰-비평' 형식을 요청했어요. 당시 이 비평을 쓸 때 다음과 같은 프롤로그를 썼습니다.
프롤로그 / 장은정

처음에 요청 받은 것은 40매짜리 원고 청탁이었다. 쓰고 싶은 것들은 언제나 차고 넘치므로 40매 정도야 금방 써내려갈 수 있을 테지만, 다른 문학잡지들에서 청탁을 받았을 때 쓰는 글들을 그대로 《모티프》에 싣는다는 것이 부적합하게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평소 모티프의 방향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던 독자였다. 내가 하려는/해야 한다고 여기는 문학과 《모티프》가 하고 있는 문학은 달랐던 것인데, 평소라면 ‘뭐 각자 믿는 대로 다르게 사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그저 내 글을 썼을 텐데 이번에는 그게 잘 안됐다. 왜일까? 

지금 문학장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문학들이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표절 사태,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 미투 운동을 통과하면서 기존의 문학에 대한 합의된 내용들이 깨져나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문학들이 형성되고 있다. 지금의 비평은 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완성도 있게 내어놓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입장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비평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독자들이 이 간극에 참여할 수 있는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는 이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되 때로는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하기도 하는 인터뷰가 가능하다면, 이 역시 비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게 본질적으로 비평이란 대화다. 누구와 대화할 것인가? 우선 나는 《모티프》와 대화하고 싶었다. 이 '인터뷰-비평'을 읽는 당신과도 이어서 대화하고 싶다.
어떤 일은 생각처럼 잘 안돼
모티프와의 공동작업은 무척 흥미로웠어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저는 독립잡지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비평'을 저의 단독 프로젝트로 연속적으로 진행해나갈 생각이었습니다. 그 다음 인터뷰 대상으로 소곡출판사의 '시씰'(@si_seal_april)팀의 작업이 무척 흥미로워서 한달에 한번, 바쁠 때는 두세달에 한번씩 만나면서 거의 1년 가까이 '인터뷰-비평'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는데, 시씰팀 내부 사정의 문제로 팀이 해체됐고 우리가 같이 준비하던 작업도 완성할 수 없게 되었어요. 조금 속상하고 슬펐지만, 뭐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시씰팀의 친구들과는 다른 재밌는 일을 궁리 중입니다. 기다려주세요.
요즘은 어떤 작업해?
제가 11년치 원고료를 정리해서 기사화되었던 ""매당 5000원의 삶" '노동자로서 평론가'의 삶은 가능한가"(링크)라는 기사 기억 나시나요? 이 기사를 보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정책에 대한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서울문화재단에서는 현재 충정로역 근처에 '청년예술청'을 개관 준비 중인데요. 여기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인 '서울청년예술인회의'의 멤버로 초대받았습니다. 예술인들에 대한 다양한 예술정책들이 과연 어떠한 담론을 바탕에 두고 있는지, 특히 '청년'이라는 기표가 예술정책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연구'의 방식으로 담론을 만들어보려는 시도에요.

그런데 이 연구의 특징은 반드시 앞에 실린 글을 인용하거나 비판하거나 접점을 찾아내서 이어지도록 릴레이 글쓰기를 해야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현재 성연주 연구자가 이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첫번째 글, 「'청년 예술'을 폐기하라」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이 프로젝트의 전체 방향성과 함께 할 멤버들을 소개하는 여는 글을 써주셨어요. 성연주 연구자는 다섯 명을 모으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글이 하나의 담론으로, 나아가 정책으로 작동하기 위해 5명의 필자를 초대했다. 서울청년예술단 기획에 참여한,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정진세와 최초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 신지연을 통해 실제 사업의 기획과 집행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들어보고자 한다. 이어서 청년연구자 김선기, 문화예술노동연대 사무국장 오경미, 그리고 문학평론가 장은정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청년예술의 사회적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이 가져온 사회적 효과에 대해 릴레이 형식으로 담론을 이어가고자 한다." (성연주, 「청년예술을 페기하라」 중에서)
저는 이 릴레이 연구에서 영광스럽게도(?) 마지막 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장난삼아 멤버분들이 모두 모인 미팅 자리에서 "릴레이 연구니까, 마지막 차례로서 앞서 연재된 다섯 명의 글을 전부 까도 되는거죠?" 물었는데 저는 왜 이런 장난을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요? 저는 정말 사람을 괴롭히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쿨하게 다들 "그럼요!" 해주셨습니다(ㅋㅋㅋ).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항상 흥미롭고 즐겁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이상, 문학평론가 장은정의
8월 15일의 뉴스레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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